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 엘리자베스 2세 서거에 그토록 슬퍼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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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의 관이 현지시간 13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고 나서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기 시작하자 여왕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려는 영국 국민들의 행렬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사진=유튜브]
엘리자베스 2세의 관이 현지시간 13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홀에 안치되고 나서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기 시작하자 여왕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려는 영국 국민들의 행렬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사진=유튜브]

현지시간 8일 영국 왕실의 여름 별장인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에서 96세를 일기로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영국 전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여왕의 관이 처음 안치됐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무르익었던 추모 열기는 현지시간 13일 관이 런던에 도착해 웨스트민스터 홀에 안치되고 난 후 시작된 끝 없는 조문행렬로 이어지고 있다. 조문객들은 남녀노소, 국제도시 런던에 걸맞게 백인·흑인·황인 할것 없이 다양한 모양새다.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시초가 고대 그리스라면, 의회로 대표되는 간접 민주주의의 시초는 영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뒤늦게 받아들인 전 세계의 다른 국가들은 대부분 왕정이 없거나 있더라도 큰 의미를 갖지 않는 반면, 영국은 왕실이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나름대로의 전통을 꿋꿋이 지켜가며 존재감을 유지해나가고 있다. 이는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회 민주주의를 전 세계에 퍼뜨린 영국이 왜 구시대의 유산인 '군주제' 그 자체였던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를 이토록 추모하는 것일까. 영국의 공화주의자들을 포함해 일각에서는 영국의 입헌군주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대대로 내려오는 왕실 특권과 권력이 그 원인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영국 왕실은 여러 특권을 포기하면서까지 현실의 변화에 대응한 바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여왕'에 관한 영국의 역사적 인식 및 엘리자베스 2세의 행적 때문 아니냔 지적이 더 설득력이 있단 분석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한 줄 모른 채 런던 템스강 주변에 나와 있던 시민들에게 서거 소식을 알리자 전혀 뜻밖이라는 듯 당황해하는 모습. 여론조사에 의하면 영국 국민의 4분의 3이 여왕의 서거 소식에 당황했다고 밝혔다. [사진=유튜브]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한 줄 모른 채 런던 템스강 주변에 나와 있던 시민들에게 서거 소식을 알리자 전혀 뜻밖이라는 듯 당황해하는 모습. 여론조사에 의하면 영국 국민의 4분의 3이 여왕의 서거 소식에 당황했다고 밝혔다. [사진=유튜브]

 

여왕의 치세는 '전성기'였다는 영국 내의 인식...'대영제국' 추억에 젖게 하기도

엘리자베스 2세 추모 분위기가 이토록 열렬히 일어나는 데엔 영국인들의 뇌리에 역대 여왕의 치세가 항상 '황금기(Golden Age)'로 각인돼 있단 점을 들 수 있다. 영국사에서 대표적인 여왕을 꼽으라면 엘리자베스 2세 외에 흔히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88-1603),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이 거론된다. 영국인들은 이 두 여왕의 치세가 그야말로 영국의 전성기였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연합왕국 '영국'이 만들어지기 전 잉글랜드의 여왕이었다. 또한 그녀의 치세가 완전한 전성기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기였던 16세기 후반의 유럽 최강국은 스페인(에스파냐), 프랑스였다.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그녀는 영국 여왕 하면 첫 순위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데, 이는 유럽의 변방이자 별 볼일 없던 잉글랜드를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기반을 다진 여왕이었기 때문이란 평가다. [사진=월드 히스토리 인사이클로피디아]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그녀는 영국 여왕 하면 첫 순위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데, 이는 유럽의 변방이자 별 볼일 없던 잉글랜드를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기반을 다진 여왕이었기 때문이란 평가다. [사진=월드 히스토리 인사이클로피디아]

다만 엘리자베스 1세는 그전까지 유럽의 북서쪽 변방이자 별 볼 일 없던 나라인 잉글랜드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 차후 열강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여왕이었기 때문에 영국인 특히 잉글랜드인들에겐 위대한 인물로 남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당대 유럽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의 침공을 막아낸 것으로 유명한데,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Armada)'를 1588년 칼레 해전에서 격파해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식민지 개척이 이뤄지기 시작했는데, 1600년 설립된 '영국 동인도 회사'가 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잉글랜드 왕국 함대는 당대 최강이라 평가받던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함으로써 스페인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 때 전력을 강화한 영국 해군이 바탕이 돼 대영제국 해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의 해상전 기록화.
엘리자베스 1세의 잉글랜드 왕국 함대는 당대 최강이라 평가받던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함으로써 스페인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 때 전력을 강화한 영국 해군이 바탕이 돼 대영제국 해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의 해상전 기록화.

