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가 불분명한 천신(天神) 강림의 존재를 민족의 시조라고 섬기고, 특정 종교의 축일을 양력으로 바꿔치기한 날을 “하늘이 열린 날” 운운하며 법정 공휴일로 저정해 대통령이 축사를 읊어대는 일을 언제까지 반복한 셈인지…. 한민족 된 자는 마땅히 단군과 개천절을 기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지금 제정일치의 청동기 시대를 살고 있는가?

#. 정부가 걷어찬 국군의 날과 유엔의 날

정부가 지정한 국경일은 3·1절(3월 1일), 제헌절(7월 17일), 광복절(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 한글날(10월 9일) 5개다. 국경일은 제헌절을 제외한 4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그다음으로 기리는 것은 일반 국가기념일로, 정부가 지정한 5개의 법정 국경일에서 제헌절을 제외하고 7개를 추가하여 11개다. 일반 국가기념일은 다음과 같다.

신정(1월 1일), 설날(음력 1월 1일), 3·1절(3월 1일), 부처님 오신 날(음력 4월 8일), 어린이날(5월 5일), 현충일(6월 6일), 광복절(8월 15일), 추석(음력 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 한글날(10월 9일), 성탄절(12월 25).

10월은 개천절·한글날 등 국경일이 두 차례나 있는 경사스러운 달이다. 과거엔 국군의 날(10월 1일), 유엔의 날(10월 24일)도 국가기념일 혹은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10월이면 전 국민이 거의 매주 한 번씩 휴일을 즐기느라 표정 관리에 바쁜 달이기도 했다.

독자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국군의 날은 6·25 때 우리 국군이 이승만 대통령의 명에 의해 미수복지역인 38선 이북 지역을 수복하여 통일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북진을 개시한 날이다. 유엔의 날은 유엔이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하고,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해 주었으며, 공산군의 6·25 남침을 유엔군을 파견하여 격퇴해 준 공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날이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국군의 날과 유엔의 날은 법정 공휴일이나 국가기념일에서 탈락하여 세인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국군의 날이면 으레 국군의 날 공식 행사와 함께 우리 국군이 보유한 첨단 신무기를 선보이기 위한 시가행진이 압권이었다. 국군의 씩씩한 위용을 납세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3군 의장대 및 군악대, 사관생도를 앞세운 시가행진으로 축제는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퍼레이드는 2013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대체 우리 군이 무슨 죄라도 지은 것일까? 아니면 무슨 곡절이 있었기에 국민에게 자신들의 위용을 보여주지도 못하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린 것일까?

#. 시가행진·열병식을 가수 싸이 공연으로 대체한 문재인 정부

대한민국은 65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가 국방비 지출 세계 10위, 무기 수입액 세계 7위, 무기 수출국 세계 9위에 랭크되어 있다. 초음속 제트전투기와 이지스함, 전략잠수함, 각종 순항 미사일, 전자장비로 작동하는 전차 등을 자급자족은 물론 수출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 한국군은 이제 어엿한 선진국 군대로 자리매김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런 위용을 갖춘 국군의 위상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세레모니라도 있어야 할 터인데, 사정은 거꾸로 가고 있다.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한 것은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6년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3년, 국군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승격했고, 1976년에는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민주화 태풍에 휩싸인 노태우 정부는 1990년 “10월에 공휴일이 많아 기업의 업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란 이유로 국군의 날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했다.

문재인 정부는 제70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예정되어 있던 시가행진 및 열병 분열식을 생략하고 가수 싸이 공연으로 대체했다.
문재인 정부는 제70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예정되어 있던 시가행진 및 열병 분열식을 생략하고 가수 싸이 공연으로 대체했다.

