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제자리걸음을 계속해온 ‘원격 의료’가 윤석열 정부의 핵심 정책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그동안 원격 의료를 반대해온 의료계에서 ‘수용’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후보자 시절부터 “국민 모두가 원격 의료의 수혜를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 원격 의료가 더 활성화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윤 당선인이 공약으로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 육성’을 내걸었던 만큼, 원격 의료에 관한 규제도 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2020년 2월부터 코로나 의료 공백 채우기 위해 원격 의료 본격화

서울 동네 의원이 코로나19 재택 환자를 관리하는 '서울형 의원급 재택치료' 시범운영이 시작된 가운데, 지난 1월 21일 오전 서울 구로구의 한 의원에서 의사가 비대면 진료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의료 공백을 채우기 위해  정부가 전화 상담과 처방(원격 의료)을 한시적으로 허용하면서, 원격 의료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사진=연합뉴스]
서울 동네 의원이 코로나19 재택 환자를 관리하는 '서울형 의원급 재택치료' 시범운영이 시작된 가운데, 지난 1월 21일 오전 서울 구로구의 한 의원에서 의사가 비대면 진료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의료 공백을 채우기 위해 정부가 전화 상담과 처방(원격 의료)을 한시적으로 허용하면서, 원격 의료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사진=연합뉴스]

우리나라에서 원격 의료의 역사는 1988년 연천·화천·울진 보건의료원과 대학병원을 연결해 원격 영상 진단을 실시하면서 시작됐다. 2000년대 들어서도 특정 지역이나 군부대·교도소 등을 위주로 운영되는 정도에 머물렀다.

원격 의료가 본격화된 것은 2020년 2월부터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의료 공백을 채우기 위해 정부가 전화 상담과 처방(원격 의료)을 한시적으로 허용하면서다.

제도가 마련되자 원격 의료는 빠르게 확산됐다. 의사와 통화나 화상으로 진료를 받으면 환자가 있는 동네 약국으로 처방전이 가고, 택배 업체를 통해 약이 문 앞에 배달되는 시스템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자가격리에 처한 환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업계에서는 “한시적이지만 ‘누구나’ 원격 의료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변화의 시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말부터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하면서 원격 의료는 더 활발해졌다.

원격 의료 플랫폼 ‘닥터나우’, 지난 3월까지 누적 인원 400만명 기록...원격 의료 플랫폼 30개에 달해

원격 의료 플랫폼인 ‘닥터나우’ 한 곳에서만 지난 3월까지 400만 명(누적)이 원격 의료를 받았다. 닥터나우와 제휴한 의료 기관도 지난 1월 360곳에서 3월 900곳으로 늘었다. 코로나19 이후 원격 의료 플랫폼은 30여개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사진=닥터나우 홈페이지.
사진=닥터나우 홈페이지.

의료 공급자인 의사들도 원격 의료를 경험한 후 변화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체 의료 기관 중 3분의 1 이상이 비대면 진료를 시행한 경험을 갖고 있다. 개원의 중심의 서울시의사회가 지난해 의사 675명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선 응답자의 86.7%가 ‘원격 의료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현재 국내의 원격 의료는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의료법 17조와 33조, 34조를 모두 위반하는 행위이고, 약사법 50조도 위반하고 있다. 정부의 감염병 위기 대응 경보가 ‘심각’ 단계인 현 상황에서는 ‘한시적으로’ 누구나 원격 의료를 받을 수 있다. 경보 시스템이 낮아지면 수십 개에 달하는 모든 원격 의료 플랫폼이 문을 닫을 운명에 놓인다. 만약 다시 ‘원격 의료 금지’로 돌아가게 된다면, 병원 정보 제공이나 예약 대행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으로 축소될 것이다.

하지만 원격 의료 제도화의 가능성은 3가지 점에서 청신호가 켜진 상태이다.

