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CES 2022 프레스컨퍼런스 후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대표가 정의선 현대차그룹회장에게 액화수소 운반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현대중공업
지난 1월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CES 2022 프레스컨퍼런스 후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대표가 정의선 현대차그룹회장에게 액화수소 운반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현대중공업

정기선은 지난해 10월, 4년만에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현대중공업그룹의 '정기선시대’ 개막을 선언했다. 아버지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정치와 축구협회 활동으로 경영일선에서 떠난지 30여년에 현대중공업의 오너경영 체제가 부활된 것이다.

정기선은 사장 승진과 함께 현대중공업지주와 한국조선해양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정몽준 이사장과 함께 축구협회에서도 일했던 오랜 ‘가신(家臣)’,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회장과, 가삼현 한국조선해양 부회장이 정기선 체제의 안착을 돕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2021년 건설기계 제조업체인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 현대두산인프라코어로 탈바꿈 시키면서 조선과 에너지, 건설기계 등 3대 핵심 사업축을 완성했다. 지난해에는 조선업 호황에 발맞춰 대규모 수주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부문 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2021년 228억 달러를 수주, 당초 목표(149억 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코로나19의 기세가 약화되면서 지난해부터 선박 발주시장이 급격히 살아나고 있어 정기선 체제 구축도 탄력을 받고 있다.

조선해운시황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2021년 1~11월 세계 선박 발주량은 4507만CGT(표준선 환산톤수)로 2020년 같은 기간 1897만CGT보다 138% 증가했는데 한국조선해양은 2년 치 일감을 이미 확보해놓은 상태다.

더불어 선박 건조가격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선박 건조가격을 나타내는 클락슨 신조선가지수(Newbuilding Price Index)는 2021년 11월 153.6포인트로. 2021년 1월 127포인트보다 21% 상승했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해양플랜트 발주시장이 열린 점도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국제유가 50~60달러선이 해양플랜트 개발의 손익분기점으로 여겨지는데 현재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기준 국제유가는 배럴당 120달러선이어서 해양플랜트 수출도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 조선업계의 가장 큰 과제로 꼽혀온 대우조선 인수, 합병에 제동에 걸린 것은 현대중공업을 넘어 국내 조선업계에 큰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삼성중공업으로 이루어진 조선 3사체제는 해외시장에서의 수주경쟁으로 인한 선박가격 하락으로 조선업계 전체의 채산성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돼왔다. 이로인해 대우조선에 투입된 공적자금만 10조원에 달한다.

이에따라 한국조선해양은 2019년 3월 산업은행과 대우조선해양 인수 본계약을 맺은 뒤 6개 국에 기업결함심사를 요청했다. 2021년까지 카자흐스탄, 싱가포르, 중국에서는 조건없는 승인을 받았지만 올해 1월 유럽연합(EU)은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의 합병을 불허했다.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 시장을 독과점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였다.

정기선 또한 한국재계의 다른 창업 3.4세 오너 경영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AI), 로봇 등 미래사업 투자를 본격화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국내 조선사 가운데 처음으로 정기선 대표가 지난 1월 열린 세계 최대 전자제품 전시회 ‘CES2022’에 직접 참여했다. 그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2022 행사에서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비전으로 ‘퓨처 빌더(Future Builder)’를 제시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CES2022에서 계열사 아비커스의 자율운항기술, 현대두산인프라코어와 현대건설기계·현대로보틱스의 건설기계 및 로봇기술, 그룹 전반에 걸친 해양수소 가치사슬(밸류체인)을 소개했다.

세계 최고의 조선사(Shipbuilder)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CES2022에서 미국 빅데이터 유니콘 기업 팔란티어와 핵심사업에서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을 위한 협약을 맺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은 국내 주요 대기업 중 오랫동안 근속연수 1위를 차지해왔다. 이직률도 극히 낮은 기업, '좋은 직장'이라는 의미다.

현대중공업의 직·간접 고용인원은 5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회사가 위치한 울산시 동구는 일본의 토요타시(市)처럼, '현대중공업시(市)'로 불리는 기업도시이기도 하다.

현대중공업은 연간 1조5000억원 대의 급여와 월 2000억원이 넘는 자재대금을 울산 지역경제에 풀고 있다.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에게 저가로 공급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은 물론, 공연장 체육관 공원 등 사회기반 시설 대부분은 지자체 예산이 아닌 현대중공업 돈으로 지은 것이다.

정몽준 이사장이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이래 이 지역에서 무소속으로만 내리 5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의 기업 이미지는 부정적인 편이다. 현대중공업과 연관되는 핵심 키워드는 ‘잦은 분규와 파업’, ‘강성노조의 철밥통 지키기’ 등 부정적 단어들이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대우조선해양과의 합병에 반대해 주주총회장을 불법 점거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1980년대 후반 노동계 민주화를 이끌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의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운동권 대학생 출신들이 회사 안팎에서 조합원들을 교육했다.