국군의 날 공식 행사는 그전까지는 여의도 광장에서 진행되었으나 김영삼 정부 시절 여의도 광장을 공원으로 조성하는 계획이 추진되면서 계룡대로 쫓겨났다. 국군의 날을 상징하는 시가행진도 수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노태우 정부는 매년 진행하던 국군 시가행진을 3년에 한 번으로 줄였고, 김대중 정부는 5년에 한 번으로 더 축소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9년 4월 26일, 국방부는 느닷없이 국군의 날 행사 규정 제313조와 제314조를 개정했다. 기존 규정에 의하면 5년 주기로 하는 대규모 국군의 날 행사는 서울공항 혹은 잠실경기장에서 “열병, 도보 부대·기계화부대 분열, 헬기 선도 비행”이 명기되어 있었다. 또 남대문·광화문 또는 테헤란로에서의 “도보 부대·기계화부대 시가행진”을 명확하게 밝혀 놓았다.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는 이 조항을 “국군의 날 행사는 식전 행사, 기념식, 식후 행사와 경축연 등 부대행사로 하며, 해당연도 행사기획 시 결정한다”라는 내용으로 고쳐버렸다. 개정된 규정에 따르면 국군의 날 행사 여부와 규모를 그때그때 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가행진이나 열병, 도보 부대·기계화부대 분열 등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이 조항에 의거, 문재인 정부는 임기 5년 동안 열병식을 단 1회만 진행하고 생략해버렸다. 더욱 해괴한 일은 제70주년 국군의 날을 맞는 2018년에 벌어졌다. 이 해는 5년 주기로 진행하는 시가행진이 계획되어 있었다. 이 해에 문재인 대통령은 판문점과 평양에서 김정은과 남북 정상회담을 두 차례나 가졌고, 스스로 무장해제를 약속하는 굴욕적 내용이 대폭 담긴 9·19 남북 군사합의를 체결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처럼 남북 평화 무드가 일고 있는 상황에서 국군의 날 퍼레이드를 벌이면 주체사상의 3대 교주 김정은을 자극할 우려가 다분하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제70주년 국군의 날 행사는 도둑놈처럼 저녁 6시 30분에 시작되었다. 5년 주기로 개최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시가행진, 열병, 도보 부대·기계화부대의 분열 따위는 모두 생략하고 가수 싸이의 축하공연, 드론 쇼로 대체해버렸다.

곳곳에서 5년 주기 시가행진이 시행되지 않고 열병식을 생략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항의가 제기되자 문재인 청와대는 “역대급 폭염으로 인해 군 장병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서”라고 해명했다. 제70주년 국군의 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 대종교와 개천절은 뗄 수 없는 관계

눈길을 개천절(開天節)로 돌리면 한숨은 더 깊어진다. 대한민국 국경일로 지정된 이날은 ‘하늘이 열린 날’이란 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 역사에서 첫 국가인 단군의 고조선 개국을 기념하는 날이다. 고조선 개국 시기는 문명사 분류상 신석기 시대 말기, 혹은 청동기 시대로 추정된다. 우리가 단군의 고조선 개국을 기리기 위해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했다는 뜻은 신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의 정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문화적 여정으로 해석될 소지도 있다.

여기서 두 가지 복잡하고 기괴한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고조선의 개국이 10월 3일이란 근거는 무엇인가, 둘째는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고조선 개국과 단군을 기념해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연도)와 날짜가 언제인가를 명확한 근거를 통해 학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3일이 개천절로 둔갑한 근거는 대종교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다. 이 경전이 전해져 온 사연은 그 내용은 너무나 황당무계하여 생략하기로 한다.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은 대종교의 축일을 양력으로 바꿔 국경일로 정했다.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은 대종교의 축일을 양력으로 바꿔 국경일로 정했다.

문제는 이 책에 등장하는 “한배 님이 갑자년 10월 3일 태백산에 강림하여 125년간 교화 시대를 지내고 무진년(戊辰年) 10월 3일부터 치화(治化)를 시작했다”라는 구절이 개천절의 근거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한배 님이란 환웅을 칭하는 것이요, 한배 님이 태백산에 강림한 시기를 서기로 환산하면 기원전 2357년, 치화를 시작한 해는 기원전 2333년이 된다.

대종교 이전에 10월 3일을 단군이나 개천과 연결하여 기렸던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종교는 1909년 처음으로 음력 10월 3일을 단군 대황조께서 나라를 세우고 참된 도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대종교 창시자 나철은 1910년 환인·환웅·환검은 단군의 다른 이름이라면서 단군을 천신(天神)과 일체화했다. 이로써 대종교는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 혹은 개천경절로 민족의 성절로 기려야 한다고 봉화를 올렸다.

대종교의 주장에 쌍수를 들어 화답한 것은 언론이었다. 황성신문은 1909년 11월 21일 자 논설에서 ‘우리는 단군을 기념함으로써 우리가 문명 민족임을 세상에 발표해야 한다. 10월 3일이 꼭 역사적 사실에 합치된 날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 날짜가 좋은 때니 그날 단군을 기념하자’라고 맞장구를 쳤다.

#. 대종교 축일이 대한민국 국경일로 둔갑

사례에서 보듯이 개천절은 대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대종교는 1909년 음력 정월 15일(양력 2월 5일) 나철이란 사람이 서울에서 오기호·이기·정훈모 등과 함께 조직한 단군교가 그 뿌리인데, 1910년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대한제국이 망하자 대종교 지도부는 신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다.

1914년 5월, 대종교는 총본사를 자신들이 영지라고 믿는 백두산 가까운 화룡(和龍)현 삼도구 청파호로 옮겼다. 대종교는 교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연길 등을 중심으로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독립운동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 단체에 가입한 조직원은 약 1만 5,000명 정도로 추산된다(『한국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68, 954쪽).

