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는 10일 오전 국왕 즉위를 공식 선포함으로써 영국의 국왕이 됐다. 하지만 유럽의 전통적 왕권 개념에서 '대관식'과 '도유식'을 거쳐야 정식 왕이 될 수 있다. 여기엔 역사적 연원이 있다. [사진=영국 메트로]
찰스 3세는 10일 오전 국왕 즉위를 공식 선포함으로써 영국의 국왕이 됐다. 하지만 유럽의 전통적 왕권 개념에서 '대관식'과 '도유식'을 거쳐야 정식 왕이 될 수 있다. 여기엔 역사적 연원이 있다. [사진=영국 메트로]

웨일스 공 찰스는 10일 오전 국왕으로 공식 즉위를 선포하면서 정식으로 영국의 국왕 찰스 3세가 됐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찰스 3세는 대관식을 하기 전까진 왕이면서도 왕이라 할 수 없는 상태다.

유럽의 전통적 개념에 따르면 국왕의 정통성은 '대관식(corronation)'과 그 과정 중에서 이뤄지는 '도유식(塗油式, Annointing)'이 있은 후에라야 인정되기 때문. 영국은 군주제가 잔존하고 있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대관식과 도유식의 전통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유럽에서 '핫바지'로 간주됐던 영국 왕실이 이제는 '대관식'의 전통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자리매김하는 모양새다. 

한국의 경우 조선에서 왕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면 중국의 천자의 공식 인정을 받아야 했던 반면 유럽 왕권 개념에서는 왜 '대관식'을 거쳐야 했는지 역사적 배경을 알면 영국 왕실이 왜 그토록 옛 전통을 고수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단 평가다.

 

고대 로마 제국에 퍼지기 시작한 초기 기독교...황제도 이교 '대제사장'에서 '하느님의 대리자'로

유럽 왕권에서 '대관식'이 왜 중요한지를 알기 위해선 고대 로마 제국 시대 말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4세기 초반 로마 제국은 점점 쇠락해가고 있었지만 초기 기독교는 제국 내에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유피테르, 유노, 마르스 등 전통적 로마 신으로 대표되는 로마 다신교가 기독교로 대체되어가고 있던 것. 기독교는 처음엔 로마 평민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으나, 나중엔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도 신봉되고 있었다. 이에 제국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정책에서 기독교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선포한 '밀라노 칙령'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은 차츰 '이교(異敎)'의 제국에서 기독교 제국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맞춰 로마 황제의 종교적 역할도 바뀌기 시작했다. 다신교의 '대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 Pontifex Maximus)'에서 기독교의 '하느님의 대리자', '지상의 대리인'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으로 알려진 후기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의 수호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였고, 로마군은 '성모 마리아를 위하여(Ad Mariam Virginem)'를 외치며 적에게 돌진했다.

'대제사장(Pontifex Maximus)'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및 아우구스투스가 가지고 있던 로마 종교 최고위직의 직함으로, 이후 로마 황제들이 보유하게 됐다. 로마제국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로마 황제는 이교의 '대제사장'에서 '기독교 하느님의 대리인'이 됐다. 재밌는 사실은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로마 교황의 직함이 되기도 했다는 것. [사진=유튜브]
'대제사장(Pontifex Maximus)'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및 아우구스투스가 가지고 있던 로마 종교 최고위직의 직함으로, 이후 로마 황제들이 보유하게 됐다. 로마제국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로마 황제는 이교의 '대제사장'에서 '기독교 하느님의 대리인'이 됐다. 재밌는 사실은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로마 교황의 직함이 되기도 했다는 것. [사진=유튜브]

 

