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서훈·박지원 전 국정원장들이 2019년 북한 어민 강제북송과 관련하여 고발당하고 검찰이 국정원을 압수수색하면서 국정원 개혁이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국정원은 박정희 정부 시절 ‘중앙정보부’라는 이름으로 탄생하여 전두환 정부에서 ‘안전기획부’로 개칭되었다가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 현 명칭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흑역사를 기록해왔다. 박정희 시절 중정은 유신체제를 보위하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고, 전두환 시절 ‘남산’도 체제에 비판적인 정치인, 시민, 언론인, 지식인 등을 혼내주는 무서운 곳이었다. 권위주의 시대 국정원의 이러한 탈법적 행보는 민주화와 함께 철퇴를 맞았고, 문재인 정부에 와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이 ‘정치개입’ 혐의로 쑥대밭이 되었고 대공수사권까지 빼앗기는 수모까지 겪었다. 군 내의 정보기관인 국군기무사도 역할과 위상이 크게 축소된 ‘군사안보지원사령부도’로 개편되었다.

그럼에도 냉정하게 인정해야 할 사실들도 많다. 대공기능을 통해 안보와 체제를 보위해온 국정원의 공로를 무시해서는 안 되며, 국정원의 탈법적 운영이나 정치개입에 대한 책임이 궁극적으로는 인사권과 예산권을 앞세워 국정원을 휘두른 정치권력에 있음을 부인해서도 안 된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등 좌성향 정부들의 ‘민주 개혁’이 국정원의 민주적 운영에는 기여했을지 모르지만 국가의 안보현실과 국정원이 견지해야 할 이념적 방향성을 무시하고 국정원을 무력화시킨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국정원은 어떤 정부 하에서도 정치중립성을 유지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안보기관으로 정착되는 것이 맞다.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 국정원 개혁이어야 하는 것이 정론이며, 그렇게 해야 할 책임은 정치권력에 있다.

정보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은 기본

정치중립성은 정보기관의 기본이자 출발점이다. 이것을 지키지 않고 정치권력의 입맛에 부응하는 코드화된 정치활동을 했기 때문에 국정원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수난을 당했다. 원인은 정권을 잡은 정치권력자들이 전문성과 무관한 ‘정치적 하수인들’을 국정원의 요직에 배치하여 국정원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도 그랬고, 권위주의 시절의 국정원을 청산하겠다고 나선 ‘민주’ 정부들도 ‘국정원 개혁’을 한다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기관으로 탈바꿈시켜왔다. 그 결과 비전문가 행정 공무원, 불순한 이념활동 전력을 가진 인사, 정치권력에 따라 논리를 바꾸면서 곡학아세(曲學阿世)해온 지식인 등이 국정원에 들어가 자신들을 임명해준 정치적 보스에 충성하면서 정보업무의 일관성, 비밀성, 이념적 방향성 등을 무너뜨렸다. 즉 권위주의 정부든, ‘보수’ 정부든 또는 ‘민주’ 정부든 모두가 ‘국정원 정치개입’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스라엘의 국가정보기관 모사드의 경우 1949년 창설 이후 지금까지 거쳐 간 국장은 12명에 불과하며 모두가 5년 이상을 재임했다. 모사드의 임무는 해외 비밀 정보수집, 적성국의 무기 개발 및 저지,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 방지, 미수교국들과의 비밀 외교, 박해받는 해외 유태인들의 탈출 및 이스라엘 귀환 등이며, 모사드 국장들은 하나같이 전쟁을 경험한 군 장성 출신이거나 오랫동안 모사드 현장요원으로 근무했던 전문가들로서 투철한 안보의식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정치인이나 행정 공무원이 국장을 맡은 적은 없었다. 이들의 집념어린 지휘 하에 모사드는 1960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획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하여 이스라엘 법정에 세웠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을 살해한 팔레스타인 ‘검은구월단’에 보복작전을 펼쳤으며, 적성국의 핵시설을 파괴·해킹하거나 핵과학자를 제거하는 공작을 펼쳤다.