대종교 중심인물은 제1세 교주 나철, 제2세 교수 김교헌과 함께 대종교 삼종사로 불리는 서일이다. 이 밖에도 제3세 교주 윤시복을 비롯하여 신규식·김두봉·박찬익·이상설·박은식·신채호·김좌진·홍범도·안희제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종교 교인이었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의정원 의원 29명 중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 정부 조직에 임명된 13명 중 11명이 대종교 원로였다(현규환, 『한국유이민사』상, 삼화출판사, 1976, 571쪽).

임정은 대종교에 많은 신세를 졌고, 정부 요인 가운데 다수가 대종교 교인 혹은 관계자였다. 이런 입장이었으니 대종교가 전설 따라 삼천리나 다름없는 내용을 근거로 단군 기념일을 개천절로 기려야 한다고 주장하자 임정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임정은 음력 10월 3일을 기념하자는 데는 이견이 없었으나 다른 종교인의 입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명칭을 대종교 축일인 개천절로 하기엔 부담이 크다고 판단, ‘대황조성탄(大皇祖聖誕) 및 건국 기원절’이라는 명칭을 택했다. 그리하여 임정 국무원 주관으로 축하 의식을 거행했다.

대종교의 개천절을 기리는 기념의식.
대종교의 개천절을 기리는 기념의식.

대한민국은 임정을 계승한다고 선언했으니 개천절이 대한민국 국경일로 등장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거, 국경일로 제정하는 과정에서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고쳤고, 명칭은 대종교 축일 명인 개천절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로써 전 국민은 영문도 모른 채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기려야 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개천절에 관한 한 한국인은 대종교의 음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 단군은 없고, 기자(箕子)만 존재했던 조선시대

단군이 우리 역사 무대에 본격 등장한 것은 오랜 과거가 아니라 대한제국이 패망하여 한반도가 일본의 한 지역으로 편입된 구한말에서 일제 시기였다. 그전까지 한국인(정확하게 말하면 조선인)들 의식 속에 단군은 없었고, 애오라지 중국에서 건너와 조선을 건국했다는 기자(箕子)만이 존재했다.

조선은 중화 문화를 종족이나 국가보다 우선했고, 그것을 본받는 것을 동방예의지국의 기본이라 믿었다. 그들은 사대 모화를 습득하면서 자발적 충성심으로 중국에의 종속을 자처했다. 중화 천하 일가에 동참하기 위해 그들은 민족의 시조 단군을 팽개치고 중국 주(周)나라 무왕으로부터 조선 왕으로 책봉 받았다는 기자(箕子)를 시조로 삼고, 기자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기자란 인물이 실제로 고조선에 왔는지 아닌지 학문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았지만, 사실 여부는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었다. 오로지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것이 명예스럽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 단군·백두산·만주는 일제 시기 등장

대한제국이 패망하여 나라를 잃자 한국인들이 기댈 언덕은 민족이었다. 조선시대는 철저한 계급사회로서 양반-상놈, 남자-여자, 노장-소장의 차별이 존재했을 뿐, 그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아이덴티티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라가 망한 후 그들은 양반, 상놈, 노비, 천민,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우리는 하나”임을 표출하기 위해 일본에서 ‘nation’을 번역한 ‘민족’이란 용어에 매달렸고, 한민족의 상징물로 배달겨레, 단군의 자손을 창출해 냈다.

단군과 백두산, 그리고 ‘단군의 성지’로서의 만주를 우리 역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주인공은 개신 유학자 출신의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와 박은식이었다. 백두산이 민족적 상징으로 탐구되기 시작한 것도 1920년대부터였다. 그중 대표작이 1926년 7월 28일부터 1927년 1월 23일까지 총 89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된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였다. 최남선에게 백두산 기행은 종교적 순례였다. 단순한 등산·탐험의 의미가 아닌, 단군 탄신 강림의 성지로서의 백두산을 민중 의식 속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였다는 뜻이다.

국가 부재 상황에서 민족성을 유지하기 위해 최남선은 ‘상상’으로 신념과 현실 간의 간극을 메우려 노력했다. 이른바 국수적 민족주의의 탄생이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연장선상에서 개천절이 국경일로 지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근거가 불분명한 천신(天神) 강림의 존재를 민족의 시조라고 섬기고, 특정 종교의 축일을 양력으로 바꿔치기한 날을 “하늘이 열린 날” 운운하며 법정 공휴일로 저정해 대통령이 축사를 읊어대는 일을 언제까지 반복한 셈인지…. 한민족 된 자는 마땅히 단군과 개천절을 기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지금 제정일치의 청동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지우기 힘들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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