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이미 망해버린 조선의 왕 무덤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이미 지어놓은 아파트를 두고 시비를 거느냐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주인공은 원종으로 추존된 정원군이 아니다. 죽은 지 400년이 넘은 그의 백골이 이미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는지 없는지는 나도 관심없다. 이 문제의 핵심은 법이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법을 우습게 알고 뭉개는 일을 그냥 넘어가면, 무조건 저질러놓고 “내 배 째라”라고 버티는 일들이 속속 생겨날 것이다. 법 체계는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위법을 눈감아주는 데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무법천지의 피해는 곧 우리 모두의 ‘나’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는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기까지 정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던 인조가 누구의 대통을 이은 것이냐 하는 정통성 문제는 만만하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1628년에는 이조판서 이귀와 최명길 등 반정 공신들이 정원군의 추숭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흔히 반정으로 왕이 되거나 어머니가 후궁인 왕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자신의 친부모를 추숭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지나친 추숭은 오히려 자신의 정통성을 훼손시키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세자는 물론 대군도 아니었던, 일개 왕자에 불과한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래서 대신들과 성균관 유생들까지 거세게 반발했다.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대신 김장생은, 인조가 할아버지 선조의 종통을 잇고 정원군을 백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박지계 등은 정원군을 아버지로 해야 한다며 서로 대립하였다. 선조의 대통을 잇자는 주장을 받아들이면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할 수 없어지므로 전자를 주장하는 대신들은 그 점을 노렸던 것이다.

 그러나 인조는 이 논쟁에서 박지계의 손을 들어주었다. 즉위 직후 아버지를 대원군에 봉하고 양주군 곡촌리에 있던 정원군 묘를 흥경원으로 격상했던 인조는 어머니 계운궁 구씨가 별세하자 “염과 빈전을 국장에 준하여 거행하라”라고 명하였다. 장지는 지금의 김포 장릉 자리로 정해졌다. 끝내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어머니를 인헌왕후로 추숭한 것이다. 다음 해에는 원종의 흥경원도 김포로 천장하였다.

김포 장릉의 전경.
김포 장릉의 전경.

추숭이 결정되었음에도 반대는 여전했다. 그래서 정원군 추숭례는 인조 즉위 13년만에, 추숭 결정 후 4년 만에 겨우 치를 수 있었다. 그제서야 원종의 위패가 종묘에 봉안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군이나 세자가 아닌 왕자로 추존왕이 된 사람은 조선 왕조에서 원종이 유일하다. 그러니 얼마나 반대가 심했겠는가? 당시 인조의 결정을 반대하는 여러 언관을 유배 보냈는데, 정언이라는 사람이 이를 번복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예기》(禮記)에 ‘아버지를 여읜 후 갑자기 존귀해졌을 때 아버지를 위하여 시호를 짓지 않는다’ 하였고, 여중(呂中)은 ‘아버지의 벼슬이 낮을 경우에도 그 당사자에게 합당한 시호를 만들어야 하니, 이는 자신의 벼슬로써 그 아버지에게 가할 경우 높이려 했으나 도리어 낮추는 꼴이 되어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가 못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전하께서 시호를 추증하는 일도 이미 지당한 도리가 못되는데, 곧장 열성의 지위에 올리려 하신다면 그것은 예경의 본의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중략)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일이 과연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이목을 맡은 삼사는 거의 다 쫓아내었고, 정원은 후설(喉舌·나라의 중대한 언론을 맡은 신하라는 뜻. 승지를 달리 이르던 말)을 맡은 자리인데 오래 전에 가두어버렸으며, 고굉(股肱·‘팔과 다리’라는 뜻으로, 임금이 가장 믿고 중히 여기는 신하)을 맡은 대신은 내팽개치듯 버렸습니다. 바르게 논하는 자들을 근거 없는 논의를 한다 하고, 아첨하여 영합하는 자들을 정직하다 하여, 시비가 전도되고 사특하고 바른 것이 구분되지 않고 있으니, 이른바 ‘충성스럽고 아름다운 행실이 자취를 감추고 아첨과 간사함이 풍미하고 있다’라는 상황과 가깝다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깨닫고 서슴없이 길을 바꾸어 예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역대의 득실을 귀감으로 삼아 속히 예에 맞지 않는 예를 중지시키고 유배하라고 한 명을 거두어 들이소서.”