엘리자베스 2세의 본명이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였기 때문에 왕호가 '엘리자베스 2세'가 된 것이지만 역사적 업적이 뚜렷했던 엘리자베스 1세와 이름이 우연히도 같게 됐다. 이로 인해 영국 내에서 그녀가 엘리자베스 1세처럼 영국을 다시 황금기로 이끌 것이란 기대가 커졌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인도가 1947년 독립함으로써 인도 제국의 황제란 명칭을 쓰지 못하게 되면서 대영 제국은 사실상 해체되는 수순을 밟고 있었는데, 이러한 암울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여왕이란 기대감이 엘리자베스 2세에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했던 1952년 영국이 그녀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는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의 조지 6세 헌사에 담겨 있단 평가다. 처칠 총리는 헌사에서 "유명한 것들이 우리 여왕들의 통치기에 있었다"며 "우리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들이 여왕 아래서 펼쳐졌다"고 했다. 이어 "이제 우리는 26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신 두 번째 엘리자베스 여왕을 맞게 됐다"며 "거의 400년전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장엄함과 천재성을 관장하고, 여러 면에서 상징하고 고무했던 훌륭한 인물을 생각해보게 된다"고 했다. 즉 엘리자베스 1세처럼 2세도 위대한 여왕이 될 것이라 짐작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가 1952년 2월 7일 BBC 라디오에서 한 연설 전문을 이틀 후인 9일 더 시드니 모닝 헤럴드에서 실었다. 처칠 총리는 이 연설에서 조지 6세를 기리는 동시에 엘리자베스 2세 등극을 축하했다. 특히 영국이 엘리자베스 1세, 빅토리아 여왕처럼 역대 여왕 통치 시기에 항상 황금기를 맞았다며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가 1952년 2월 7일 BBC 라디오에서 한 연설 전문을 이틀 후인 9일 더 시드니 모닝 헤럴드에서 실었다. 처칠 총리는 이 연설에서 조지 6세를 기리는 동시에 엘리자베스 2세 등극을 축하했다. 특히 영국이 엘리자베스 1세, 빅토리아 여왕처럼 역대 여왕 통치 시기에 항상 황금기를 맞았다며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에 비해 엘리자베스 2세의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은 명실상부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여왕이었다. 1837년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엔 영국이 산업혁명을 통해 '전 세계의 작업장(Workshop of the Wolrd)'으로 불릴 정도였으며, 1867년엔 인도를 병합함으로써 그녀는 '영국 여왕이자 인도 제국의 여제'가 됐다. 이러한 강대한 국력을 바탕으로 대영제국은 19세기 후반 독일 제국이 유럽의 위협으로 자라나기 전까진 누구와도 동맹을 맺지 않는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 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당대 최강이었던 대영제국의 자신감을 몸소 드러내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1883년의 '대영제국엔 해 질 날이 없다(Great Britain no time to lose)', 1899년 제2차 보어전쟁에 대해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패배 따위엔 관심 없다(We are not interested in the possibillities of defeat; they do not exist)'라고 한 것이 꼽힌다.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는 명실상부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어록에서도 이러한 자신감이 묻어난단 평가다.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는 명실상부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어록에서도 이러한 자신감이 묻어난단 평가다.

처칠 총리는 조지 6세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엘리자베스 1세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 역시 언급했다. 처칠 총리는 "내일 엘리자베스 2세가 군주 즉위를 선포하여 영국 및 영연방과 제국의 모든 지역에 충성을 명령하게 될 것"이라며 "존귀했고 도전받지 않았으며 평화로웠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저는, 기도문과 국가를 읊으며 다시 한번 그 전율을 느낀다.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라고 헌사를 끝맺음했다.  

즉 대영제국의 약 60년에 달하는 전성기를 체현한 빅토리아 여왕과 그녀의 치세에 대한 향수 역시 후대 영국인들에게 녹아들어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영연방 확대, 솔선수범했던 엘리자베스 2세...시대 변화에 적응했단 평가

다만 엘리자베스 2세가 영국인들의 여왕에 대한 긍정적 인식에만 의존했다면 사후 광범위한 추모 열기를 불러일으키진 못했을 것이다. 여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재위기간 내내 '군림하되 통치하진 않는다'는 신조에 비교적 충실하면서도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보였단 평가다.

