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보수주의 표방하는 여성운동 존재했는가?
미국 보수주의 여성운동 디바, 필리스 슐래플리를 돌아보자
한국, 지금이야말로 보수주의 여성운동 정립과 활동 필요한 시기
좌파적 가치에 점령당한 여성운동으로부터 균형추 바로잡아야

여성운동 출발은 진보적

우선 질문부터 해보자. 우리나라에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여성운동이 존재했는가? 그렇다면 현재는 어떤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글을 이어 나가겠다.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역사는 좌파성향 여성계의 전략과 투쟁에 따라 실현되어 왔다. 이들 여성운동가들은 끈질기게 의회권력을 쟁취하였고, 그들의 정치철학에 충실한 각종 법령을 제도화하며 권력을 키워 세력을 확산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반면에 우리나라 여성운동에 있어 보수주의 정치철학에 입각한 여성운동은 전면에 등장하지도, 이와 유사한 흐름의 정치운동도 찾아보기 어렵다. 해방 후 1948년 미군정 체제하에 미국식 민주주의와 제헌헌법 도입으로 <남녀보통선거권>을 자동으로 획득하였다. 국내 여성운동은 서구사회의 모델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서구사회의 여성운동은 처음부터 진보적일 수밖에 없었다. 서구 여성운동사에 있어 시초는 18세기 미국 독립전쟁(1776), 프랑스혁명(1789)의 영향을 받으면서 시작됐다. 1860년대 중반 무렵 여성참정권 쟁취 운동이 시작되어, ‘서프러제트’라 불리는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은 유럽 각국과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19세기 들어 여성운동은 페미니즘운동으로 명칭이 일반화되면서 미국에서 발전하였고, 대부분의 여성운동 지도자들이 미국 여성운동을 모델로 삼았다. 현대 페미니즘의 원조는 시몬느 보부아르(프) 『제2의 성』(1949) 발표와, 베티 프리단(미) 『여성의 신비』((1963) 출판으로 제2 여성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 페미니즘운동은 네오 막시즘을 기반으로 한 신좌파운동의 영향과 함께 급진적 양상으로 발전하여 여성해방운동, 성 혁명 어젠다가 주도하였다.

페미니즘 성 혁명 최고의 업적은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낙태합법화 판결이다. 연방대법원은 낙태를 여성의 선택할 권리로 인정하였다. 미국은 이 판결 이후 친민주당 성향은 낙태찬성(pro-choice)을, 친공화당은 낙태반대((pro-life)로 나뉘어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들어 지난 6월 말, 미 연방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지하며 낙태문제는 각 주 법원 소관으로 넘겼다. 이로써 미국은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낙태 찬. 반 논쟁은 또다시 불붙었다.

미국 보수주의 여성운동 디바, 필리스 슐래플리

이 시기 미국 보수정치계에 일약 스타가 등장하였다. 보수정치운동 디바로 불리는 필리스 슐래플리(Phyllis Schlafly:1924~2016)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도, 저서조차 단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지만 미국 정치사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여성이다. 슐래플리는 탁월한 정치평론가이며 시민운동가로 특히 미국의 페미니즘운동이 정점을 찍을 무렵 페미니스트 군단과 일대 대결을 벌인 안티페미니스트 선봉장이기도 했다.

슐래플리를 폄훼하는 쪽은 당시 문화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급진 페미니스트계였다. 미디어계는 신진 페미니스트 아이콘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일방적으로 띄우며 급진 페미니즘운동을 확산시켰다. 하지만 슐래플리는 안티페미니스트 이전에 이미 빼어난 전략가로 현대 보수주의 정치운동을 촉발시킨 인물이다. 그는 1950년대 말부터 공화당원으로 활동한 변호사이자, 6자녀의 어머니였다.

