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지난 2008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 맨손으로 기름을 닦아내는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지난 2008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 맨손으로 기름을 닦아내는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

옛말에 “부자는 망해도 3대(代)를 간다”고 했지만 거대 기업, 재벌의 기준으로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최근 삼성가 3세인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이 별세했는데, 고인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차남이자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작은형인 고 이창희 회장의 장남, 모친은 이 회장이 작고한 뒤 회장을 맡았던 일본인 이영자 전 회장이다.

고 이창희 회장은 1967년 삼성그룹을 떠나 카세트테이프 등 기록매체 중심의 회사인 새한미디어를 세워 사업을 확장했지만 1991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회사를 물려받은 이 전 부회장은 제일합섬 지분을 넘겨받은 것을 계기로 삼성그룹에서 분리해 1997년 새한그룹을 출범했다.

하지만 사양길로 접어든 비디오테이프와 섬유산업에 1조원이 넘는 투자에 나서 경영난을 겪고 IMF 금융위기까지 겹치면서 2000년 5월 워크아웃을 신청하면서 공중분해됐다.

이 과정에서 이 전 부회장은 2003년 분식회계를 통해 불법 대출을 받은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또 동생인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은 2010년 8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이 전 부회장의 빈소에는 고모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 정용진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등 범삼성가 인사들이 찾아 고인을 애도했다. 특히 정용진 부회장은 삼성 일가 중 가장 먼저 장례식장을 찾아 "재관 형님이 저와 추억이 많은 형이었고, 존경하는 분 중 한 분이었다"며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게 돼 참담하고 황망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새한그룹의 경우를 보더라도 “꼴랑 백화점 하나”를 유산으로 받아 재계순위 9위의 재벌로 만든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과 정용진 부회장 모자(母子)의 ‘경영능력’을 가볍게 볼 수 없다.

한편으로 정용진 부회장은 재계 안팎에서 ‘할 말은 하고 사는’ 재벌 오너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병철 정주영 이래 한국의 기업인들은 정치와 현실에 대해 ‘꿀먹은 벙어리’처럼 사는 것이 기업을 지키고 보신(保身)을 위한 가장 현명한 처신으로 여겨져 왔다. 김영삼 정권 때인 1995년, 이건희 당시 삼성 회장은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유명한 발언을 했다가 감옥행 직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한국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역사의 천박함은 오랫동안 기업인들에게 정치와 세상 문제에 대한 침묵을 강요했고, “털면 털릴 것이 너무나 많은” 기업인들에게도 ‘은둔경영’은 불가피한 경영철학이 됐다.

문재인 정권의 친북 친중성향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보다 심화, 노골화됐다. 이런 상항에서 나온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의 ‘멸공(滅共)’은 우리 사회에 적지않은 충격을 던졌다.

그는 지난해 11월 이후 인스타그램에 '공산당이 싫다'는 취지의 게시물을 연달아 올려 세간의 논란을 일으켰다.

좌파 매체들은 이마트는 중국사업을 철수했지만 그의 발언이 신세계그룹의 사업과 기업 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며 비판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 주주들이 직접 피해를 볼 수 있고 생각이 다른 소비자들의 반응으로 이마트 주주들까지 피해를 본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지난해 3분기 중국 매출은 전년 대비 52.8%나 감소한 상황이었다.

2021년 11월 15일에는 붉은색 모자를 쓴 남성 2명과 붉은색 카드지갑을 든 사진을 올리며 '뭔가 공산당 같은 느낌인데 ㅠㅠ 오해마시기 바랍니다'라고 쓴 뒤 '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해시태그를 달기도 했다.

18일에는 추신수 선수가 선물한 유니폼과 글러브를 착용한 사진을 올리며 또 '난 콩 상당히 싫습니다'라고 했다. 해시태그에는 '노빠꾸'라고도 명시했다. 24일에는 '北, 오징어게임 들여온 주민 총살…구입한 학생은 무기징역'이란 제목의 신문기사 사진을 올리며 재차 "공산당이 싫다"고 썼다.

6개월 전인 2021년 5월26일에는 인스타그램에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글귀가 포함된 음식 감상평을 남겨 논란을 일으켰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3월 팽목항에 있는 세월호 분향소를 찾아 "얘들아. 너희들이 촛불 광장의 별빛이었다. 너희들의 혼이 천만 촛불이 되었다. 미안하다 고맙다"고 방명록을 남긴 바 있는데, ‘정 부회장이 문 대통령을 조롱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과거의 기업인들과 달리,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정용진 스타일’은 윤석열 시대를 선택하면서 국민들이 원했던 상식과 공정, 정상화(正常化)의 염원과 맞닿아 있다.

팩트, 즉 사실관계를 중시하고 치시시비비가 분명한 MZ세대와 그들의 사고방식이 한국 사회의 주류문화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정용진 스타일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창업 3.4세 경영이 보편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정용진 스타일’은 더 이상 돌출행동이 아닌 추후 한국 재계 오너들의 지배적인 행동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그동안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손자들, ‘삼성가 3’세 중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성향으로 꼽혀왔다.

1995년 그가 미스코리아 출신 인기 탤런트 고현정씨와 결혼했을 때, 재계는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명문가 집 자제만 골라 며느리나 사위를 삼아왔던 삼성가의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와 어머니 이명희 여사의 카리스마 등의 이유였다.

정 부회장은 신세계 그룹의 후계자로 경영에 참여한 뒤 이런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2008년 태안에서 유조선에 의한 대규모 기름유출 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 재계 인사로는 드물게 신세계그룹 임직원 700여명과 함께 현장에 나타나 고무장갑을 끼고 바닷가의 기름묻은 돌들을 딲아내 화제가 됐다.

2014년 부터 그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부흥 프로젝트인 '지식향연'을 개최하고 직접 강사로 나서는 등 인문학 전도사 역할에 앞장서고 있다.

2015년부터는 신세계그룹이 모든 비용을 대고 협력회사까지 참여하는 '신세계그룹&파트너사 상생채용박람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청년, 중장년층, 경력단절여성은 물론 장애인 채용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2016년 6월 채용박람회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중 가장 기본은 고용창출" 이라는 화두를 던지기도 했는데, 협력회사, 전통시장과의 동반성장에도 앞장섰다.

2016년 8월에는 당진시, 당진 전통시장과 협력을 통해 당진 상생스토어를 오픈했는데 1층에는 어시장, 2층에는 노브랜드 매장이 들어섰으며 전통시장 상인들을 위해 이곳 매장에서는 신선식품을 팔지 않아 화제가 됐다.

2017년 6월 구미 선산봉황시장에 노브랜드 청년상생스토어를 열었고, 2017년 8월에는 안성맞춤시장에 2017년 11월에는 여주한글시장에 각각 노브랜드 상생스토어를 열어 전통시장과의 동반성장을 하고 있다.

"유통업의 미래는 시장점유인 마켓셰어( share)보다 소비자의 일상을 점유하는 라이프셰어(Life share)를 높이는데 달려있다" “빠르게 바뀌고 있는 유통 환경에서 ‘혁신’이 필요하다” 며 임직원들에게 도전과 혁신의 경영방침을 강조하기도 했다.

정용진은 한국사회에서 좌파들로 인해 잘못 사용되고 있는 진보라는 용어의 제대로 된 의미를 기업경영을 통해 바로잡고 있는 것이다.<펜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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