모사드가 무고한 시민을 사찰하거나 고문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일이 없다. 한국에서는 친북 정치인이나 주사파 운동권 출신이 정보기관의 수장이나 핵심요직을 맡기도 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면서 음지에서 일해야 하는 정보기관 수장이 얼굴을 드러내고 방북하여 북한의 최고통치자와 악수를 하기도 하지만, 모사드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통일전 서독에서도 정부교체와 무관하게 정보기관들은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켰고, 대만에서 정부가 교체되면서 국가안전국 수장들이 수난을 겪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

정보자산은 수치로 계산되지 않는다

안보정론이란 그리 복잡한 이론이 아니다. 북한이 주적이자 동족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존재인 현실에서 한국은 화해협력도 해야 하고 강경 정책도 펼쳐야 한다. 사안이나 시기에 따라 ‘당근’이나 ‘채찍’을 택할 수 있고 혼용할 수도 있다. 즉, 유화나 강경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한국의 확고한 안보태세가 남북 상생의 출발점이자 토대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려 하거나 무력도발을 하는 것이 부담만 될 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북한으로 하여금 평화로운 상생을 선택하게 하는 정도(正道)이며, 확고한 안보가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유화나 굴종은 북한의 갑질과 불순한 동기를 키워줄 뿐이다. 게다가 한국은 이스라엘 및 대만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안보가 취약한 나라이고, 북한은 핵보유국인데다 국가보위성, 인민군 보위국, 사회안전성, 노동당 조직지도부, 정찰총국 등 3중 4중의 정보·사찰·공작 기관들을 작동시키면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국가정보기관은 고도의 정보역량과 전문성을 갖춘 안보기관으로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정론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의 ‘민주 개혁’이 안보기관으로서의 국정원을 무력화시킨 측면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들은 집권과 함께 에외 없이 국정원 물갈이를 시도했다. 대북정보에 정통한 다수의 간부와 요원들을 한직으로 보내거나 해임되었고 그 자리는 정치인이나 친북 성향의 인사들로 채워졌다. 남북교류나 유화정책은 통일부 등을 통해 수행하면 되는 것이며, 국정원은 본래의 정보기관으로 제 자리를 지키게 해야 했지만 이런 정론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결과 국정원의 정보자산은 크게 훼손되었다. 떠난 사람들이 머리 속에 담고 있던 정보자산은 소멸되었고, 그들이 관리하던 각종 인간정보들은 사장되었으며, 외국 정보기관들과의 정보교류도 상당 부분 차단되었을 것이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인적 청산과 함께 지금까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한국의 정보기관과 어떤 외국 정보기관이 은밀한 정보협력을 하겠는가? 동맹국인들 정보기관에서 최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이 이 방송 저 방송에 출연하여 정치적 발언을 쏟아내는 한국의 정보기관과 정보교류를 하고 싶겠는가? 이런 안보자산의 손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수치로 계산할 수도 없다. 방대한 인력과 번듯한 건물 그리고 방대한 예산이 정보기관의 역량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고 계산할 수 없는 정보 노하우들이 빠져나간 정보기관은 보기에만 근사할뿐 국민 혈세를 탕진하는 월급쟁이들의 집합체로 국가안보에 기여하지 못한다.

이런 정론에 비추어 보면, 지난 2020년 국회가 국정원개혁법을 통과시킨 것은 정치개입이라는 ‘구더기’를 잡기 위해 정보역량이라는 ‘된장독’을 깨어버린 것에 해당한다. 2024년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관을 상대적으로 전문성이 떨어지고 비밀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경찰로 이전하도록 한 것은 한국이 처한 안보환경과 상치된다. 국내정보수집을 금지한 것도 그렇다. 북한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교묘하게 배합하면서 대남 간첩공작을 구사하고 있고 그들과 협력하는 불순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는 곳이 한국사회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국내 정보업무를 빌미로 국가안보와 무관한 사찰이나 정치개입을 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내정보 기능 자체를 폐지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며 정도도 아니다.

‘구더기’를 잡겠다며 ‘된장독’을 깰 것인가

결국 진정한 의미의 국정원 개혁이란 국정원이 정치중립적이면서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사명감에 불타는 국가정보기관으로서의 자리와 위상을 되찾는 것이다. 국정원이 시민들에게는 친절하지만 대한민국을 해치려는 불순세력들은 말만 듣고도 오줌을 지리는 서슬이 시퍼런 안보기관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정치권력자들은 ‘정치적 하수인들’을 국정원에 심어 국정원 본래의 기능을 무력화시킨 지금까지 반복된 과오를 더 이상 되풀이해서는 안되며, 정보업무에 문외한인 외부 인사들로 무슨 위원회를 만들어 국정원 내부를 까발리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어느 정부 하에서도 정치적 중립성과 활동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기관으로 만드는데 진력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국군기무사도 군 내의 정보기관으로서 기능과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 안보업무와 무관한 정보기관의 정치활동은 근절되고 처벌받아야 하지만, 정보기관은 중립성을 유지한 채 항상 그 자리에서 국가안보와 체제 수호에 전념하도록 해주어야 하는 책임은 정치권력에 있다. ‘구더기’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된장독’을 깨는 일은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전 통일연구원장, 전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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