프랑크 왕국과 로마 주교의 제휴...나중엔 교황과 황제권의 충돌로 나타나

서유럽도 기독교로 '테라포밍'되기 시작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각 지역에 자리잡은 게르만 부족들이 각축을 벌이는 와중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인 프랑크 족이 서유럽을 차지하게 됐다.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 카롤링거 왕조는 교황으로 격상되기 전 일개 주교에 불과했던 '로마 주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야만족이지만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프랑크 왕국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메로빙거 왕조의 개창자 클로비스(Clovis)는 랭스에서 세례를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왕이 됐다. 또한 메로빙거 왕가를 축출하고 프랑크 왕위를 찬탈한 카롤링거 왕조의 피피누스 3세는 로마 주교 자카리아스를 다른 야만족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지켜주는 대신 자카리아스의 '대관식'과 '도유식'을 받기로 '딜'을 함으로써 진정한 기독교 왕이자 서로마 제국의 후예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결국 서유럽에서 왕의 정통성은 기독교와 결부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프랑크 왕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좋은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탁은 나중에 왕이라는 '세속 권력'과 교황이라는 '종교적 권력' 사이의 분규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로마 주교가 교황으로 거듭나자 교황은 세속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존재가 종교적 권력이니 왕권보다 교황권이 우선이라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는 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겐 전혀 달갑지 않은 이론이었다. 이로 인해 중세 유럽의 중요한 사건들 중 하나인 '카노사의 굴욕(1077년)'이 벌어지기도 했다.

게르만 야만족들의 각축장이 된 로마 제국 멸망 후의 서유럽에선 '로마 가톨릭' 정통 기독교를 받아들인 프랑크족이 두각을 드러냈다. 프랑크 왕국의 개창자인 클로비스 1세부터 카롤링거 왕조의 개창자 피피누스 3세까지 '대관식'은 왕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피피누스 3세의 대관식을 담은 그림.
게르만 야만족들의 각축장이 된 로마 제국 멸망 후의 서유럽에선 '로마 가톨릭' 정통 기독교를 받아들인 프랑크족이 두각을 드러냈다. 프랑크 왕국의 개창자인 클로비스 1세부터 카롤링거 왕조의 개창자 피피누스 3세까지 '대관식'은 왕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피피누스 3세의 대관식을 담은 그림.

 

'대관식'과 '도유식'이 하나의 '전형'이 된 기독교 유럽

'세속권력의 최고봉'이자 '하느님의 지상 대리인'이 완벽히 융합된 국왕이란 이미지는 기독교 유럽 세계에서 왕권의 전형이 됐다. 그 결과 각국의 왕들은 즉위와 동시에 '대관식'을 가져야만 진정한 왕이 될 수 있었다. 세속권력이야 그저 즉위를 선포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하느님의 지상 대리인'임을 인정받으려면 주교가 관을 씌워주고 축성된 '성유(聖油)'를 바르는 신성한 의식을 거행해야만 했던 것. 이로써 유럽의 왕은 한 손엔 종교적인 신성함을 상징하는 '왕의 구'를, 다른 한 손엔 왕의 권위와 통치권을 상징하는 '왕홀(Scepter)'을 들 수 있게 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4세(otto 4th)가 그려진 중세 동전. 오토 4세는 한 손엔 하느님의 대리인을 상징하는 왕홀을, 다른 한 손엔 세속 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고 있다. 이는 '대관식'을 거쳐야만 가능한 이미지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4세(otto 4th)가 그려진 중세 동전. 오토 4세는 한 손엔 하느님의 대리인을 상징하는 '왕의 구'를, 다른 한 손엔 세속 권력을 상징하는 '왕홀'을 들고 있다. 이는 '대관식'을 거쳐야만 가능한 이미지였다.

이를 극명히 보여주는 예가 프랑스를 구한 성녀 잔 다르크에 의해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할 수 있었던 샤를 7세다. 샤를 7세는 1422년 10월 프랑스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지만,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던 곳인 랭스 대성당에서 의식을 거행하지 못한 상황이라 정식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 '왕세자(도팽 드 프랑스, Dauphin de France)'를 의미하는 샤를 도팽으로 불리곤 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드디어 1429년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됐고, 그제서야 진정한 프랑스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하느님의 신성한 힘이 깃든 유럽 왕들에겐 신성한 치유력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이에 병든 평민들이 왕이 행차하는 곳마다 나타나 한번 어루만져달라고 구걸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샤를 도팽'은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진정한 프랑스의 국왕 '샤를 7세'가 될 수 있었다. 백년전쟁에서 영국에 계속 패했던 프랑스가 성녀 잔 다르크의 반격으로 랭스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 샤를 7세의 대관식을 담은 그림.
'샤를 도팽'은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진정한 프랑스의 국왕 '샤를 7세'가 될 수 있었다. 백년전쟁에서 영국에 계속 패했던 프랑스가 성녀 잔 다르크의 반격으로 랭스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 샤를 7세의 대관식을 담은 그림.

