[김용삼 칼럼] 간첩들의 파라다이스,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
[김용삼 칼럼] 간첩들의 파라다이스,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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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반공 방첩을 말하면 꼰대, 수구꼴통 소릴 듣는 참으로 끔찍한 나라가 되었다. 한 시절 주체사상을 신봉했던 세력들이 민주투사 운운하며 활개 치는 모습을 보면 간첩들이 우글댔던 구한말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더 위험하게 보인다. 구한말이나 대한민국 모두 안보 따위에는 관심 없는 나라이기는 마찬가지이니 조만간 또 한 번 망국 체험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운명 아니겠는가.

#. 조선에 나타난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라는 35세 청년 독일인이 조선에 도착한 시기는 임오군란이 진압된 직후인 1882년 12월 9일이었다. 청나라가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보낸 이유는 “청과 뜻이 통하는 서양 전문가를 조선에 보내 조선의 내·외정을 감시하고, 청의 지시를 받아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서양 전문가를 동원한 간접지배 전략이었다.

고종은 묄렌도르프를 외아문 협판(현재의 외교부 차관급), 해관 총세무사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청나라는 묄렌도르프를 통해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적극 간섭하는 등 종주권 행사를 노골화했다. 원 제국이 일본 침공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감시자를 파견한 이래, 이때처럼 중국이 내정 간섭을 노골적으로 강제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묄렌도르프가 청의 실력자 리훙장(李鴻章)과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모든 부서 관리들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에게 거의 매일 투서가 들어왔는데, 관리들의 악행을 폭로하고 그들을 단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 “러시아와 손잡으라” 속삭인 묄렌도르프

당시 영국은 청나라를 통해 조선 정부에 『조선책략』이란 책까지 제공하여 조선을 향한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나라의 명을 받고 조선에 온 묄렌도르프는 고종과 민비에게 “러시아가 바로 당신들의 왕권을 보호해 줄 수호천사”라고 속삭였다. 영국과 러시아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이는 ‘그레이트 게임’의 내막을 알 길 없던 고종과 민비는 묄렌도르프의 감언이설에 속아 러시아에 의존하여 자주독립을 추진하기로 작심한다.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1884년 7월 7일 조러우호통상조약이 전격 체결되었다. 러시아 황제는 조러 조약 체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묄렌도르프의 공로를 치하하여 그에게 성(聖) 안나 3등 훈장을 수여했다. 그 직후부터 국왕 부부는 러시아를 조선에 끌어들이는 친러 외교를 망국 때까지 집요하고도 일관되게 추진했다.

조러 수교가 성사되자 묄렌도르프는 이번에는 러시아와 밀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묄렌도르프에게 설득당한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에 “조선에 대한 직접적인 보호”를 요청했다. 고종의 특명을 받고 러시아와 접촉한 묄렌도르프는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해주면 그 대가로 영일만을 해군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라고 제안했다. 영·러 그레이트 게임의 가장 심각하고 민감한 이슈를 건드린 것이다. 이것이 제1차 조러 밀약사건이다. 

묄렌도르프가 총대를 멘 조러 밀약이 중간에 폭로되자 영국은 거문도를 무단 점령한다. 러시아가 조선으로 남하하여 부동항을 만드는 행위를 전쟁을 해서라도 봉쇄하겠다는 영국의 단호한 조치였다.

독일 외무성의 지령을 받고 조러 수교와 조러 밀약을 공작한 묄렌도르프.
독일 외무성의 지령을 받고 조러 수교와 조러 밀약을 공작한 묄렌도르프.

#. 알고 보니 묄렌도르프는 독일 간첩

러시아를 한반도로 끌어들인 묄렌도르프의 행위는 모국인 독일 정부의 지령에 따른 공작이었다. 독일 정부가 자국 안보에 큰 부담을 주는 러시아의 관심을 동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묄렌도르프에게 조러 밀약 지령을 내린 시기는 1884년 10월 독일 총영사 젬브쉬(Zembsch)가 서울에 부임했을 때, 젬브쉬를 통해서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묄렌도르프의 부인 로잘리에의 일기에 의하면 묄렌도르프는 “젬브쉬가 자신과 합의해서 일을 추진하도록 베를린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임계순, 「한로밀약과 청의 대응」, 『청일전쟁을 전후한 한국과 열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81쪽).

