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칼럼] 교회분열시대의 재정문제 
[김상규 칼럼] 교회분열시대의 재정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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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 전 조달청장

  1389년 우르바노 6세의 후임으로 피에트로 토마첼리가 보니파시오 9세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355년에 태어났으니 교황이 될 때 34세의 젊은 추기경이었다. 젊었을 때의 행적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폴리의 귀족 출신이어서 출세가 빨랐는지, 아니면 전임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을 20명 이상 한꺼번에 뽑을 때 선택되었는지 모른다. 
  추기경들은 전임 교황 우르바노 6세의 고집에 진절머리가 났고, 비타협 정책으로 초래된 자신들의 고생과 수난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과 소통하며 이익을 나눠가질 수 있는 현실적인 사람을 뽑았는지 모른다. 진영대결이 치열하다 보니 젊음도 선택의 기준이 되지 않았을까. 자신을 우르바노 6세의 후계로 추대해서 교회통합을 하자는 아비뇽 대립교황의 제안을 거절하며, 아비뇽교황보다 훨씬 오래 재임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을 뽑았을 수도 있다. 뛰어난 신학자도 아니었고 행정경험도 부족했지만 아비뇽과 싸우며 로마 교황의 위상을 높이는 데 젊은 토마첼리가 더 적합할 거라 여겼던 모양이다. 
  추기경들의 기대대로 보니파시오 9세는 재위기간 동안 로마에 대한 세속적 통치권을 확립하였다. 산탄젤로 성을 요새화하고 오스티아 항구를 환수하였다. 교황령에 속한 주요 성들 및 도시들의 통치권을 되찾아 교황령의 기강을 잡았다. 로마의 귀족 콜론나 일가가 공화국 정부의 회복을 주장하며 군대를 끌고 와서 교황궁을 포위했어도 교황은 꿋꿋이 견뎌냈고 반란을 진압했다.

  1386년 나폴리 왕 카를로 3세가 암살되자 아비뇽의 클레멘스 7세는 앙주의 루이 2세를 나폴리 왕으로 지지하며 대관식을 집전했는데, 보니파시오 9세 교황도 1390년 5월 카를로 3세의 아들인 라디슬라오를 나폴리 왕으로 대관식을 집전했다. 나폴리는 로마 바로 아래에 있어 이 지역이 프랑스로 넘어가면 로마교황권이 위협받을 수 있었다. 보니파시오 교황은 라디슬라오와 이탈리아 남부지역에서 프랑스의 앙주 가문을 몰아내기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함으로써 프랑스세력을 견제했다.  
  냉전 속에서도 학문의 발전에 꽤 신경을 썼던 것 같다. 1391년 페라라 대학교, 1398년에는 페르모 대학교, 1392년에는 에르푸르트 대학교를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다. 1404년 오래 살 것으로 예상되었던 보니파시오 9세 교황은 49세에 선종했다. 

  보니파시오 9세에 대한 주된 비판은 돈에 너무 집착했다는 점이다. 모든 성직자는 성직록의 첫해 수입 절반을 교황청에 바치도록 했고, 성직록을 팔았다. 빈자리뿐만 아니라 공석 예정인 성직록까지 판매했다. 팔아놓고도 더 많은 액수를 제시하면 당초 판매를 취소했다. 당시 교황청의 관리였던 니하임의 디트리히는 같은 성직록이 일주일에 여러 번 팔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기록했다<위키백과>.
 돈을 모으기 위해 1390년에 이어 1400년에도 로마의 희년 축제를 선언했다. 정치적 혼란과 불안 때문에 로마순례자가 많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자, 어떤 그리스도인이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로마 여행경비를 교황청에 기부하면 완전히 죄가 용서된다고 선언했다. 모금원들 중에 죄의 고백을 요구하지도 않고 사면을 베푼 자도 있었고, 일부 모금원들이 돈을 착복하자 돈을 되갚을 때까지 고문했다고 한다<윌듀런트, 문명이야기 5-2>.

