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칼럼] 백선엽의 간도특설대가 한국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은 완전 가짜
[김용삼 칼럼] 백선엽의 간도특설대가 한국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은 완전 가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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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의 간도특설대가 토벌한 대상은 한국 독립군이 아니라 마오쩌둥(毛澤東) 산하의 팔로군이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다. 좌익들은 “백선엽이 우리 항일 독립군을 토벌했으니 친일파가 분명하다”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팔로군이 한국 해방을 위해 싸운 대한독립군이었단 말인가?

2년 전 7월 10일 백선엽 장군이 타계했다.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하에 계신 백선엽 장군은 아직도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고 계실 것 같다. 아직도 기회만 나면 자신을 향해 “친일파 민족 반역자”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구한말 격동기에 세계정세의 흐름을 꿰뚫어 본 선각자 윤치호는 “한국인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질타한 바 있다. 사실 여부를 따지고 생각하는 합리적 이성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물고 뜯는 동물적 감성에 충만해 있다는 뜻이다. 그는 또 “한국인들에게 가장 깊게 자리 잡고, 동시에 가장 널리 퍼진 악은 거짓”이라고 설파했다.

이 두 가지 명제를 가지고 백선엽 장군에게 덧씌워진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근원인 간도특설대 이야기를 추적해본다.

백선엽은 일제하에서 명문으로 평가받은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던 중 1939년 봉천(현재의 선양·瀋陽)에 위치한 만주군 장교 양성소인 봉천군관학교(정식 명칭은 중앙육군훈련처) 9기생으로 입교했다.

지난 2000년 일본에서 출간된 백선엽 회고록 『若き將軍の朝鮮戦争(젊은 장군의 한국전쟁)』(草思社)에 의하면 그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동부 만주의 파오칭(寶淸)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제28단(단은 연대를 뜻함)에서 견습 사관 생활을 한 후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소위 임관 후 자무스(佳木斯)에 위치한 만주군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간도특설대로 전임된 것은 1943년 2월. 이때부터 8·15 해방 때까지 1년 8개월간 간도특설대에 근무하게 된다. 백선엽과 함께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한국인은 김백일(후에 한국군 중장), 김석범(해병대 사령관),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 이룡(한국군 소장), 윤춘근(한국군 소장) 등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어떤 부대였나?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 15일 만주국 치안부 산하 부대의 하나로 창설이 결정돼 그해 12월 14일 지원병 1기생 입대식이 거행됐고, 1939년 3월 정식으로 발족했다(김효순, 『간도특설대』, 서해문집, 2014, 136쪽). 백선엽 회고록 『젊은 장군의 한국전쟁』에 의하면 간도특설대는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었고, 후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360명으로 출발한 부대는 후에 800명 가까이 병력이 늘어났다.

2020년 7월 열린 백선엽 장군 영결식.
2020년 7월 열린 백선엽 장군 영결식.

특이한 점은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한인 위주의 부대였다는 사실이다. 1940년 1월 시점에서는 장교가 일본인 부대장을 빼고 조선인·일본인 각 일곱 명이었다. 1938년 창설 후 1945년 8월 해산되기까지 간도특설대에 입대한 사병 수는 2,100명에 이른다(김효순, 앞의 책, 147~148쪽).

부대장은 줄곧 일본인 장교가 맡았고, 계급은 만주군 소교(소좌)나 중교(중좌)였다. 초대 부대장은 소메카와 가즈오(染川一南), 후임 부대장은 와타나베 스테고로(渡邊捨五郞) 등이었다. 부대 명칭은 통상 부대장의 이름을 따서 불리기도 해 ‘소메카와 부대’ 등으로 불렸다.

백선엽 회고록 『젊은 장군의 한국전쟁』에 의하면 간도특설대의 본래 임무는 잠입, 파괴 공작이었다고 한다. 현재 개념으로 설명하면 특수부대, 즉 스페셜 포스(Special Force)였던 셈이다. 간도특설대는 창설 초기에는 소련과 전쟁이 벌어지면 소련 영내로 침투하여 교량이나 통신시설 등 주요 목표를 폭파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부대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간도특설대는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을 자주 했다고 한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으로 인해 만주국이 출범하자 재만 한인 사회는 침략자 일본에 저항하는 중국공산당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일본·만주국을 따를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국인 지주들의 텃세에 시달리던 재만 한인 입장에서 볼 때 만주에 나타난 일본군(관동군)은 중국인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준 일종의 해방자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관동군과 만주국 치하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한 조선인 유지들은 친일 대열에 가담했다.