묄렌도르프는 독일 정부와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던 비밀 공작원으로, 독일 외무성으로부터 “러시아라는 곰을 동아시아 목장으로 유인하라”라는 극비 지령을 받았다. 이때부터 묄렌도르프는 고종과 민비를 감언이설로 유혹하여 러시아와의 수교 작전을 전개하여 성공시켰고, 이어 조러 밀약까지 추진했다.

비스마르크의 동아시아 정책은 러시아를 조선으로 끌어들여 영국과 대립시키고, 그 틈을 이용하여 유럽에서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묄렌도르프를 통한 조러 수교 및 조러 밀약 공작의 기본 원리였다. 묄렌도르프야말로 비스마르크의 동아시아 정책 실행을 위한 한국 출장소장과 같은 존재였다(최문형,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06, 57쪽).

#. 정체불명의 여성 손탁, 서울에 나타나다

1885년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는 서울에 부임할 때 인척으로 알려진 마리 앙투와네트 손탁(Marie Antoinette Sontag)이라는 여성을 데려왔다. 알자스로렌의 시골 마을 출신인 손탁은 보불전쟁으로 그곳이 독일 영토가 되면서 독일 국적을 갖게 되었다. 손탁은 서울에 도착했을 때 32세였고, 155㎝의 아담한 체구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단아한 풍모, 영·독·불·러 등 4개 국어에 능통했고, 곧바로 한국어를 익혀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러시아 정부는 베베르를 서울에 파견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조선 정부의 신뢰를 강화할 것, 조선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국왕 및 대신들과 개인적 친분 관계를 형성할 것”이라는 비밀 훈령을 내렸다(김종헌, 「슈페이예르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조선 내 외교활동-1884~1894」, 『대동문화연구』 제61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8, 147~148쪽).

러시아 정부의 훈령을 받고 고종과 민비에게 친절을 베풀어 환심을 사도록 만든 베베르 주한 러시아공사 부부.
러시아 정부의 훈령을 받고 고종과 민비에게 친절을 베풀어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 베베르 주한 러시아공사 부부. 베베르는 자기가 서울에 데려온 손탁을 조선 왕실에 침투시켜 비밀 외교라인을 구축했다.

이 훈령에 따라 베베르는 고종과 민비를 외교관으로서의 드높은 매너와 품위로 구워삶았고, 우아한 행동으로 러시아의 이미지를 높였다. 또 손탁을 왕실에 침투시켜 고종 내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손탁의 세련된 친절, 베베르 부부의 따뜻한 배려, 그리고 “왕실은 계속 보호받게 될 것”이라는 러시아 공사의 감언이설을 민비는 철석같이 믿었다.

조선에서 활동한 여러 외국인과 달리 손탁은 경력이나 이력조차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여성이었다. 일정한 직업이 없었던 손탁은 베베르의 주선으로 조선 궁내부의 외국인 접대계 촉탁으로 채용되었다. 그 후 25년간 조선에서 근무하면서 구한말 외교계를 주름잡은 풍운의 여걸, 서울 외교단의 꽃, 정치적 마돈나로 알려졌다(김원모, 「미스 손탁과 손탁호텔」, 『향토서울』 제56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96, 187쪽).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는 손탁을 황실 의전 담당인 황실 전례관으로 채용했다.

#. 러시아 비밀외교는 손탁의 작품

손탁은 뛰어난 한국어 솜씨로 국왕과 왕비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또 왕실과 러시아공사관, 베베르 공사와 고종 부부간의 비밀 연락을 담당했다. 손탁은 국왕과 왕비의 측근으로 활동했고, 수개국어에 능통해 외국과의 교섭에서 통역을 맡았다. 덕분에 손탁은 조선 왕실의 극비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입수할 수 있었다.

손탁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용모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으나 재주가 있어 시종 궁중에 출입하며 왕비는 말할 것도 없고, 국왕에게도 안내 없이 근접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왕실과 외국인 간의 연락은 물론, 운동비(비자금)의 전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라고 한다(코마츠 미도리(小松綠), 『明治史實 外交秘話』, 中外商業新報社, 1927, 377~382쪽).