1995년부터 2014년까지는 온건노조 집행부가 등장해 민노총을 탈퇴하면서 19년 연속 무분규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최근들어 다시 강성노조가 득세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대중공업 사내외 노조 게시판에는 여전히 정치구호가 난무하고, 레닌같은 사회주의 혁명가의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정주영 창업주는 현대중공업이라는 국가적 기업을 만들어 한국경제 신화를 이룩했고, 정몽준 이사장 경영시대에 명실상부한 세계 1위 조선사로 도약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현대중공업이라는 세계 최대, 최고의 조선사를 지속가능할 기업문화는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밀어붙이기’로 경제를 일으키던 시절, 기업문화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허허벌판에 회사를 만들어 월급을 주니 기업가는 책임을 다했고, 산업역군이라는 사명감, 상명하복식 군사문화가 기업문화를 대체했다.

정주영 창업주의 가장 유명한 어록 중 하나, “이봐! 해봤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시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리더의 추진력을 칭송하는 ‘신화’였을 뿐이다.

현대중공업 노사가 1995년부터 2014년까지 19년 연속 무분규 기록을 세운 것은 강성노조에 대한 염증과 실리주의 선회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한편으로는 1991년 정몽준 이사장이 현대중공업 회장에서 고문으로 일선에서 비켜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정주영이 울산 바닷가에 아직 조선소 도크도 만들지 않고 그리스의 선사와 26만톤 유조선 건조계약을 맺은 것은 1970년 12월이었다. 그로부터 50년 뒤 손자 정기선이 현대중공업그룹 경영의 전면에 나섰다. 시대와 세대가 모두 바뀐 것이다.

정기선은 선대(先代)의 전통위에서 상생과 소통의 기업문화를 창조해야 한다는 과제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16년 4월 제18차 세계 LNG컨퍼런스에 참석, “우리도 노조를 충분히 이해한다. 설득을 해나가겠다. 계속 사업을 영위해 나가려면 같이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해 10월에는 “앞으로도 우리의 역량을 지키면서 성장까지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단 우리의 사업 지위(시장 1위)를 지키기 위해 최악의 시장 상황을 가정해 준비해야 한다. 같이 일하는 근로자들과 노조 등 여러 방면에서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노조와의 상생을 바탕으로, 필요한 혁신을 하겠다는 것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뉴리더로서 행보를 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최근에는 노조 또한 조선업의 지속가능성, 회사의 발전에 대해 같은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요인이다.

일반적으로 소비재를 생산하는 ‘B2C 기업’이 현대중공업과 같은 ‘B2B 기업’에 비해 기업문화 구축에 적극적이다. 소비자 친화형 기업문화를 통해 소비자와 소통하는 것이 최근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현대중공업이 별다른 기업문화가 구축되지 않은 것은 이런 B2B 기업의 특성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또한 막대한 지역 및 사회공헌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공업의 긍정적인 이미지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정주영식 ‘노블리스 오블리주’ 관점이 ‘나눔’이 아니라 ‘베풂’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일찍이, 사회주의 등 대안적 체제가 아닌 자본주의 기업이 인류의 미래를 열어 줄 것이라고 통찰했던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가 가장 중시한 것은 조직의 지속가능성이다.

그는 연속과 단절 사이의 균형, 지킬 것은 지키면서도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버릴 것은 버리는 기업 체제와 문화 구축을 지속가능성의 관건으로 보았다.

정기선 대표는 긍정적이고 참여의식이 강한 'Y세대‘이자 소통에 능한 ‘N세대’ 내지 MZ세대적인 특성까지 갖춘 만큼 이와 같은 연속과 단절에 능한 경영적 자질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정기선 대표를 도와 현대중공업을 이끌고 있는 권오갑, 가삼현 등 전문경영인들이 정몽준 이사장과 함께 축구협회에서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와 4강 신화를 이룩하는 등 ‘중후장대(重厚長大) B2B 기업’ 현대중공업 밖에서 경험을 쌓은 것이 정 부사장의 성공적인 경영승계 및 기업문화 구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이번 6·1 지방선거에서 진보당의 김종훈 후보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기초단체장인 울산 동구청장에 당선됐다. 현대중공업 노조원들의 투표 때문이었다.

울산지역에서의 오랫동안 노동운동, 울산 동구청장, 민중당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는 그는 “조선산업은 4차, 5차 산업혁명을 맞이해도 꼭 필요한 산업”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국회의원 시절 그는 친환경, 스마트십 등 미래 선박 기술 확보를 위해 기업 연구소와 국책 연구소를 통합한 국책연구소 설립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한 바 있다.

양쪽이 모두 세계 최고, 최대의 한국 조선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일치된 생각을 하고있는 만큼 희망이 보이는 대목이다.<펜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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