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의 촛불정신이 주창하는 '주권자 민주주의'는 유사전체주의 재확인
자유라는 개념은 끊임없는 '왜곡의 대상'...개념부터 올바로 세워야
인간의 지적, 도덕적 능력에 겸손하고 시장의 자생적 질서 신뢰할 때 비로소 번영

문재인 정부 5년의 치명적 실패는 역사 속 유물로 사라진 사회주의에 미련을 두고 철지난 평등주의에 함몰되어 ‘자유’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경험하기 못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은 ‘정권교체를 건국’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 기저에는 좌파의 오만한 ‘설계주의’가 깔려있다.

역사발전의 동학(動學)에서 현재는 과거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장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과거라는 난장이에 올라탄 거인’으로 행세하며, 과거(전임정부)를 적폐로 몰아 역사 보복의 방아쇠를 당겼다.

O 퇴임사에서 드러낸 ‘반(反)자유민주적 촛불정신 본색’

문재인은 취임사에서는 자제했지만, 퇴임사에서는 ‘촛불정신’을 끝내 드러냈다. 그는 “국정농단 사건으로 헌정 질서가 무너졌을 때 국민은 가장 평화적이고 문화적인 촛불 집회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고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했다. 그리고 “나라다운 나라를 요구한 촛불광장의 열망에 우리 정부가 얼마나 부응했는지 숙연한 마음” 이라고 했다.

촛불정신이 주창하는 ‘주권자 민주주의’는 광장민주주의 그리고 유사전체주의와 맞닿아있다. 문재인 정부는 헌법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인용한 뒤 이를 “모든 권력은 ‘촛불을 든’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비틀었다. 헌법 1조 2항의 ‘국민’은 군주제 폐지로 ‘빈자리가 된 국왕’을 대신하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국민’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치적 대중 집회에 모여 촛불을 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권자 민주주의’ 신봉자들은 민주주의는 선거나 대표자 위임에 국한하지 않고 “나로부터 행사되고 어디에나 행사되고 늘 행사 된다”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의 궁극적 지향점은 ‘광장민주주의’이다. 자유민주주의가 ‘광장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프랑스 헌법(제3조 1항)은 “국가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국민은 대표자나 국민투표를 통해 국가주권을 행사한다”로 되어있다. 주권의 행사방식을 ‘대표자와 국민투표’로 한정한 것이다. 이는 광장에서의 주권행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프랑스 헌법 3조 2항은 “국민의 일부나 특정 개인이 주권의 행사를 특수하게 부여받을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 헌법에 따르면, 국체(國體)를 흔들 수 있는 ‘헌법개정자문위원회’와 ‘원전공론화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은 그 자체가 위헌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이름으로’ 이를 자행했다.

유사전체주의 정권 하에서 자유는 질식할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정권은 개헌의 ‘내재적 한계’(the intrinsic limitation of the present contract)를 뛰어 넘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골격에 까지 손을 대려 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려고 시도했다.

O 자유를 질식시킨 ‘유사전체주의’

전체주의 사고는 ‘원자화된 개인 위에 선(善)하고 전지(全知)한 국가가 들어서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고 믿는다. 국가전체주의(유사전체주의)에서 국가는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로 해석된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도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이다. 하지만 이는 통상적 의미에서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재산을 책임 진다’는 것과는 층위가 다른 문제이다. 고유의 생산자원을 갖지 않는 무산(無産)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 진다’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를 ‘최대의 고용주’로 자임했다. 결과는 세금일자리 양산이었다. 이로써 비정규직 임시 일자리가 양산되어 일자리 질이 낮아졌고 재정 부담만 키웠다. ‘왜소화된 개인, 전지(全知)한 국가, 위축된 시장’은 국가전체주의 행태의 전형을 이룬다.

O 자유주의 확산을 위한 정지 작업

꺼져가는 자유의 불씨를 죽이지 않은 것은 유권자의 현명한 선택 덕분이다. ‘보편적 가치이면서 시대정신인 자유’를 대한민국에 복원시켜야 한다. 하지만 자유주의를 선언한다고 자유주의가 정착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가 지난한 대장정이다.

