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하라는 우리 속담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보면 어릴 때 고생한 사람이 많다. 특히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어릴 때 거지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긴장된 삶은 산사람들이 있다.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경험을 한 사람들로 그들이 종종 위대한 업적을 남기곤 한다. 페데리코 2세(이태리어.독일어 프리드리히)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다. 3살 때 부친이 죽고 4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불쌍해서 팔레르모 사람들이 음식을 주기도 했다한다. 

황족의 피를 타고 났으나 보잘것 없었던 어린 시절

  집안은 좋았다. 할아버지는 프리드리히1세로 독일의 힘을 북이탈리아 및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까지 떨친 신성로마제국의 ‘바르바로사’ 황제였다. 독일 역사상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일으켜 세운 황제다. 독일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독일의 힘이 약해질 때마다 그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졌다. 그는 죽은 게 아니라 키프하우저 산에 잠들어 있을 뿐이고, 언젠가 깨어나서 다시 한 번 독일을 질서있고 강한 국가로 만든다는 것이다. 훗날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가 ‘바르바로사’의 환생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는 시칠리아를 점령한 노르만왕국을 튀니지, 트리폴리까지 확장한 로제르 2세였다. 

  어머니는 유언으로 인노켄티우스 3세 교황에게 섭정의 권리와 시칠리아에 대한 새로운 종주권을 넘겨주며 자기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고 교황은 이를 수락했다. 그 후 교황은 페데리코를 교육시키면서도 독일 황위의 후계자로는 오토4세를 지지했다. 페데리코에 대한 깊은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 같고 무관심속에 고아처럼 자랐다. 

그런데 갑자기 정세변화가 생겼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오토4세가 황권을 강화하려다 교황과 충돌하여 파문을 당했고, 교황은 오토4세를 견제하기 위해 페데리코2세를 황제로 선출토록 손을 썼다. 
  오토4세는 파문을 당한 상태에서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에 나섰는데, 부빈전투에서 필립2세에게 패배했다. 오토4세는 황제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페데리코 2세에게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역사는 우연에 의해 추진되는 것 같다. 

새 황제는 무엇보다도 종교의 자유와 타문화와의 공존을 추구했다. 
시칠리아에서 신앙의 자유는 외조부인 로제르2세도 허용했던 것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노르만족이 점령할 당시 시칠리아는 이슬람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야만족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나 유대교, 기독교가 큰 차이가 없었다. 자신들보다 앞선 문명이었으니 그냥 받아들이면 되었다. 그래도 교황이 바로 지척에 있는데 계속 이러한 입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페데리코는 앞서간 르네상스인

  문제는 페데리코2세가 이슬람의 사상가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기독교적 신앙이 약해지고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공식 석상에서 이슬람 사절단을 따뜻하게 맞이했고 그들과 동석했으며, 통치기간 내내 기독교 교회를 건설하지 않았다. 교황의 도움으로 황제가 되었으나 교황과 가장 많은 싸움을 벌였다. 신앙심이 약했던 게 원인이었을 것이다. 
  성경 대신 이성을, 신 대신 자연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자로 한 시대 앞서간 르네상스인이었다. 지적호기심이 충만해서 나폴리에 대학을 세우고 팔레르모 궁전 안에 연구소를 만들었다. 수학발전을 위해 유명한 아랍 수학자 알하니피를 이탈리아로 초청하기도 했다. 점성술과 연금술도 공부했고, 가축과 동물들에 대한 체계적인 실험을 기반으로 사냥철을 제한하기도 했다. 아랍어 라틴어 등 9개 언어를 말하고 일곱 개 언어를 쓸즐 알았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예루살렘을 피 흘리지 않고 회복했다는 것이다. 자기 왕국에서는 신앙의 자유와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데리코2세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꼭 피흘리며 싸워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에게는 예루살렘 성지회복은 협상과 외교로도 가능하게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입증해 보였다. 
  교황으로부터 여러 번 십자군 원정을 종용받았으나 반란 등으로 십자군원정을 연기했다. 불가항력적으로 십자군 원정을 포기한 적도 없지 않으나 교황은 요령을 피운다고 생각했다. 그의 친아랍 문화의 성격으로 볼 때 교황이 의심할 만도 했다. 

