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발발한 이래 이데올로기나 기존의 친소(親疏) 관계와는 관계없이 분야에 따라 이중플레이의 가면무도회를 벌이고 있다. 도덕이나 선악의 프레임보다는 국익에 따른 판단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외교가 정책(policy)이 아닌 책략(stratagem)이 필요한 이유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1880년 일본에 간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와 고종에 바친 책이 있다. 초대 주일 청조의 공사 하여장의 참사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이다. 친중(親淸)ㆍ결일(結日)ㆍ연미(聯美)로 방아(防俄), 즉 청나라와 친하고 일본, 미국과 연합해 러시아에 대항하자는 내용이다. 중국인이 써서 조선인에게 준 것이지만 최초로 4강 외교에 관한 내용이다

이 책의 필사본이 조선에 전파되자 유생들은 벌떼처럼 일어났고 퇴계 이황의 후손이라는 이만손등은 임금을 오도하고 있다면서 김홍집을 탄핵하는 만인소를 올렸다. 

만인소에서 유생들은 조선은 이미 청의 속방인데 새삼스레 왜 친청을 주장하느냐고 했고 믿을 수 없는 일본은 조선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 결탁이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또 알수 없는 나라 미국을 끌어들였다가는 그들의 술수에 말릴 수 있어 곤란에 처할수 있다면서 반대했다. 그리고 청,일,미 세나라와 연대하게 되면 러시아를 자극해 침범을 자초할 수 있어 결국 조선책략은 백해무익하다고 주장했다.

조선 말기의 유생들은 이처럼 한반도 주변 4강에 대해 무지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지정학이라는 개념은 전무했다. 정책도 없었고 책략은 더더구나 없었다. 조선책략의 저자가 중국인이니 자기네들 국익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기는 하지만 오죽하면 그들이 이런 책을 써서 개화파 김홍집에게 줬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책략
《조선책략》(朝鮮策略)의 표지. 

작금의 4강외교는 조선말에 비해 비교도 할수 없이 복잡하다.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우크라이나 사태가 기존 국제질서를 기초부터 바꾸고 있고 군사ㆍ정치ㆍ경제ㆍ무역ㆍ에너지ㆍ식량유통 등 각영역에 미치는 나비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와 대리전을 치루면서 나타나는 국제질서는 세기의 대변혁이다. 러시아는 미국과 영국이라는 앵글로 색슨 진영과 생과 사를 건 결전을 치르고 있다. 미국을 위시한 NATO는 아시아로도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당장 한국과 일본을 끌어들이면서 중공의 반발이 거세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중립국이던 핀란드를 가입시키려 하자 중공은 핀란드에 대해 양국관계에 심대한 해를 미칠 움직임이라면서 비판했다. NATO의 판도가 기존 북대서양에 머물지 않고 아시아로도 옮겨오자 보이는 반응이다. 우크라이나 분쟁에 따른 각국의 이합집산은 빠르게 일어나고 있으며 기존의 반목관계도 이익에 따라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해소되기도 한다. 미국과 EU가 인도에 대해 러시아를 이롭게 하는 밀수출금지 조치를 비판하자 그동안 국경분쟁을 빚어왔던 중공은 개별국가의 주권에 속하는 정책에 반대하지 말라면서 인도편을 들고 나섰다. 

러시아, 인도, 중공의 3각관계도 미묘하다. 러시아는 중공을 내심경계하면서도 미국이 이 두나라를 한편으로 몰아버리면서 정식군사동맹은 아니지만 협력하고 있다. 러시아와 사실상의 에너지동맹인 인도는 중공과도 분야에 따라서는 대미전선에 서고 있다. 인도는 그러면서도 미국, 일본, 호주와 함께 비공식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의 일원이기도 하다. 3각 관계는 러시아ㆍ중공ㆍ이란 사이에서도 형성되고 있다. 이 세 나라는 에너지와 핵, 안보에 있어서 대미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세계는 금융, 서비스업에 기반을 둔 진영과 에너지 식량의 실물이 뒷받침되는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미국에 등을 돌리고 있는 중동의 석유수출국기구(OPEC)에는 러시아가 멤버인 ‘OPEC+Alliance’의 형태로 가세한 상태다. UAE와 사우디 아라비아가 친러, 친중으로 돌아선 가운데 사우디 아라비아는 달러가 안닌 중공의 인민폐로 결제하기로 해 서구진영에 충격을 주고 있다.

또 쿼드내에서 인도는 중공을 공동의 적으로 하고 있는 일본과는 맹우관계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서는 정반대로 일본이 러시아를 적대시하는데 반해 인도는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오는 10월로 예정된 인도네시아 발리 G20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니다. G20 가운데 인도, 중공, 인도네시아는 서구주도의 대러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주최국인 인도네시아의 고민은 예정대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을 초청하느냐의 여부다. 푸틴이 나올 경우 미국과 서구국가들이 단체로 보이콧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G20에는 러시아 편도 꽤 많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사우디 아라비아, 터키등은 최소한 중립이거나 서구에 우호적이지 않은 게 현실이다. 지정학자들은 BRICS를 다시 거론하고 있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공, 남아공의 자원대국이 다시 가까워지면서 EU나 G7에 대립하는 구도로 국제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한민국의 4강 외교도 유연하게 국익을 취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무조건적인 친(親)과 무조건적인 반(反)은 곤란하다. 자칫하다가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한미동맹도 중요하지만 미국내 정치상황 변동까지 고려해 중기적으로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지금의 미국은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적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과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중공과는 철저한 상호주의로 나아가야 하며 주권침탈에 대해서는 결연히 맞서야 하다. 중공과의 관계가 꼬인 것은 저들의 패악질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굴종적인 태도로 일관한 전 정권의 탓도 크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섯부른 감성적 분위기에 휘말려 적으로 돌릴 필요는 전혀 없다. 얼마전 미 바이든 정부가 자국경제를 돌보지도 않고 우크라이나에 40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한데 대해 공화당 하원의 폴 고사르의원은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동맹이 아니며 러시아는 미국의 적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우리의 적인지 아닌지만 판단하면 그만이다

세계 각국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발발한 이래 이데올로기나 기존의 친소(親疏) 관계와는 관계없이 분야에 따라 이중플레이의 가면무도회를 벌이고 있다. 도덕이나 선악의 프레임보다는 국익에 따른 판단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외교가 정책(policy)이 아닌 책략(stratagem)이 필요한 이유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 前 MBC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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