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달이 차면 기울 듯이 권력이 정상에 이르면 내려와야 한다. 주역에서 용이 하늘 높이 오르다 보면 후회하게 된다(亢龍有悔)는 말이 있는데 같은 의미다. 교황의 권력도 한 때 절정에 올랐지만 곧이어 맥없이 추락했다. 1292년 니콜라이 4세 교황이 선종하고 다음 교황을 뽑기 위한 콘클라베가 열렸으나 추기경단 내의 계파대립으로 27개월이나 선출이 지연되고 있었다. 

산속에서 수행을 하고 있던 수도승 피에트로까지 답답함을 느끼고 '교황을 빨리 뽑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편지를 콘클라베에 참여하는 추기경에게 보냈다. 그 추기경이 수도승의 메시지를 전하며 피에트로에게 투표하자, 다른 추기경들도 따라서 표를 던졌다. 그 결과 피에트로가 첼레스티노 5세 교황이 되었다. 선출당시 79세여서 오래 재임할 수 없는 과도기적 교황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문제는 이 분이 속세를 떠나 수행만 하다 보니 행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고, 당시의 공용어인 라틴어도 몰라 공문서도 볼 수 없었다. 당연히 사안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어 이런저런 의견에 휘둘렸다. 정작 첼레스티노 5세 교황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교황청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자,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추기경들과 사임을 논의했는데 여태 교황이 사직한 선례가 없었다. 신이 맡긴 일이기에 죽음이 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교황의 임무였다.

그런데 베네데토 추기경만이 사임한 선례가 있다고 주장했고 이 의견을 좇아 교황은 사임을 했다. 베네데토 추기경은 첼레스티노 5세가 교황청 업무를 도저히 추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가 물러나는 것이 본인의 행복과 교황청의 앞날을 위해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문제는 베네데토 추기경이 다음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로 선출되었는데, ‘교황사임 선례’의견이 전임교황올 몰아내고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한 술책으로 의심받을 수 있었다. 다만 보니파키우스8세가 선출될 당시에는 이것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다. 

프랑스왕 필립4세와의 갈등이 없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필립 4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 때문에 돈이 많이 필요했다. 그런데 백성들은 가난했고 영주들에게 과세하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십일조 등으로 당대 최고의 부자가 되어 있던 교회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교황의 승인 없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면 자동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필립 4세는 삼부회를 소집해서 내부 단결을 기하며 성직자 과세를 밀어 붙였다. 교황의 파문결정 직전에 기욤 드 노가레와 자코모 시욘나 콜론나가 지휘하는 병력을 파견해 로마 남동쪽의 아나니에 있던 교황을 급습해서 구금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얼마 후 풀려났지만 이 사건의 충격으로 곧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도 필립4세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나 공격 등은 일어나지 않았고 교황권만 조용히 힘을 잃었다. 당시 중세교회의 권력은 절정에 이르렀고, 유럽 각국에 대한 교황의 개입권이 널리 인정받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잘못된 습관이 오랜 기간 축적되어 병이 발병하듯이, 상당기간에 걸쳐 교황들의 오만한 정책이 왕과 대중의 불만을 유발한 것 같다.

첫째, 신의 뜻으로 알았던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신앙심이 쇠퇴했다. 더욱이 다른 세계와의 접촉은 기존의 사상체계에 변화를 가져왔고, 농민들에 비해 타산적이고 신암심이 부족한 상인과 제조업 종사자의 증가를 가져왔다. 

둘째, 십자군의 남용으로 교황권의 도덕성과 기독교의 이상이 훼손되었다. 인노켄티우스 3세 등 전임교황들이 일종의 내부권력 다툼인 알비파와 프레데리크2세 등과의 싸움에 십자군이라는 신성한 이름을 사용했고, 보니파키우스 8세도 콜론나가에 맞선 자신의 전쟁에 십자군이란 이름으로 개입했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4-2). 특히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파문 등 호엔슈타우펜 가문과의 오랜 전쟁은 위급할 때 도와줄 견제 세력이 사라지게 했다.

셋째, 이단에 대한 가혹한 종교재판은 교황청에 대한 반감을 일으켰다. 민중들도 처음에는 이단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으나 그 처벌 과정이 너무나 참혹하고 대상자가 확대되자, 이런 식의 이단처벌이 신의 뜻에 부합하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카타리파 신자를 추방하라는 명령을 받은 어떤 기사는 “우리는 그 사람들과 함께 자랐고, 그들 중에 우리의 친척도 있으며, 또 그들은 올바르게 살고 있습니다.” 라고 반박했다. 보니파키우스8세를 공격한 기욤 드 노가레의 일부 조상들도 종교재판으로 화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4-2).  

이렇게 교황청에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는데도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교황권을 자주 휘두른 것 같다. 그 령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아라곤의 프레데리크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포기하도록 종용했으나 고집을 꺾지 않았고, 파문을 해도 왕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에 휴전을 명령했으나 3년이나 전쟁을 더 끌었다. 

그러나 필립4세가 보니파키우스8세를 과감하게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은 교황 자신의 비도덕적 행위였다. ‘교황의 사임가능’ 의견제시도 문제였지만 첼레스티노 5세가 퇴임한 후 본인이 돌아가길 원했던 이전의 수도원으로 모시지 않았다. 전임교황 중심으로 반대 세력이 규합될까 우려해서 로마에 유폐시켰다. 또 첼레스티노 전교황이 탈출을 시도하자 다시 붙잡아서 섬에 유배시키고 좁은 방에 감금하여 죽음을 재촉했다. 전임교황을 자기 권력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경쟁자로 보고 견제한 행위로 봐진다.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난 욕심없고 80세의 고령인 첼레스티노 전교황에 대한 이런 식의 대우를 필립4세가 어떻게 봤을까? 성직자로서의 본분을 몰각한 처사로 보았지 않았을까. 전임 교황에 대한 예우를 생각할 때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보니파키우스 8세의 몰락은 도덕성 결여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봐야한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한 후 몰락한 것과 유사해 보인다. 

탈북어민과 관련한 문재인정부 고위 관료들의 거짓발언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탈북어민들의 자필 귀순의향서가 있는데도 귀순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어쩌다가 대한민국 고위 관료들의 도덕성이 이 모양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서해공무원 사망사건에서도 문재인 정부는 물증도 없이 ‘자진월북’이라며 사실을 왜곡하며 거짓말을 했다. 절정의 교황 권력이 한순간에 몰락했듯이 거짓말과 부도덕은 국가를 무너뜨린다. 민주당은 진실해명에 노력해야한다. 부도덕한 행위를 옹호하는 정당을 국민이 선택할리 없기 때문이다.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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