  희년 축제를 10년 내에 2번이나 개최하고, 성직록까지 팔아 돈을 모으다 보니 교황의 이미지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교황의 권위 상실과 나아가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굳이 보니파시오 9세를 변호하자면 대립교황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돈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정보수집, 홍보, 공작 등 온갖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 않았을까. 아비뇽은 70년간 문화, 예술, 행정조직 등 각종 인프라가 갖춰졌지만, 로마는 황폐해졌다. 전임 우르바노 6세도 전쟁과 도망을 다니느라 로마를 정비하지 못했다. 경쟁자보다도 초라한 자기 모습을 보며 집부터 번듯하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 적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체제도 갖춰야 했을 것이다. 
 보니파시오 8세 때 필립4세와의 싸움에서 교황권이 무너졌다. 새 교황이 ‘보니파시오’란 이름을 택한 것은 교황권을 되살리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보니파시오 9세가 도덕적인 힘이 아니라 물질의 힘으로 로마교황청을 일으켜 세울 구상을 한 것이다. 총칼만 들지 않았지 마음은 전쟁 중에 있었다.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양들을 영적으로 이끄는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상이나 도덕은 사치였는지 모른다. 

  교회분열을 끝내기 위한 공의회 소집 요구에도 보니파시오 9세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프랑크푸르트 의회, 신성 로마 제국 등 로마교황 지지자들이 교회 통합을 위해 보니파시오 9세에게 퇴임 요청을 했으나 거부했다. 자신이 먼저 퇴임하면 로마교황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대립교황만 좋게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후대에 보니파시오 9세는 교회분열 사태를 종식시킬 만한 도량이나, 이상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위키백과>. 

  보니파시오 9세의 선종 후, 프랑스는 새 교황의 선출을 반대했지만, 아비뇽의 대립교황이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로마 추기경들은 인노첸시오 7세 교황을 선출했다. 그런데 로마에서도 그의 교황선출에 반대하여 큰 소요가 일어났다. 반교황파(기벨린파)가 중심이었는데 교회통합을 명분으로 내세웠을 것이다. 프랑스 등의 사주도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불안한 정정 때문인지 인노첸시오 7세는 자기 조카 루도비코 미그리오라티를 교황군 사령관으로 파격 승진시켰다. 다른 교황들도 종종 조카를 등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배신이 많던 시대라 믿을 사람이 혈족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조카를 교황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큰 실책이었음이 드러났다. 

  인노첸시오 7세가 교회 통합을 위한 로마공의회 소집을 선언한 후 루도비코 사령관이 반교황파의 지도자 들을 생포한 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폭동이 일어났고, 교황과 추기경들은 서둘러 로마를 빠져나가 비테르보로 피신했다. 로마 시민들은 한동안 교황궁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인노첸시오 7세는 1406년 초가 되어서야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는데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이 교황 선출 전에 약속한 교회 통합을 위한 로마공의회도 함께 무산되었다. 

  공의회 소집도 진정성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왕들과 신학자들의 공의회 촉구분위기에 편승했던 것 같고,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가 로마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안전통행권을 보장하지 않아 공의회 참여를 회피할 수 있는 명분을 상대측에 제공했다. 대립교황 베네딕토의 눈에는 인노첸시오 7세가 교회통합에 유일한 장애물로 비춰졌다고 한다<위키백과>. 
  교회의 분열과 진영대결은 교회의 영적 지도능력을 약화시켰다. 원래 전쟁이나 싸움에서 인간의 악한 모습이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교회 통합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은 보이지 못했고, 속인들의 사퇴 압박에도 상대방의 사임만을 고집했다. 대결구도라지만 교황이 자리에 연연하는 비굴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성직자들이 속인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냉전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신도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내부분열과 싸움만큼 백성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한심해 보이는 것도 없다. 인간의 나쁜 속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루속히 국민의힘 내부 싸움이 마무리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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