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서의 갈등이 정치 아닌 종교 대립처럼 돼버려
정치를 종교로 만들어 해결 불능으로 만들어버렸다
종교화된 정치를 탈종교화하는 정치개혁 필요

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

대선 이후 지난 수년간의 정치로 인한 심신의 피곤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인생의 소중한 시기에 유튜브의 정치 콘텐츠에 몰두하였고, 인터넷상의 정치 논쟁의 참여하거나, 정당이나 시민단체의 집회 참여 및 정치 후원 등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갖는 허탈함은 생각하는 방향으로의 목적이 이루어졌는지, 바른 선택이었는지, 자신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자신하거나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시간 소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확실한 정치 상황이 앞에 놓여있다.

결과를 가늠하는 것이 승패 여부라지만 승패가 분명한 것 같지 않다. 같은 편과도 다투는 지난 수년간의 정치 상황은 어느 누구도 어떤 쪽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과연 내가 속한 편이 어디인가가 심정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어느 편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추구하는 방향이 분명해야 하는데 그렇지만도 않다. 정치가 방향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무한경쟁의 시대 상황에 이익 극대화를 위해서는 다른 사업목표를 설정하고 변화를 시도하는 기업처럼 정치도 그렇다.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정당이 진보를 추구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고, 자유라는 용어를 내세운다고 해서 자유주의를 추구한다고 보기 어렵다. 표방하는 이념이 그 정치 집단의 성향을 정확히 가리키지 못한다.

양당제가 고착된 상황에서는 승리가 우선적인 과제가 되므로 자신의 지향과는 관련 없이 두 개의 당파 중에서 택일할 수밖에는 없다. 선거의 승리와 정치적 지위 보전이 목적이 되기 마련이다. 국민의 선택권 행사는 선거 때 만이고 그나마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선거 때만 등장하는 정치를 보면 정당은 선거를 위한 플랫폼 기능만 하는 것 같다.

8월 8일자 주동식의 “진보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한다”라는 칼럼은 진보의 소수자 우선주의가 진보의 본래 지향과 충돌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자유의 확산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가를 점검함으로써 진보의 개념과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소수자 우선주의는 대립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수단으로서 악용되어온 측면이 있다. 가치의 제시와 해결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 국면을 만들기 위해서 갈등을 조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본질적인 가치 추구라는 정치적 자원이 고갈된 상황 탓일 수도 있겠다.

대립 국면 만들기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세계관을 토대로 한 정체성 설정과 이를 이념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나쁜 것과 좋은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기에 옳음과 그름은 분명하므로, 바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악하고 선한 것을 추구해야 하는데, 나쁜 것만을 추구하는 악인 또는 악한 세력과 좋은 것만을 추구하는 선인 또는 선한 세력이 명쾌히 구분되는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악한 자에 의해서 선한 사람이 피해를 보는 세상에서 가해자를 응징해서 좋은 세상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정한다.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여 억압받는 피해자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선악이 구분된 세계에서의 모두의 과제로 만들고 의무로써 부과한다.

이러한 선악 문제의 적극적 해결이라는 이야기는 궁극적인 구원의 드라마를 설명하는 종교와 유사하다. 이분법적 세계관과 가해자 피해자 구도 및 해결책의 궁극적 추구라는 스토리는 가슴에 와닿고 이해시키기 쉬우며 선호되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포퓰리즘은 이익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감명적인 구원의 스토리에 자기를 헌신하게 하는 정체성의 변화를 호소한다. 정치를 구원의 스토리로 만들어서 정서에 호소하고 감정 소비를 하게 한다. 이런 구원의 스토리는 이를 만들고 가르치는 선생들에 의해서 그리고 이 선생들을 앞장 세워서 대중을 설득하는 정치가에 의해서 언제나 사용된다.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에 의해서 세상을 나쁜 세력과 좋은 세력으로 구분해서 궁극적 해결을 추구하는 구원의 스토리는 대부분의 정치이슈의 배후에 있는 프레임이다. 반일정서의 근원인 소위 백년전쟁 프레임이 오늘날도 유행된다. 세상을 가해자 피해자 구도로 설정하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가해자와 피해자 찾기에 모든 노력이 기울여진다. 정치 이슈는 응징을 위한 감정 소비를 추구하는 것으로 되었다.

정치 이슈가 정치문제로 논의되지 않고 정치종교적 대립으로 진행된다. 사회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가해자 피해자 구도에 기대어 정치를 종교로 만들어 해결 불능으로 만들어버렸다.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아니라 정치종교 간의 싸움이고 종교전쟁의 양상이다. 종교전쟁은 가해자 피해자의 정체성을 국민정체성보다 우위에 놓아서 국가를 분열시킨다. 정치세력이 정치종교라는 수단으로 나라를 혼란시켜 왔는데, 그 결정판이 문재인 정권 5년으로서 대한민국을 두 갈래로 나누어 놓았다.

정치종교의 탈종교화가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가해자 피해자 구도라는 허구로 환원될 수 없다. 정치는 선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정치종교의 가르침을 폐기하고 그러한 가르침을 전파하는 정치종교의 사제들을 정치의 장에서 축출해야 한다. 유럽 근대의 종교개혁이 정치화된 종교를 정화한 것처럼, 민주정의 위기 시대에 종교화된 정치를 탈종교화하는 정치개혁이 요구된다.

종교성과 허황된 이상주의에서 벗어나 현실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에 앞서 언급한 주동식의 칼럼 취지의 이념의 재정립을 논할 수 있다. 88년 제6공화국 이후 지난 30여년 간 이념이 쇠락하고 정치종교가 횡행하는 상황에서 정치 이념과 프레임을 다시 검토해야 하겠다. 위 칼럼이 진보에서의 자유의 가치의 재정립을 요청하는 것은 자유의 확산을 추구하는 진보에 의해서 사회적 의제가 설정되어온 역사적 현실에서 그 필요성을 찾는 것으로 이해된다. 페미니즘 논쟁같은 현재의 사회적 이슈와 관련하여 자유 개념과 진보의 방향 재설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근대적 개인의 출현에 따른 자유의 확장의 문제가 공동체의 자유 문제와 함께 논의되면서 자유의 가치를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새천년 이후에 대두된 공정이라는 가치의 논의가 소위 갑질 논란 문제로 다루어지면서 피해자 가해자의 구도로 논의되었다. 이런 방식은 끝없는 갈등의 순환에 이르고 문제해결에 이르지 못함은 물론이고 공정의 문제를 가치의 문제로 다루지 못한다. 미디어 분야에서 미디어 공정성 논의에서 이같은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데, 공정이라는 가치가 대립국면을 만들어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수단으로서만 논의된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가 아니고 대립 진영 간의 대립을 위한 논쟁이다.

계파 정치 시대가 지나고 민주화 이후 세계적인 민주정의 위기 상황의 도래와 함께 민주정은 길을 잃었다. 대립을 위한 대립이 지속되고 극단적으로 정치 양극화된 상황에서 갈등만을 심화시키는 정치 소비는 모두의 심성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어떠한 해결 방안도 제시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는 것 같다. 극단적인 대립이 반대 정파를 적폐로 몰아서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는 패악질이 있었던 지난 5년간을 교훈으로서 새겨야 한다. 정치적 가치와 이념을 재검토함으로써 정치를 새롭게 해야 한다.

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변호사, 전 MBC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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