인조는 이 상소를 보고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인조실록》에 실린 이 글은 원종의 추숭이 인조에게 얼마나 힘겨운 싸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 

정원군(원종)은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원군의 이복형인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7년 후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가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옥사가 발생하였다. 이른바 ‘신경희의 옥’이다. 이때 능창군은, 선조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며 광해군 대신 세자 후보로 거론되었던, 정원군의 동복형 신성군의 양자였다. 신성군은 임진왜란 때 사망했지만 그 양자 능창군은, 광해군에게 여전히 위험 인물로서 제거해야 하는 존재였다. 또 정원군의 집(지금의 경희궁 터)이 있던 새문동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소문이 돌아 광해군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김포 장릉에서 열리는 원종의 제향 모습.
김포 장릉에서 열리는 원종의 제향 모습.

신경희의 옥으로 강화도에 유배된 능창군은 두려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정원군은 화병으로 몸져누웠고 1619년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능창군의 형이며 정원군의 아들이던 능양군은 큰아버지 광해군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을 것이다. 바로 그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킨 인조이다. 인조반정의 커다란 원인은 인조 개인의 복수심이었던 셈이다.

2009년 6월 30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조선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김포시에 위치한 추존왕 원종의 장릉도 그 40기 중 하나이다.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다는 의미는 전 세계 인류가 공동으로 미래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귀중한 유산으로 지정하고 이를 지켜나가기로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유산을 훼손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김포 장릉 반경 500미터(m) 안 역사 문화 환경 보존 지역에 높이 20m 이상의 아파트를 지으면서 사전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문화재보호법 위반이다. 건설사들은 아파트 건설 대상지인 인천시 서구 검단신도시 사업시행자인 인천도시공사가 2014년 문화재 관련 허가를 받았고, 이후 서구청의 주택 사업 승인을 받아 적법하게 아파트를 지었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아파트라는 게 하루아침에 뚝딱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수년 전부터 부지를 선정해야 하고 땅을 파야 하고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국토교통부는 신도시 지정 단계에서, 인천시는 도시 계획 단계에서, 인천 서구청은 검단신도시 환경 영향 평가 및 경관 계획 단계에서, 건설회사는 설계 시공 단계에서, 문화재청은 문화재 보호구역 영향 평가 심의 단계에서 그 아파트가 적법하게 지어지고 있는지 검증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관할 구청에서는 건설사에 사용검사 확인증을 내주면서 아파트 입주를 승인했다. 일단 주민이 입주하면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해진다. 

인천 서부경찰서는 지난 5월 31일, 건설사 대표 세 명을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아파트 사업 승인과 관련해 직무유기 혐의로 입건한 인천 서구청 공무원은 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불송치하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흙을 한 삽 한 삽 뜰 때마다, 아파트가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거기에 수많은 공무원의 비리가, 혹은 무지가, 혹은 태만이 버무려지고 켜켜이 쌓였을 거라는 의심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해볼 만한 일이다. 무엇보다 어느 관청, 어느 과정, 어느 책상에서부터 이런 ‘간 큰’ 위법이 덮어지기 시작했는지는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김포 장릉 위로는 항공사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비행기가 낮게, 자주 지나간다.
김포 장릉 위로는 항공사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비행기가 낮게, 자주 지나간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망해버린 조선의 왕 무덤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이미 지어놓은 아파트를 두고 시비를 거느냐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주인공은 원종으로 추존된 정원군이 아니다. 죽은 지 400년이 넘은 그의 백골이 이미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는지 없는지는 나도 관심없다. 이 문제의 핵심은 법이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법을 우습게 알고 뭉개는 일을 그냥 넘어가면, 무조건 저질러놓고 “내 배 째라”라고 버티는 일들이 속속 생겨날 것이다.

장릉 앞 아파트는 왕릉을 천장하지 않는 이상 두고두고 말썽이 따라다닐 것이다. 사실은 사고가 난 동을 비롯하여 주변 8개 동을 다 허물고 다시 짓기로 한 광주광역시 화정동 아파트처럼 말썽의 소지를 원점에서부터 없애야 했다. 위험이 눈앞에 보이는 광주 아파트와는 경우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자. 부지 선정부터 불법인 아파트를 짓는 데 규격에 맞는 자재가 100% 사용되고 적법한 감리 공정이 이루어졌을까? 또 법이 무시되는 사회, 다시 말해 무법천지에서 사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또 있을까? 법 체계는 사소해 보이는 위법을 눈감아주는 데서 금이 가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무법천지의 피해는 곧 우리 모두의 ‘나’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감당할 각오는 되어 있는가?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