왕실의 각종 경비도 손탁을 거치지 않고는 지급되지 않을 정도였다. 손탁을 통해 고종의 비자금을 받아 간 사람은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 헤이그 특사 헐버트, 한성전기회사 사장 콜브란 등이었다. 고종과 민비를 설득하여 조러 수교와 조러 밀약을 추진하게 만든 배후 인물도 손탁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외교적 곤경에 처하자 고종과 민비는 베베르와 손탁의 조언에 따라 일본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최문형,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1, 147쪽). 그 결과는 민비 시해, 을미사변이었다.

구마모토 출신 낭인으로 민비시해사건에 가담했던 기쿠치 겐조(菊池謙讓)는 “러시아 일류의 외교 정략은 먼저 손탁에 의해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기쿠치 겐조(菊池謙讓), 『朝鮮雜記』 卷2, 鷄鳴社, 1931, 102쪽). 손탁이 조선에서 수행한 역할은 엄밀하게 표현하면 러시아가 조선 왕실에 침투시킨 비밀 정보원, 스파이였다.

손탁은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러시아 비밀외교를 수행했다. 그녀는 러시아가 조선 왕실에 침투시킨 비밀 정보원, 스파이였다.
손탁은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러시아 비밀외교를 수행했다. 그녀는 러시아가 조선 왕실에 침투시킨 비밀 정보원, 스파이였다.

#. 대한제국을 쥐고 흔든 손탁

1896년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1년 동안 손탁은 서양요리와 커피로 수라상을 차렸다. 덕분에 손탁은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했다. 주한 이탈리아 총영사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는 손탁의 프랑스 요리에 푹 빠져 있던 고종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황제의 수라상을 준비하는 일은 한국의 다른 어떤 공무보다 잘 조직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황제가 러시아공사관에 피난했던 시절에 러시아 공사 부인의 시녀로 이후 유럽식 수석요리사 자격으로 황제의 궁정에 머물게 된 알자스 지방 출신의 손탁이라는 여인 덕분이다.’(까를로 로제티 지음·서울학연구소 역, 『꼬레아 꼬레아니』, 숲과 나무, 1996, 99쪽).

환궁한 고종은 1년 동안 자기를 극진히 보필한 손탁에게 정동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얼마 후 고종은 왕실 내탕금을 내려보내 양관을 지어 손탁에게 하사했다. 손탁은 이 건물을 서구풍으로 장식하고 구조를 호텔로 개조했다. 외국인 방문이 늘자 궁내부는 거액의 황실 내탕금으로 2층 벽돌 건물을 신축했다. 건물 설계는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이 담당했다. 1902년 10월 오픈하면서 손탁빈관(孫澤賓館)으로 명명된 이 양관은 욕실이 딸린 25개의 객실이 마련되었다. 고종은 손탁에게 호텔 경영권을 부여했다.

고종이 손탁에게 하사한 손탁호텔.
고종이 손탁에게 하사한 손탁호텔.

엠마 크뢰벨은 황실에서 손탁의 위상을 '무관의 여황제'라고 표현했다. 외국인들은 대한제국의 이권 사업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얻기 위해 손탁과 접촉했고, 그녀의 개입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손탁 만이 황제와 대한제국 황실, 정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정식 외교관도 아니고, 더구나 외국 여성으로서 19세기 후반 대한제국의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있다는 것은 한국 외교사에서 극히 이례적이고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황윤영,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밀사’ 마리 앙투아네스 손탁」, 『문화와 융합』 제40권 6호, 한국문화융합학회, 2018, 588쪽).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여 러시아공사관이 폐쇄되자 손탁은 그동안 모은 부동산을 처분하고, 손탁호텔 경영권도 매각하여 거액의 현금을 챙겼다. 손탁은 1909년 9월 19일 프랑스 칸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살다가 러시아에서 객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 조선 정탐 시행한 일본 장교 카이즈 미쓰오(海津三雄)

일본은 1877년 개항장 교섭을 위해 하나부사요시모토(花房義質)를 대리공사로 조선에 파견했다. 이때 카이즈 미쓰오(海津三雄) 중위가 하나부사 공사를 수행하여 조선에 왔다. 측량사였던 그는 서울 일대의 정황을 탐색하라는 비밀 임무를 받았다. 카이즈는 오랜 기간 조선에 머물며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반도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비밀 측량을 실시했다. 참모본부의 「역사초안(歷史草案)」에는 카이즈 중위의 비밀 측량이 한반도에 대한 첩보 명령의 시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남영우, 『일제의 한반도 측량침략사』, 법문사, 2011, 36쪽).

