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기준금리 21.5%까지 올리며 실업률 폭등했지만...고통은 3년, 이후 40년간 최대 호황
금리인상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어...정부 눈치보는 한국은행, 폴 볼커식 결단 필요할 때
한국의 '비효율과 거품'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유동성 파티' 청구서 곧 날아올 것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폴 볼커(Paul Volker, 1927~2019)는 카터·레이건 행정부에서 연임한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다. 미국의 조야(朝野)는 지금까지의 연준 의장 가운데 가장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한 사람으로 폴 볼커를 지목한다. 그는 미국 경제가 최악의 인플레이션 국면에 빠져 있을 때 ‘초고금리’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성공적으로 진정시킨 '인플레 파이터'였다. 레이건 행정부 때는 미국의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를 치유하기 위해 일본의 ‘엔화 평가절상’을 유도한 ‘플라자 합의’의 미국 당자자이기도 했다.

O 만성적 인플레이션으로 ‘이류 국가’로 추락할 수도 있었던 미국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무역규모 증가에 비례해 더 많은 준비금을 보유해야 하는 미국 바깥 국가들은 '20세기 금' 달러를 사들여야 했다. 달러 공급량이 충분하지 못하면 화폐가 부족한 세계 경제는 디플레이션에 빠진다. 하지만 달러를 공급할 유일한 통로는 미국 경상수지 적자뿐이다. 하지만 미국의 적자가 계속되면 '달러 시스템'의 근본 신뢰가 흔들린다. 이는 '트리핀 딜레마'로 잘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미국 경제는 암울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베트남 정글에 미군이 갇히고 패전했다. 월남전 와중에 전비를 조달하느라 돈을 많이 찍어내어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만성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다. 1971년 8월 닉슨의 ‘금태환 정지’ 선언은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부었다. 달러의 금태환정지가 선언되기 전, ‘금 1온스는 35달러’와 교환되었다. 하지만 달러에 대한 불신으로 세계 각국은 달러 대신 금을 선호했다. 인플레이션에 노출된 달러 보다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의 금에 대한 선호는 당연한 것이다. 달러의 금으로의 태환 요구를 감당하기 어려렵게 되잔 금태환 정지를 선언한 것이다. 금과의 고리가 끊어진 달러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양껏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당시 배럴당 3달러였던 유가는 단숨에 4배로 치솟았다. 이는 당연히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었다. 따라서 긴축정책을 써서 시중 유동성을 흡수해야 함에도 연준은 재선(再選)을 꿈꾸는 닉슨 대통령의 압력에 굴복해 통화정책을 거꾸로 시행했다. 긴축이 아닌 통화팽창 정책을 고수한 것이다. 닉슨행정부를 대신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기 위해 후진국에서나 했을 법한 ‘가격통제(price control)’를 시행했다. 우리로 치면 라면 값을 묶은 것이다. 물가안정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가격구조만 왜곡시켰다.

1979년 2월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전복되고 그들이 반미 노선을 강화하자 유가는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2차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다. 여기에 이란의 급진 세력이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기습 점령하고 이들을 ‘1년 가까이’ 인질로 잡았다. 당시 카터대통령은 미국 인질을 구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비밀리에 펼쳤지만 현지 일기불순으로 군사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미국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겨졌다.

1979년 미국 경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달러 불안을 기저에 두고, 베트남전쟁과 오일쇼크를 거친 미국에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림-1>은 2차 대전이후 2022년 1월까지의 미국의 인플레이션의 장기 추세를 나타낸 것이다. <그림-1> 왼쪽에 굵은 아랫방향으로의 화살표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표시한 것이며, 그 오른 쪽에 제 1차, 제 2차 석유파동 시기의 인플레이션이 표시되어 있다. '구원투수' 볼커의 등판은 제 2차 석유파동 당시였다. 카터 대통령에게서 1979년 8월 연준 의장으로 지명된 그는 인플레이션을 치유하고자 공격적 통화긴축정책을 폈다.

1979년 8월에 취임한 폴 볼커는 물가와 경기부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 중 좌고우면하지 않고 ‘물가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볼커는 1979년 10월 6일 ‘경기침체 상황임에도’ 기준금리를 15.5%로 4%포인트 올리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를 당시 언론은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불렀다. 이른바 '볼커 쿠데타'였다.

레이건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볼커는 고금리 정책을 더욱 독하게 밀어붙였다. 1981년 6월에는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렸다. 무서운 결단이었다. 볼커 의장은 ‘철의 볼커’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통령을 포함, 누가 뭐라고 해도 소신을 꺾지 않고 강력한 금리인상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는 급기야 1981년 기준금리를 21.5%까지 올렸다. 이로 인해 미국인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소비는 급락했다. 실업률은 10%를 넘어섰다. 분노한 농민들이 연준 본관 건물에 트랙터를 몰고 와 시위를 벌였다. 볼커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소지해야만 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잡지 않고서는 미국 경제는 장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금리로 인한 고통은 3년 가까이 지속되었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고 싸운 결과 결국 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그의 긴축은 1981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은행 예금이자가 높으니 돈들이 은행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준금리 21.5%와 그 무렵의 인플레이션 14% 차이만 해도 7%포인트가 넘는 고금리였다. 시중 유동성이 줄어드니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했고 집값의 거품도 빠졌다.