 그레고리우스9세 교황의 파문위협에 4만명의 군대를 모아서 십자군 원정에 나섰으나, 장티푸스로 많은 병사들이 죽고 본인도 병에 걸려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황은 이유도 묻지 않고 황제를 파문했다. 병이 나은 후 황제는 다시 출발했으나, 교황은 파문을 거두지 않았고 신하들이 황제에게 충성할 의무가 없음을 선언했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 시칠리아 등 황제의 영토를 침공했다. 황제가 팔레스타인 아크레에 도착했을 때도 프란체스코회 사제가 따라와서 파문당한 자의 지시를 따르지 말라는 교황의 금지령을 전달했다. 

교황과의 대립도 우여곡절끝에 극복

  그러나 사라센의 술탄 알 카밀은 아랍의 문화와 종교를 깊이 이해하는 페데리코2세에 놀라며 협의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1228년 성전산에 대한 이슬람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런데도 성직자들은 아무도 그를 예루살렘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템플 기사단은 페데리코가 요르단의 그리스도 세례지를 방문할 때 그를 체포하라고 알카밀에게 밀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예루살렘 반환은 기적과도 같았고 교황의 방해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더욱 값진 것이었다. 

이탈리아로 돌아오자 페데리코2세는 빼앗긴 도시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교황의 군대는 달아났고, 영토를 되찾자 교황에게 화해를 청했다. 교황도 동의해서 파문은 철회되었다.  그런데 성공에 도취되었던 것일까. 페데리코2세는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독일과 통합함으로써 진짜 로마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 통일에 대한 야심이 드러나자 북부이탈리아 도시들은 롬바르디아 동맹을 맺어 황제와 맞섰다. 아들 하인리히도 자신의 지위에 불안을 느꼈든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동맹 편에 섰다. 초기에 승기를 잡아 아들을 붙잡는 등 유리한 고지에 섰고 교황이 중재에 나섰으나 페데리코 2세는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계속했다. 아들을 죽게 만들고, 교황이 동맹편에 서자 전세는 불리해졌다. 통일은 멀어져 갔고, 정신이 무너진 상태에서 자신도 죽음을 맞았다. 
  예루살렘은 평화적으로 탈환해 놓고 이탈리아는 무력으로 통일할 생각을 했으니 그것이 문제였다. 예루살렘 탈환을 영구화하는 외교적 노력에 더 매진하는 것이 옳았을지 모른다. 성공의 도취가 실패의 원인이 된 듯하다. 신은 피 흘리는 십자군 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데는 함께 하였으나 무력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에는 힘을 보태지 않은 듯하다. 

말년에는 이중적 태도로 비극적 삶

  그의 목표는 웅대했으나 현실의 삶은 목표와 따로 놀았다. 독일 황제이면서 이탈리아에서 살았고 신성로마제국을 내팽개쳤다. 56년의 삶 중 독일에는 8년만 살았다. 승기를 잡았을 때 교황의 중재를 받아들였어야 했고, 진정 이탈리아 통일을 원했다면 교황을 자기편으로 돌려놓아야 했다. 진실된 신앙심을 보이고 기독교 국가를 쇄신한다는 함께 공유할수 있는 어떤 분명한 가치를 내세워야했다. 그러기에는 그의 신앙심이 너무 약했을 것 같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대가 끊어졌고 그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후대에의 영향도 크지 않았다. 도시는 자유로워졌으나 신성로마제국은 분열되어 황제가 없는 대공위 시대란 혼란에 빠졌다. 신성로마제국 수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이준석도 페데리코2세에게서 인내의 교훈 얻었으면 

  이준석 국민의힘 전대표의 언행이 세간의 관심사다. 젊은 만큼 원대한 목표가 있었을 것이고, 나름의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계획을 망가뜨리고 자신을 몰아낸 사람들을 원망하며 비난을 쏟아냈다. 물론 억울한 점이 많았겠지만, 참아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어쩌면 그런 시련이 큰 인물을 키워내기 위한 신의 교육과정이었는지 모른다. 페데리코2세도 십자군 원정까지는 잘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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