카이즈는 1883년 6~8월 두 명의 부하와 함께 47일 동안 매일 최소 20리에서 최대 100리까지 이동하며 비밀 측량을 했다. 카이즈 팀이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일본 군부는 『병요(兵要) 조선사정』(1885)과 『조선지지략(地誌略)』(1888)을 간행했다(최혜주, 『정탐-제국 일본, 조선을 엿보다』, 한양대학교 출판부, 2019, 19쪽).

주변국에 대한 고급정보 수집을 위해서는 주변국의 언어를 습득하고, 최상층부에 인맥 형성이 필요했다. 이런 목적을 위해 일본 참모본부는 1880년 2월, 초급장교 중에서 어학연수생 10명을 선발하여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은 조선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상층부에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하여 향후 첩보활동에 필요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예비 간첩대원이었다.

1880년 11월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소위가 서울에 파견되어 연수생 지휘 감독을 담당했다. 호리모토는 서울에 주재한 초대 첩보 장교였다. 이 무렵 일본 정부는 조선의 군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신식 군대 창설을 부추겼다. 일본의 제안을 받은 고종은 1881년 4월, 국왕 친위부대인 교련병대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별기군(別技軍)이다.

일본의 조언으로 조직된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는 서울 주재 초대 첩보장교였다.
일본의 조언으로 조직된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는 서울 주재 초대 첩보장교였다.

하나부사 공사는 조선 정부에 호리모토를 군사교관으로 추천했고, 고종은 그를 별기군 교관으로 임명한다. 조선 최초의 신식 군대 별기군이 일본 첩보 장교에 의해 양성된 것이다.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이 폭발했다. 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난병들은 호리모토 소위를 비롯하여 그 휘하의 육군 어학생 2명, 유학생 1명을 타살했다.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온 일본공사관 외무 순사 3명도 난병에게 맞아 죽었다.

임오군란 후 일본 참모본부는 미즈노(水野弘毅), 마쓰오카(松岡利治) 중위를 조선에 파견했다. 1882년 8월에는 세토구치 나카오(瀨戶口中雄) 대위, 이토(伊藤祐義) 중위,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 중위 등 간첩대 장교 세 명과 두 명의 관서국 요원을 서울에 보냈다. 이소바야시는 임오군란 때 사망한 호리모토의 후임으로 조선 내 첩보 조직을 지휘했다.

#. 일본 간첩대 요원에게 일관파천(日館播遷) 요청한 고종

일본 참모본부는 군사 작전용 지도 제작을 위해 조선에 파견한 간첩대 요원들에게 측량작업을 명령했다. 조선에 파견된 간첩대 요원 중에서 지도 제작에 필요한 정탐 활동을 활발하게 추진한 3인방은 카이즈·이소바야시·미우라(三浦)였다. 간첩대의 측량 자료를 토대로 일본 참모본부는 1883년 1만 분의 1 지도인 「조선국 경성지략도(京城之略圖)」와 2만 분의 1 지도인 「한성 근방도」를 제작했다. 이러한 지역별 지도를 토대로 20만 분의 1 측량 지도인 「조선 육도」(전 68매)가 작성되었고, 1893년에는 거대한 「조선전도」를 간행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종이 일본 간첩대 소속인 이소바야시를 대단히 신뢰했다는 사실이다. 1884년 2월, 임오군란 배후조종 혐의로 청나라로 끌려가 유폐된 대원군의 귀국 소식이 시중에 나돌았다. 충격을 받은 고종은 이소바야시에게 내관을 보내 “대원군이 귀국해서 왕비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일이 발생하면 무관 관사에 피난시켜 달라”고 비밀리에 의뢰했다(다보하시 기요시 저·김종학 역,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상)』, 일조각, 2013, 815쪽). 여차하면 일본공사관으로 피난할 것이니 허락해 달라는 일관파천(日館播遷)을 요청한 것이다. 이소바야시는 조선 국왕이 심각한 제안을 해 오자 관련 사실을 공식 루트를 통해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조선에 파견한 간첩대 요원들의 정탐활동을 토대로 일본 참모본부가 1893년 간행한 "조선전도".
조선에 파견한 간첩대 요원들의 정탐활동을 토대로 일본 참모본부가 1893년 간행한 "조선전도".