그렇지 못한 지역에서 변변한 생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조선인들은 대부분 중국공산당 편에 서서 만주를 침략한 관동군·만주군에 저항하는 대열에 가담하게 된다.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재만 한인들의 85%는 중국공산당 물결에 휩쓸려 있었다. 재만 한인 사회는 이념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으로 이미 분열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일본에서 발간된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若き將軍の朝鮮戦争(젊은 장군의 한국전쟁)』(草思社) 표지.
일본에서 발간된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若き將軍の朝鮮戦争(젊은 장군의 한국전쟁)』(草思社) 표지.

관동군이 소련을 공격하기 위한 움직임을 감지한 스탈린은 만주 일대를 게릴라전의 지옥으로 만들어 관동군 병력을 붙들어 두기 위해 만주의 빨치산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지도와 공작을 대폭 강화했다. 그 결과 만주 일대에서 일본에 저항하는 빨치산이 준동하자 치안 유지와 후방 안정이 급선무가 되었다.

관동군과 만주국 군경은 빨치산의 숨통을 끊기 위해 1939년 10월 1일부터 1941년 3월 말까지 8만 5,000명 병력을 동원하여 ‘동남 3성 3개년 치안 숙정(肅正) 공작’을 벌여 만주 일대에서 공산유격대를 격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서대숙 지음·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22~27쪽).

한인 위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는 한인들의 협조를 얻어 쉽게 정보를 구했고, 이런 정보를 토대로 작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가혹하고 철저한 토벌로 인해 동북항일연군이 전멸 위기에 처하자 중국공산당은 1940년 빨치산 활동을 중지하고 소련 영내로 탈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500여 명의 빨치산은 1941년 4월까지 소·만 국경을 넘어 소련 영내로 도주했다. 이로써 만주 일대에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공산 빨치산은 자취를 감추었다.

관동군과 만주 군경이 토벌 과정에서 빨치산을 체포해 심문한 결과 대부분이 만주에 이주해 온 한인들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만주의 한인 농민과 노동자들을 공산당으로 포섭하여 빨치산 부대를 조직했다. 이것이 동북항일연군이다. 중국공산당은 만주로 이주해 온 한인들을 동원하여 관동군과 만주군을 공격하도록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동원한 것이다.

이 사실을 파악한 일본은 자신들도 같은 수법을 사용하기 위해 한인 위주로 조직한 간도특설대를 빨치산 토벌에 동원했다. 그 결과 만주 일대에서 중국공산당 편에 선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일본·만주국 편에 선 한인들 간에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격돌이 벌어졌다. 중국과 일본이 벌이는 싸움에 한인들이 희생의 제물로 동원되어 아비규환을 연출했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가 한국 독립군을 때려잡았나?

일·만군의 빨치산 토벌대는 만주 벌판을 이 잡듯 뒤져 빨치산을 소탕한 끝에 1941년 3월 19일 토벌 승리 축하연을 개최했다(서대숙 지음·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25~26쪽). 그때까지 생존한 빨치산 500여 명은 소련 영내로 퇴각했기 때문에 이후 만주에 빨치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만주 일대에는 주민을 등쳐먹는 마적이나 비적단만 가끔 출몰했다.

할 일이 없어진 간도특설대는 1943년 12월 러허성(熱河省, 현재의 허베이성, 랴오닝성 및 내몽골 자치구 교차 지역)으로 이동 명령을 받았다. 이 무렵 러허성에서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이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간도특설대는 1944년 1월 15일 러허성 링위안(凌源) 역에 도착, 이때부터 그해 가을까지 주로 핑취안(平泉)현 위슈린쯔(楡樹林子) 일대에서 팔로군을 대상으로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 후에는 미윈(密雲)현 스샤(石匣)진, 허베이성 롼난(灤南)현 쓰지좡(可集庄)진으로 주둔지를 옮겨가며 팔로군과 곳곳에서 접전을 벌였다. 그들은 롼핑(灤平) 이서(以西)의 만군 담당 토벌지구를 전전하며 팔로군을 중심으로 한 항일부대와 전투를 벌였다고 김효순의 『간도특설대』는 기록하고 있다(김효순, 앞의 책, 277~278쪽).

