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2020년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은 참 재미있는 영화다. 정치와 권력을 만지면서 나름 팽팽하게 긴장감을 유지하던 영화는 뒷부분에서 갑자기 김재규가 ‘Mission: Impossible’의 톰 크루즈 흉내를 내면서 액션물로 바뀐다. 다큐가 예능이 됐고 극장 안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감독이라는 인간들은 가끔 영화적 상상력을 허구적 거짓말과 착각한다. 비어있는 부분을 개연성 있게 채워 넣으라는 얘기지 아무 말이나 지껄이라는 혹은 맥락 없는 거짓말을 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일정 시대를 다룬 ‘밀정’이나 ‘봉오동 전투’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한 사람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저렇게 전투를 잘하는데 나라는 왜 뺏겼지? 그러나 그걸 문제 삼는 관객은 없다. 영화로라도 ‘국뽕’을 해소하겠다는 그 의지까지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일종의 선한 거짓말로 감독도 알고 관객도 아는 일종의 영화적 공모다. 그러나 선의가 아닌 악의의 거짓말은 좀 다르다. 감독의 일방적인 왜곡은 영화를 빙자한 사기로 관객에 대한 기만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 개봉한 ‘킹 메이커’란 영화가 있다. 김대중과 선거판의 여우라고 불리던 한 실존 인물의 이야기로 네 번 연속 낙선한 정치인이 탁월한 정치공작의 귀재를 만나 불운한 정치 인생을 끝내고 한국 정치의 주요한 인물로 등장한다는 내용이다. 없는 사실 아니고 대체로 동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디테일로 가면서 영화는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한다. 영화 속에서 정치공작 전문가는 세상을 바꾸려면 우선 이겨야 한다고 말한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즘이다. 반면 김대중은 그보다 ‘왜’ 이겨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반박한다. 정치적 승리보다 도덕과 정의를 한 차원 높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영화가 아닌 실제 이야기를 해 보자.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는 노무현을 재해석하면서 캐릭터 구축에 성공한다. 반면 설경구는 ‘킹 메이커’에서 김대중을 다만 그대로 복사할 뿐이다. 덕분에 아무런 감동도 만들어내지 못한, 영화적으로 한 수 낮은 선택이었다)

영화 속 정치공작 전문가는 엄창록으로 그가 김대중과 손을 잡은 것은 1961년부터다. 김대중 캠프에 합류한 엄창록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한다는 이유제강以柔制强을 선거 전략으로 내세운다. 말이 부드러움이지 실은 사기와 협잡이었다. 야당 운동원이 소액(요즘 돈으로 하면 1천 원)을 봉투에 담아 여당 후보 이름으로 돌리거나 야당 운동원이 여당 후보 이름으로 고무신 같은 것을 돌린 뒤 다음 날 ‘딴 집에 갈 게 잘못 배달됐다’며 이를 회수해 간다. 인간이란 게 얻는 것보다 뺏기는 일에 예민한 법이다. 여당 후보에 대한 반감을 만들어내는데 이만큼 효과적인 것도 드물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격분시키는 방법도 있다. 막걸리 파티를 한다며 여당 후보 이름으로 수백 명을 초대해 놓고 사람들을 헛걸음치게 만들어 유권자들을 분개하게 만드는 방식인데 떳떳하지 못한 자리에 참석했다가 낭패를 본 경우여서 이때의 반감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더욱 맹렬하게 불타오른다. 공술을 얻어먹으려던 욕심의 좌절을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슬그머니 치환하면서 사적 분노를 공적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지금은 상식적인 선거판 잔꾀가 되어버린 이런 기술들이 모두 엄창록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효과가 있었을까. 탁월하게 있었다. 1961년 인제 보궐선거에서 김대중의 첫 당선은 엄창록의 작품이었다. 1963년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의 목포 당선 역시 엄창록의 간계가 빛을 발한 결과다. 1967년 6.8 총선은 박정희가 김대중을 떨어뜨리기 위해 전력을 다한 선거였다. 박정희는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여는 등 공화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6.8 총선이라는 지옥에서 김대중을 살려낸 것이 바로 엄창록이었다. 상상 초월 흑색선전과 가공할 덮어씌우기 앞에서 순박한 금권 선거 전략은 박살이 났다. 엄창록의 신기술은 여권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나중에는 그의 전략을 모은 책자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책자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책자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선거란 유권자를 여하히 조작하느냐의 기술이다’. 엄창록은 선거에서 대중을 개, 돼지로 본 아마도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덕분에 김대중은 세 번의 총선에서 재미를 본다. 이게 팩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김대중은 못된 꾀만 가득한 선거 전문가의 정치판 입성(공천)을 불허하면서 이렇게 훈계한다. “자네는 준비가 덜 된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네.” 이제껏 엄창록이 어떤 공작을 했는지 빤히 아는 사람이 딴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득을 봐 놓고도 마치 몰랐던 것처럼 그걸 탓하는 것이다. 그 유명한 자신의 타자화, 요새 말로 유체 이탈 화법의 시작이다. 영화는 흑색선전 마타도어는 엄창록 개인의 정치적 과욕과 일탈이며 김대중은 끝까지 도덕과 정의를 사수하려 했다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노골적인 김대중 찬가다. 한국 정치사 흑색선전과 마타도어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김대중에 대한 미화다. 감독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선을 위해 옳지 않은 수단 써도 되나, 얘기해보고 싶었다.” 좋은 문제 제기다. 그러나, 그러는 당신은 흥행을 위해 사실 같은 건 마구 왜곡해도 되냐고 묻고 싶다. 완벽한 객관이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려고 노력한 흔적은 있어야 한다. ‘킹 메이커’에는 그 흔적이 전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족 하나. 6.8 총선은 노골적인 지역감정이 등장한 선거였다. 김대중은 이런 요지의 연설을 했다. “유달산과 영산강의 영이 있고 삼학도가 혼이 있다면 이 김대중을 보호해 달라. 이 김대중 죽어서도 목포를 지킬 것이다.” 김대중이 맞선 상대는 전남 진도 출신으로 김대중은 그를 ‘외지 사람’으로 몰아가며 지역감정에 호소했다. 지역감정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1963년 5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신라임금 후손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그건 공화당 찬조연설자들이 한 말이었고 후보자 본인이 지역감정을 이야기 한 것은 김대중이 처음이다. 엄창록과 무관할까.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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