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어느날, 당시 LG 구본무 회장이 새로 준공한 그룹의 연구소를 방문했다.

회장님을 앞에 두고 발표자가 연구소의 현황과 목표, 미래 비전 등에 관해 열심히 브리핑을 했다.

한참 브리핑을 듣고 난 뒤 구 회장이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못 알아듣겠어요. 무슨 약자를 그리 많이 씁니까?” 그럼 내가 뭐 하나 물어볼게요. 'BMK'가 뭔지 압니까?“

발표자는 당황하면서 모른다고 했다.

“모르겠지요? 그거요, 내이름 약자입니다. 구본무, 본무쿠, BMK!, 알겠습니까??”

“자기들끼리 쓰는 전문 용어나 약자를 그런 식으로 막 말하면, 여기 있는 우리가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듣는 사람 생각도 하면서 브리핑을 해야지...”

“고객들에게도 그래요.. '제품설명서' 읽어 보고 바로 작동할 수 있는 고객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것도 고객 입장에서 좀 쉽게 쓰고, 쉽게 좀 말하고요, 앞으로 우리 그렇게 좀 합시다.”

이 에피소드를 회고한 LG그룹의 당시 고위 임원은 이 일이 있고 나서 지나치게 어려운 전문 용어나 약자를 남용하지 말자는 문화가 그룹에 자리 잡았다고 전했다.

며칠 전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던진 ‘RE100’ 질문을 둘러싸고 논란이 뜨겁다.

이 용어를 몰랐던 윤석열 후보에 대해 이재명 후보 지지자들은 “윤석열 후보의 무식이 탄로났다. 대통령 자질이 없다”고 공격하고, 윤 후보 지지자들은 “야비한 함정”이라고 되받아 친다.

당시 토론회에서 이재명 후보가 RE100이라는 용어를 꺼낸 것은 문재인 정권의 원전폐기 정책과 반대로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원전기술을 적극 발전시키겠다는 윤석열 후보의 공약을 비판하기 위해서다.

이재명 후보가 지적하고자 했던 사안의 본질은 원전 활성화 공약이 세계적인 클린 에너지 캠페인 내지 재생에너지 사용 운동의 흐름과 충돌한다는 어긋난다는 점이었다.

이재명 후보가 친절하고 품격있는, ‘신사’였다면 윤 후보에게 질문을 하면서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캠페인, RE100”이라는 설명을 덧붙였을 것이다. ‘급조된 후보 윤석열의 준비부족’을 폭로하겠다는 이재명 후보와 캠프의 ‘작전’이 개입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국민중에 RE100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퍼센트나 될지 생각해보면, 과거 토론회에서 시내버스 요금을 몰라서 낭패를 본 어떤 후보의 경우와 달리 이 작전은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역으로 다른 후보가 이재명 후보에게 갑자기 “JI-MOON의 원전정책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보면 이재명 후보는 무슨 뜻인지 바로 알고 대답할 수 있을까?

‘JI-MOON’은 Jae In-Moon, 문재인 대통령 이름의 영어 약자다. 미국 매체에서는 이렇게도 표기를 하고 있다.

이상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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