고종의 일관파천 요청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난병들이 고종이 집무하는 창덕궁에 난입하여 국왕 앞에서 탐관오리 민겸호와 경기 관찰사 김보현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고종은 반란 진압 후 하나부사 공사에게 “조선 난병들이 또다시 난동을 부리면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라며 일관파천을 요청했다. 일본 공사는 이 제안에 흔쾌히 동조했다. 그 후 임오군란처럼 난병들이 궁궐에 난입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아 일관파천은 실행되지 않았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직전, 이소바야시는 충청도·경기도 일대를 정탐하던 중 일본공사관으로부터 “정변이 발생했으니 빨리 귀경하라”라는 급보를 받았다. 서울로 귀환하던 이소바야시는 남대문 밖 청파 갈오리에서 조선 난민들에게 살해당했다.

#. 일본 간첩들의 소굴이 된 조선

일본은 육군 참모본부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대외 침략전쟁을 돕기 위한 정탐 및 조사 활동을 위해 동경지학협회, 동방협회, 식민협회, 동양협회 등을 조직했다. 이들은 경쟁적으로 조선과 중국에 요원을 파견하여 체계적인 정탐 활동을 벌였다. 1891년 출범한 동방협회는 일본군의 한반도 상륙과 전쟁 수행을 위해 주요 항만을 조사하는 일에 깊이 개입했다.

동방협회 간사장 이나가키 만지로(稻垣滿次郞)는 1893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를 시찰한 후 원산에서 시베리아로 갔다. 귀로에 함경도·강원도·경기도를 지나 인천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일본·지나(중국)·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아시아의 터키’ 조선이 제국의 세력 변동을 야기할 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1885년 일본 공부성의 광산 전문가 이토 야지로(伊藤彌次郞)는 『조선국 광산의 개황』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이토는 조선을 8도로 나눠 금·은·철·동·석탄 산지를 지도에 표시하여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근대 일본의 지리학을 대표하는 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는 1900년 8월 하순부터 다음 해 3월 하순까지, 1901년 8월 상순부터 8개월간 두 차례 조선의 지질을 조사했다.

일본은 외교관, 언론인, 전문가 등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과 중국의 내정·문화·경제 상황·생활 습속을 철저히 조사했다. 이처럼 치밀한 조사·연구 덕분에 일본군은 청일·러일전쟁 때 조선과 중국을 손금 들여다보듯 하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 구한말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더 위험하다

일본을 씹어먹을 것처럼 덤비는 한국은 일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들이 조선에서 벌였던 정탐활동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이라도 일본과 일본의 정책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을 시행했을까? 일본인과 일본 정부의 속성이나 행동양태에는 완벽하게 무지한 상태에서 감정만 앞세워 일본 사람의 살점을 씹을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반일"을 외치는 한국인들은 대체 뭘 어쩌자는 것일까?

김정은이 연이어 미사일 발사로 위기를 고조시키는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의 통일부 장관은 기회만 나면 북한을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는다. 국정원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4억 5,000만 달러를 김정일 비자금 계좌로 불법 송금했다가 실형을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이런 사람만 골라서 이 나라 통일·안보 사령탑에 임명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사례가 통일부 장관, 국정원장뿐이었을까?

일본을 제대로 알자고 외치면 "토착왜구"란 비난이 쏟아진다. 대한민국은 반공 방첩을 말하면 꼰대, 수구꼴통 소릴 듣는 참으로 끔찍한 나라가 되었다. 한 시절 주체사상을 신봉했던 세력들이 민주투사 운운하며 활개 치는 모습을 보면 간첩들이 우글댔던 구한말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더 위험하게 보인다. 구한말이나 대한민국 모두 안보 따위에는 관심 없는 나라이기는 마찬가지이니 조만간 또 한 번 망국 체험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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