인플레이션은 14.6%의 최고치에서 9%로 꺾였다. 1982년에는 4%로 잦아들었고, 이듬해에는 2.36%까지 떨어졌다. 볼커가 인플레이션이 충분히 잡혔다고 판단하고 긴축을 풀자 경제는 힘차게 되살아났다. 1980년 4월 817포인트까지 내려갔던 다우지수가 1983년 3월 1130포인트까지 상승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잡아 1990년대 경제 붐의 초석을 놓았다. <그림-1>에서 보듯이 1983년 이후 인플레이션은 ‘거의 40년 가까이’ 수면 이하로 가라앉았다. 미국 경제는 새롭게 태어났다. 1987년까지 8년 동안 연준 의장을 지낸 그는 후임자 앨런 그린스펀에게 바턴을 넘겼다. 그린스펀은 볼커가 이루어 놓은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토대로 경쟁력 있게 미국 경제를 이끌 수 있었다. 그린스펀 연준 의장 시절 ‘골디락스’란 말이 만들어졌다.

O 파월 연준 의장의 ‘금리인상’ 신호 발송과 한국의 대응

<그림-1>에서 오른쪽 끝부분은 최근의 미국 인플레이션을 표시한 것이다. 2021년 3월부터 인플레이션이 가사화 되기 시작했다. 2020년 3월 코로나-19 창궐로 유동성이 과잉 공급되면서 인플레이션은 년률로 6%를 넘어섰다. 파월의장은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출구전략’을 공언했다. 우선 테이퍼링으로 자산매입(유동성 공급) 규모를 줄이고 테이퍼링이 끝나면 기준금리를 인상한다는 것이다. 2022년 안에 금리를 ‘0.75%’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한편 지난해 우리나라의 유동성(M2기준)은 400조원 넘게 늘면서 사상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다. 증가율로는 12.9%로, 유로존(7.0%) 브라질(10.9%) 스웨덴(9.5%) 멕시코(7.6%) 뉴질랜드(7.1%) 러시아(6.7%)를 모두 제쳤다. 기준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낮추고 양적완화로 작년 1~11월 매달 1200억달러씩 시장에 돈을 푼 미국(12.9%)과 같은 수준이다. 불어난 유동성은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인 동시에 자산시장 과열의 원인이 되었다. 최근의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과 집값 상승은 과잉유동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은행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유동성을 회수하는 작업에 나섰다. 작년 8월과 11월에 이어 지난달 기준금리를 0.25%포인트씩 올려 연 1.25%로 높였다. 올해 3월 이후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상에 발 맞춰 한은도 올해 두세 번 더 금리를 올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경우 올 하반기 기준금리는 최대 연 1.75~2.0%로 올라갈 전망이다.

금리인상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가계부문이 과다부채를 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금리인상은 인기 있는 정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면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금리를 올려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기준금리 인상 행보와는 상반된 유동성 공급 확대를 시행하고 있다. 시장금리 오름세를 꺾기 위해 이달 7일 국채 2조원어치를 사들인 데 이어 추가로 국채 매입을 고려하겠다는 것이다. 국채를 사들이는 것은 ‘부채의 화폐화’(monetarization of debt)를 의미한다, 정부도 한은에 국채 매입을 재촉하고 있다. 기재부는 ‘한은의 국채 추가 단순 매입 등이 필요할 경우 적기 시행될 수 있도록 정책 공조를 지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정책 행태는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동시에 밟는 ‘모순된 정책 행태’인 것이다. 금리를 올려 유동성을 흡수하겠다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채를 매입해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다. 물가 안정이 목표인 한은이 국채 매입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되레 키울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은이 상반된 신호를 시장에 보내는 것이다.

O 폴 볼커가 한국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

볼커는 권총을 소지해야 할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권총 소지는 상징이다. 하지만 볼커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묵묵히 물가안정에 모든 정책 역량을 쏟아 부을 수 있었던 것은 ‘연준의 독립성’을 지켜준 미국의 시스템이었다.

카터가 낙선한 것은 따지고 보면 볼커의 살인적인 고금리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카터는 자신의 정치적 손해를 감수했다. 레이건 참모도 볼커가 너무 거칠 게 고금리를 몰아붙이자 볼커의 고금리 정책을 반대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인플레이션을 수습하지 않고서는 미국의 경제를 담보할 수 없다는 소신으로 볼커를 수용했다. 고통스런 2년 반의 고금리를 겪자 세상은 달라졌다. 1983년 이후 40년 가까운 오랜 기간 동안 미국 경제는 인플레이션이 통제된 사상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미국의 고금리 정책은 소련의 붕괴를 촉진하는 동인이 되었다. 사회주의의 비효율이 누적된 소련은 ‘미국 발(發) 고금리’를 수용하기에 힘겨웠다. 레이건은 영리하게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소련을 ‘악의 제국’(evil’s empire)으로 몰아붙이고 ‘군비경쟁’(arms race)의 시동을 걸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속상 상 비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미국의 군비 경쟁을 쫒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레이건의 “고르바초프 각하,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시오”라는 그 유명한 역사에 남는 연설의 초석을 쌓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독일의 통일 그리고 소련의 붕괴는 볼커 연준 의장의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한 고금리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은 YOLO에 젖어 오늘만 보며 내일을 기약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구조조정은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비효율과 거품’이 차곡차곡 쌓인 것이다. 2020~2021년에 ‘영끌과 빚투’로 부동산 거품이 쌓을 때도 그냥 ‘부지하세월’로 저금리를 고수했다. 유동성 파티의 청구서가 곧 날아올 것이다. 하지만 절박함이 업다. 금리인상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금리를 낮출 가하는 꼼수에 빠져있다. 최근의 한은의 행태가 그렇다는 것이다.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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