 

유럽 왕가 중 '핫바지'였던 영국 왕실, '대관식' 전통의 지킴이로

유럽에서 소위 '끗발'있던 왕가는 프랑스의 발루아-부르봉 왕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부르봉 왕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합스부르크 왕가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현실 권력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영국의 현 '윈저 왕조'는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독일 하노버에 기반을 둔 독일계 왕조다. 원래 이름은 작센코브르크코타 왕조였으나 독일에 적대적이던 민심을 반영해 윈저로 개명했으며,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의 성을 따 '마운트배튼 왕조'가 될 뻔한 적도 있으나 결국 윈저 왕조로 남게 됐다. 그 결과 유럽의 변방이자 네덜란드에서 국왕을 모셔 오기도 했으며 찰스 2세를 처형하기도 했던 소위 '근본 없던' 영국 왕실이 유럽의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다.

그 핵심엔 '대관식'과 '도유식'이 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선 국가 수반과 정부 기관의 정통성 및 정당성은 국민의 민의와 투표로 뒷받침된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의 시초국이라 평가되는 영국에선 여전히 세습 국왕이 중세로부터 내려온 전통과 '왕권 신수설'을 신봉하는 역설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그 상징이 '대관식'과 '도유식'이라 할 수 있는 것.

영국 정부와 왕실은 전통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국 성공회의 수장 캔터베리 대주교가 집전하는 '대관식'에 심혈을 기울인다. 여기엔 영국 왕이 국민의 민의가 아닌 기독교 하느님의 부름에 따라 선택됐다는 시각이 반영됐단 평가다. 이러한 신성한 의식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고 거행됐으나, 1953년 6월 2일의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은 BBC를 통해 최초로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다만 대관식 중에서도 가장 신성한 순간이라 할 수 있는 '도유식'만은 생방송 중에도 태피스트리로 가려진 채로 거행됐다. 영국 왕실이 변화와 전통 사이에서 지킬 것은 지키고 바꿀 것은 바꿨음을 보여준 셈이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신성한 대관식이 일개 총리의 정치적 고려에 따라 연기된 적이 있다는 것.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에 올랐을 시점의 총리는 윈스턴 처칠 경이었다. 그런데 처칠 경은 무려 16개월이나 대관식을 질질 끌었다. 그 이유엔 처칠 경의 총리직 사퇴를 바라는 보수당 내부의 반발 여론을 '대관식 준비' 명목으로 잠재우기 위해서란 평가가 대부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구한 구국의 영웅인 처칠 경이라야 가능했던 '뭉개기'였을지 모른다.

찰스 3세 역시 수 개월 내에 대관식을 거행할 것임이 확실시된다. 엘리자베스 2세의 선례를 참고하자면 대관식 자체는 동시 생중계될 가능성이 높지만, '도유식' 순간만큼은 공개하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한 지 16개월이나 지난 1953년 6월 2일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이 열렸다. 이는 이례적으로 텔레비전을 통해 동시 생중계됐다. 하지만 대관식 중에서도 가장 신성한 '도유식'만은 중계되지 않았다. 도유식 과정이 태피스트리를 통해 가려진 모습. [사진=유튜브]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한 지 16개월이나 지난 1953년 6월 2일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이 열렸다. 이는 이례적으로 텔레비전을 통해 동시 생중계됐다. 하지만 대관식 중에서도 가장 신성한 '도유식'만은 중계되지 않았다. 도유식 과정이 태피스트리를 통해 가려진 모습. [사진=유튜브]

박준규 기자 pjk7000@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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