슐래플리는 1964년 공화당 배리 골드워터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당시 선거를 도왔다. 골드워터의 보수 철학은 작은정부, 감세, 도덕심, 반공주의를 기치를 내걸었고, 그의 선거 참모는 훗날 40대 대통령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골드워터의 선거를 돕던 슐래플리는 보수정치 정강정책을 담은 『A Choice Not a Echo』(국내 미번역)를 써서 300만부를 판매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골드워터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슐래플리와 골드워터의 보수 철학은 레이건 대통령 당선으로 부활하였다. 이러한 기조는 레이건- 부시- 트럼프로 이어지는 보수주의의 가치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1972년, 슐래플리와 막강한 세를 구축한 페미니스트계와 대격돌한 의제가 바로 ‘성 평등 헌법수정안(ERA: Equal Rights Amendment)’이었다. 성 평등 헌법수정안은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 시민에게 평등한 법적 권리 보장”을 위한 헌법 수정안이다. 페미니즘운동의 영향으로 71년에 ERA는 하원을 통과하였고, 72년 상원 비준을 위해 주의회에 제출된 상황이었다. ERA 수정안은 79년까지 38개 주 비준을 받으면 된다. 페미니스트계는 물론 공화당. 민주당의 초당적 지지를 받던 ERA 수정안은 당연히 통과될 것으로 믿었다. 슐래플리가 ‘STOP ERA’단체를 설립하여 반대 운동에 나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슐래플리는 그때 아무도 언급하기 꺼리던 문제들을 들고 나왔다. ERA가 통과된다면 동성애 합법화, 낙태 찬성, 이성애 파괴와 결혼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할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가톨릭교도이기도 한 그녀는 ‘STOP ERA’운동에 최초로 보수 기독교, 가톨릭 종교계 여성들을 정치운동으로 이끌어냈다. 77년 ERA 수정안은 35개주 비준을 받아 단 3개주를 남겨두고 있었다. 슐래플리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반ERA운동을 일으켜 끝내 비준을 무산시켰다. 카터 대통령은 1982년까지 ERA 수정안을 연장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결국 폐기되고 말았다. 슐래플리 단독으로 성 평등 헌법수정안을 막아낸 것이다. 보수주의 정치에 있어 지난 반세기 동안 중요한 정치적 논쟁에 슐래플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페미니스트계는 철저히 그녀를 무시하고 헐뜯었다.

슐래플리의 ‘STOP ERA’단체는 1975년 ‘이글 포럼’ 창립으로 이어져 오늘날에도 보수정치운동을 담당하고 있다. 슐래플리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위세에도 굴하지 않고 페미니즘은 가정과 미국 사회를 파괴시킬 것이라는 신념으로 활동한 당당한 안티페미니스트였다. 그녀는 생전에 저서를 26권 집필하였다. 그중 페미니즘 운동의 망상과 위선을 폭로한 『Feminist Fantasies』(국내 미번역)가 유명하다.

미국 보수주의 정치운동에 있어 슐래플리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에도 보수주의 가치 중심부에 굳건히 뿌리 내리고 있다. 사실 보수주의(conservatism)란 딱 잘라 말하기도, 일관되고 일반화된 개념을 수립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보수주의 정치철학과 원리는 에드먼드 버크 (1729~1797)에게서 나왔다. 서구의 보수주의적 사고는 기독교적 인간관, 가톨릭 교리 근본에 기초하고 있다. 보수주의의 본질적 기반은 사적 자유와 책임, 가족과 개인의 책임, 전통을 지키는 자부심 등이다. 또한 자유시장과 자본주의에 우호적이며, 경제적 자유주의에 있어서 자유주의와 연합하는 것을 보수주의라 하겠다.

한국 보수주의 여성운동은 어디로?

미국의 안티페미니즘은 70년~80년대 낙태 반대 운동 의제로 구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페미니즘의 본산 미국은 페미니스트만큼 안티페미니스트 작가, 안티페미니즘 시민운동단체, 정치평론가, 정치인이 많다. 여성만 꼽더라도 다수의 공화당 여성 의원과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정치 평론가이자 작가인 앤 콜터, 방송인 로라 잉그라함, 작가 수잔 벤커, 흑인 보수주의자 중 한 명인 캔디스 오웬스,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즈 등이 페미니즘을 비판한다. 미국은 보수주의 가치를 표방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여성단체들이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최초의 여성단체 창립은 <한국여성단체협의회>(1959)로 이 단체는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지도 않거니와 정치적 이익단체에 충실하다. 이후 좌파 여성단체의 출현은 <크리스챤 아카데미>(1965)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명숙, 김상희, 이미경, 김희선 등으로 이들은 1990년대 말부터 의회에 속속 진입하였다. 80년대 들어 <여성평우회>, <한국여성의전화>(1983)가 창립되었다. 87년에는 좌파 여성계의 메이저 단체인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1990년 창립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36개 좌파 여성운동단체들이 모여 발족되었다. 뒤를 이어 많은 여성단체들이 줄줄이 창립되었으나 모두 좌파계열이었다.

이렇다보니 안티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의 보수주의 여성운동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 한 곳이 있다면 2019년 설립된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는 <바른인권여성연합>이 있으나 아직은 미약하다.

현재 한국은 가족공동체 붕괴, 결혼제도의 유래 없는 급격한 해체로 인해 가정의 가치는 추락한 상태다. 1인 가구 증가는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비혼주의 만연은 결국은 가족으로부터 단절과 고립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족제도가 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지금이야말로 보수주의 여성운동의 정립과 활동이 필요한 시기다. 앞서 말했듯 보수주의의 가치인 사적 자유와 개인의 책임과 윤리의 중요성, 가족의 가치, 전통을 지키는 자부심, 예의와 도덕심, 절제의 기쁨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적 가치에 점령당한 여성운동으로부터 균형추를 바로잡아야 한다. 먼저 한국 보수주의 여성운동의 나아갈 길에 대해 적극적인 토론과 담론 형성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오세라비 객원 칼럼니스트 (작가, 미래대안행동 공동대표, 성차별교육폐지시민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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