① 윤석열 당선인의 의지, “원격 의료는 피할 수 없는 현실”

디지털플랫폼 정부를 표방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원격 의료 도입에 적극적이다. 지난해 12월 윤 당선인은 원격 의료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라며 “첨단 기술의 혜택을 국민 모두 누릴 수 있도록 시도하겠다”라며 원격 의료 법제화 가능성을 제시했다.

지난 18일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비대면 진료업체 ‘닥터나우’ 본사를 방문했다. 역대 인수위 가운데 모바일 헬스케어 업체를 찾은 건 처음이어서,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새 정부의 국정과제를 준비하는 인수위가 ‘설립 1년을 갓 넘긴 신생기업을 찾았다’는 점에서, 그만큼 원격 의료 이슈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윤 당선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됐다.

업계 관계자는 “원격 의료 법제화는 행정부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인수위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 희망을 걸고 있다”고 밝혔다.

② 대한의사협회는 방향 전환, 지난 24일 원격 의료 수용...약사회 반대가 남은 변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임시 방편으로 도입된 비대면 (원격) 진료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다.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비대면 진료가 한시적으로 허용된 이래, 2년 만에 비대면 진료를 경험한 환자수는 약 180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2월 2만4천727명에서 2021년 1월 159만2천651명, 2022년 3월 누적 443만여 명의 환자들이 비대면 진료를 이용한 것이다.

이제 원격 의료는 ‘한다, 안한다’ 차원을 이미 넘어서 ‘어떻게 하느냐’로 방향 전환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격 의료 결사반대’를 외치던 의사협회도 입장을 바꿨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24일 대의원 총회를 열고 원격 의료 수용 입장을 밝혔다. 의협은 총회에서 원격 의료 시행에 대비해 의협이 주도적으로 대책을 마련하자는 안건을 의결했다. 구체적으로 동네 병원 등 1차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점과 ‘신경 쓸 게 많은’ 원격 진료의 특성을 고려해 ‘수가’는 대면 진료의 1.5배 이상이 돼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필수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지난 24일 서울 서초구 더케이호텔서울에서 열린 대한의사협회 제74차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필수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지난 24일 서울 서초구 더케이호텔서울에서 열린 대한의사협회 제74차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의사협회가 원격 의료를 수용한 건 세계적인 추세를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32개국에서 이미 원격 의료가 시행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코로나19 상황에서 원격 의료가 970만건 이상 이뤄졌다. 원격 진료를 이용한 환자는 85%가 "다시 이용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만족도가 높았다. 코로나 사태 이후 2년 동안 비대면 진료가 진행되면서, 의사들이 원격 진료를 무작정 거부하다가는 커다란 국민 반발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자 결국 원격 의료 수용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이에 비해 약사회는 여전히 약 배달을 반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시적 비대면 진료'까지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상황이다. 약사회는 약 배달이 허용될 경우, 몇몇 대형 약국으로 처방전이 쏠리고 동네 약국은 어려움에 처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원격 의료와 의약품 배달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거동이 불편해 비대면 진료를 받은 환자가 약국에 직접 나가서 약을 받아야 한다면, 원격 의료의 본래 취지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③ 더불어민주당도 제한적 원격 의료 입법 추진...발목잡기 가능성은 변수

원격 의료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현재 원격 의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의료법 개정이 시급하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비대면 진료가 계속되려면, 170석이 넘는 더불어민주당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더불어민주당 강병원·최혜영 의원이 지난해 9월, 의원급에 한해 비대면 진료를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해 현재 국회에 계류중이다. 새 정권 하에서 민주당이 과거처럼 ‘원격 의료 반대’로 입장을 다시 바꿀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이미 원격 의료는 시대적 당위이다. 코로나19로 정부와 의협이 합의해 2020년 2월부터 한시적으로 허용돼온 비대면 진료의 효용성은 이미 확인됐다. 의협이 전향적으로 ‘수용 의사’를 밝힌 것도, 코로나 진료를 경험한 뒤 원격 의료에 자신감을 갖게 된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따라서 윤 당선인 취임 이후, 거대 야당이 되는 민주당이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입법을 미적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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