자유 개념은 끊임없이 ‘왜곡의 대상’이었다. 벌린(I. Berlin)의 자유개념이 그 출발점이다. 그는 자유를 ‘소극적negative sense), 적극적 자유(positive sense)’로 나누었다. 그의 지론은 “실제적 잠재적 선택을 하는 데 인위적 장벽의 수를 줄여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소극적 자유’(negative notion)이다. 하지만 자유는 사회적 맥락 하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약한다면’ 그 자유는 제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사회적 맥락에서의 ‘사회적 자유’(social freedom)를 ‘적극적 자유’(positive notion)로 불렀다. 하지만 소극적, 적극적이란 어감에서 오는 선입견으로 ‘적극적 자유를 지향해야 한다’는 사고가 확산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왜곡이 일어난다.

자유에 대한 왜곡이 거침없이 자행된다. 소극적 자유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자유’라면 즉 ‘~로 부터의 자유’라면, 적극적 자유는 ‘~에 의한 자유’를 의미한다. 이 경우 ‘소극적 자유’는 ‘국가로부터의 자유’이며, 적극적 자유는 ‘~에 의한 자유’로 '국가에 의한 자유'를 의미한다. ‘국가에 의한 자유’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민들의 생활과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란 용어를 쓰면서 자유를 파괴하고 있다.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의 저자 ‘판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는 정의로운 사회란 ‘모든 사람에게 실질적인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고 규정하고 있다. 실질적 자유를 형식적 자유와 비교하면서,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고 자기소유권이 침해되지 않는 상태를 ‘형식적 자유’로, 거기에 더하여 개인이 하고 싶은 바를 행할 기회가 최대한으로 주어진 상태를 ‘실질적 자유’라고 구분하였다.

파레이스의 ‘실질적 자유’는 좌파에 의해 자유개념을 비트는 소재로 이용된다. 경제민주화론자 김종인이 빠질 리 없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사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강조했다. 굶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질적 자유’를 ‘실질적 자유’로 이해하면 어느 틈에 ‘기본소득’ 논의가 자리를 잡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사먹게 ‘국가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O 경제민주화와 시장으로부터의 도피

경제민주화는 헌법 119조 2항의 ‘국가의 규제권’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민주화’는 일반 대중이 ‘절대 왕정 등 지배계급과 싸워 시민적 권리를 쟁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경제민주화에서 민주화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다. 김종인 식대로 해석하면 ‘경제는 정치에 의해 규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탐욕스런 시장권력이 정치권력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경제가 ‘정치 논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경제 민주화는 ‘시장으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하며, 국가권력에의 안주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는 ‘경제의 노예화’이다.

‘에리히 프롬’(E, Fromm)의 시각을 원용하면 경제민주화는 ‘가학성(sadistic)’의 발로이다. “내(정치)가 너(경제)를 좋아하기 때문에 지배하는 거야”, “너(경제논리)는 나(정치논리)에게 기댈 권리가 있어”, “재벌의 구조를 미리 손보지 않으면 우리나라 경제가 크게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야”, “행태규제만으로는 부족해, 문제의 원천인 구조를 손봐야 하는 거야” 등의 논리가 전개된다. 프롬의 시각에서 볼 때, 김종인은 전형적인 ‘가학증’의 정신세계에 놓여있다.

O 에필로그: ‘존재와 자유 그리고 번영’은 뫼비우스의 띠

자유민주주의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자유를 지켜 온 투쟁’의 역사였다. 권리장전(명예혁명 1689), 미국의 독립선언(1776), 불란서 시민혁명(1789)은 모두 국가라는 절대권력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쟁취한 시민적 권리로서의 정치자유가 시장과 결합되면서 오늘의 번영이 이뤄진 것이다.

하이에크(Hayek)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인간의 지적능력과 도덕적 능력에 대해 겸손할 때 그리고 시장경제의 자생적 질서와 그 진화능력(進化能力)에 신뢰를 보낼 때 이성의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가 비로소 진보할 수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풍요를 누리고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프롬을 소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에게는 보다 큰 권력에 순종하고 굴종하려는 내면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 심리적으로 굴종하려는 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나 홀로 보다 조직 속에 들어가’ 안주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이 땅에 정착하려면 한 사람 한사람 ‘자유의 무게’를 이겨내야 한다. 자유의 무게를 견디어 당당한 사회구성원이 될 때, 나 자신과 사회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독한 경험만큼 위대한 스승은 없다. 자유억압의 문재인 5년의 실패는 이 땅에서 ‘자유 확산의 당위’로 작용되어야 한다. ‘인간 존재와 자유 그리고 번영’은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한다. 투철한 역사의식을 갖고 자유를 대한민국에 복원시켜야 한다. 자유는 ‘지금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어야 한다.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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