엘리자베스 2세는 특히 '영연방'을 확대하여 대영제국의 유산을 지키려 노력했단 평가를 받는다. 그녀의 재위기간 동안 영연방은 7개 국가의 참여체에서 56개 회원국으로 늘어나 전 세계 인구의 3분의1에 해당하는 25억여명이 참여하는 거대 단체로 거듭났다. 이는 거저 된 것이 아닌데, 기존의 회원국을 붙들어두면서 새 회원국의 가입을 유도해야 했기 때문. 이를 위해 엘리자베스 2세는 200회 이상의 순방을 다닌 것으로 확인된다.

엘리자베스 2세의 첫 영연방 순방은 그녀가 공주였던 1847년 아버지 조지 6세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와 동행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짐바브웨, 보츠와나 방문이었다. 1952년엔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과 순방 도중 케냐에서 조지 6세의 부음을 듣고 급하게 영국으로 귀국해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가장 중요한 영연방 회원국 중 하나인 캐나다는 12번 방문했으며, 또 하나의 중요한 회원국인 호주와 관련해선 1973년 10월 20일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개관에 참여하기도 했다. 즉 엘리자베스 2세는 '식민지 독립'이란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 저항하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대영제국을 대체할 수 있는 '영연방'에 옛 식민지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데 일정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로써 영국은 기존의 국제적 위상을 일정 정도 보존할 수 있었단 평가다.

현지시간 13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지붕에 여왕 추모 사진이 나타난 모습. [사진=BBC]
현지시간 13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지붕에 여왕 추모 사진이 나타난 모습. [사진=BBC]

그 외에도 1992년 윈저성 화재 복구사업 관련해 많은 비용이 들어 국민들로부터 반대 여론이 커지자 엘리자베스 2세는 왕실의 면세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기도 하고, 찰스 왕세자와 이혼해 더 이상 왕실 사람이 아니었던 다이애나 스펜서 전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이례적으로 입장을 바꿔 조의를 표하고 왕실장을 치르기도 했다. 다만 이는 다이애나 비의 죽음에 대한 왕실 비판 여론을 의식한 '뒷북' 조치였으니 엘리자베스 2세의 오점 중 하나란 지적도 있다.

엘리자베스 2세(가운데), 찰스 왕세자 및 다이애나 왕세자비.  찰스와 다이애나가 이혼하고 난 후 다이애나가 비극적으로 사망하던 것과 관련해 영국 왕실에선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다가 국민 여론이 급속히 안좋아지자 태도를 바꿔 왕실장까지 치른 바가 있다.
엘리자베스 2세(가운데), 찰스 왕세자 및 다이애나 왕세자비. 찰스와 다이애나가 이혼하고 난 후 다이애나가 비극적으로 사망하던 것과 관련해 영국 왕실에선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다가 국민 여론이 급속히 안좋아지자 태도를 바꿔 왕실장까지 치른 바가 있다. [사진=E뉴스]

엘리자베스 2세가 흠 없는 완벽한 군주는 아니었지만, 70년이 넘는 재위기간 동안의 노력이 결국 현재의 추모 열기로 보답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여왕의 서거 이후 구체적인 여론 조사로도 나타난단 평가다. 영국의 인터넷 기반 시장 조사 및 데이터 분석 기업인 '유고브(YouGov)'가 지난 13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가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에 '당황했다'고 밝혔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었단 비율은 22%였다. 또한 그녀가 영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군주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87%가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그렇지 않단 비율은 4%에 불과했다. 아울러 엘리자베스 2세가 영국에 좋은 군주였느냐는 질문엔 85%가 그렇다고 밝힌 반면 좋지 않은 군주였단 대답은 6%였다.

노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즉위한 된 찰스 3세는 앞으로 부담감이 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왕이 아니므로 어머니처럼 역사적 이점을 누릴 수 없을 뿐더러 이혼 경력·막말·다혈질 등 그의 부정적 면모가 주목받는 가운데 영연방 내 탈퇴 분위기까지 관측되면서 '창업(創業)보다 수성(守成)'이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을수도 있다. 한 마디로 '어머니의 그늘'이 그에겐 너무나 클 수 있단 이야기다.

한편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 관련한 본지의 뉴스는 위쪽 관련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찰스 3세가 현지시간 17일 런던 램버스 다리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찰스 3세의 최근 행보는 본인에 대한 부정직 이미지를 없애기 위한 행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사진=연합뉴스]
찰스 3세가 현지시간 17일 런던 램버스 다리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찰스 3세의 최근 행보는 본인에 대한 부정직 이미지를 없애기 위한 행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사진=연합뉴스]

박준규 기자 pjk7000@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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