그렇다면 여기서 러허성으로 이동한 간도특설대가 맞서 싸운 대상이 누구였나가 쟁점으로 등장한다. 간도특설대의 적은 팔로군이었다. 팔로군은 신4군과 함께 마오쩌둥(毛澤東) 산하의 주력을 형성한 부대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가 토벌한 대상은 한국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이었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가 토벌한 대상은 한국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이었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이 벌인 항일전의 실체가 참으로 가관이다. 마오쩌둥은 장제스(葬介石)와 국공합작을 한 후 중국공산당에 “항일 전투에는 1할의 전력만 배치하고, 7할은 공산당 조직과 군대의 확대를 위해, 2할은 국민정부군 공격에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마오쩌둥이 외쳤던 16자 전법, 즉 적이 진공하면 우리는 퇴각하고(敵進我退), 적이 주둔하면 우리는 교란하고(敵據我擾),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하고(敵疲我打),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敵退我追)는 전법(모택동 지음, 정차근·김정계 옮김, 『모택동 사상과 중국혁명』, 평민사, 2008, 120~121쪽)은 일본군이 아니라 장제스의 국민정부군을 상대로 유감없이 발휘했다.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에서 편찬한 『마오쩌둥 외교문선』에는 1956년 마오쩌둥이 중일 우호를 위해 중국을 방문한 엔도 사부로(遠藤三郎) 전 일본제국 육군 중장에게 했던 발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첫째, 장개석의 힘을 약하게 해주었다. 둘째, 우리 공산당 지도부의 근거지와 군대 확충을 도왔다. 항일전쟁 전 한때 30만 명에 달했던 우리 군대는 우리 스스로 저지른 실수로 불과 2만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과 8년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 군대는 120만 명으로 늘었다. 이것이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권성욱, 『중일전쟁-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2015, 491쪽).

이 문건은 2011년 1월에 공개되었다.

팔로군이 한국의 무장 독립군인가?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속된 시기는 1943년 2월이다. 이때는 동북항일연군 생존자들이 모두 소련령으로 도주하여 간도특설대가 러허성으로 이동한 후의 일이다. 때문에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전투를 벌인 것은 팔로군이었을 뿐,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한 한국 독립군이 아니었다. 간도특설대의 토벌이 아무리 “음험하고 악독”했어도, 그들이 토벌한 것은 팔로군이었다는 사실은 김효순의 『간도특설대』 등 여러 문헌에 나와 있다.

백선엽은 1945년 8월 9일 소·만 국경을 돌파하여 만주 중심부로 진격하는 소련군에게 밍위에거우(明月溝)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백선엽 회고록-군과 나’, 「경향신문」, 1988년 9월 1일).

그런데 어떻게 간도특설대가 한국 독립군을 때려잡았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중화사상에 쩔어서 마오쩌둥 휘하의 팔로군이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한 한국 무장 독립군으로 추앙하려는 정신상태에서 나온 것 아닐까?

당시 상황에 대한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은 동북항일연군 빨치산은 전멸을 피하기 위해 생존자들이 소련으로 도주했다. 생존 빨치산들은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소련군 산하 88특별정찰여단에 소속되어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 일본은 만주군과 간도특설대를 러허성으로 이동시켜 팔로군 토벌에 투입했다(김효순, 앞의 책, 275쪽).

백선엽이 간도특설대로 배속받아서 팔로군 및 마적떼, 비적단을 토벌한 사실은 있어도 한국 무장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은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백선엽이 항일무장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은 좌익 공산 진영이 날조해 낸 완벽한 가짜다.

백선엽 장군을 끝없이 모욕한 광복회장 김원웅.
백선엽 장군을 끝없이 모욕한 광복회장 김원웅(사진은 채널A 화면 캡처).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2020년 7월 14일 대한민국 광복회장 김원웅이 백선엽 장군을 시비하고 나섰다. 그는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을 본토로 소환하라”라는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 중에 백선엽 장군을 “일제 강점기에 민족을 배반하고 우리 독립군을 학살한 자”, “일제 시 전범국가 일본에 빌붙어 수많은 독립군과 조선 민중을 학살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아시아의 하인리히 힘러”라고 망언을 했다.

김원웅이 언급한 히믈러(Heinrich Himmler)는 나치 시절 친위대(SS)의 제국 총통(Reichsführer`)으로서 나치 강제수용소와 특수작전집단이라는 학살부대를 창설하여 유대인을 대규모 학살한 지휘 책임자였다. 그는 전범으로 체포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런 인물과 백선엽 장군을 동류로 취급한 사람이 대한민국 광복회장이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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