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고강도 긴축정책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국내 채권시장의 대혼란이 우려되고 있다.

흥국생명이 외화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권(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하면서 해외채 시장을 통해 자본성 증권을 발행하려던 일부 보험사들의 자금조달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사진은 3일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 본사 모습. [사진=연합뉴스]
흥국생명이 외화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권(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하면서 해외채 시장을 통해 자본성 증권을 발행하려던 일부 보험사들의 자금조달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사진은 3일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 본사 모습. [사진=연합뉴스]

미 연준, 경기침체 감수하며 내년 기준금리 5%로 올릴 듯

미 연준은 지난 2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인상했다. 네번 연속 '자이언트 스텝'을 밟았다. 이에 따라 현재 3.00∼3.25%인 미국 기준금리는 3.75∼4.00%로 상승했다. 이로 인해 한미간 기준금리 격차는 1.00%포인트까지 벌어졌다.

파월 의장은 FOMC 정례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금리 인상 중단 고려에 대해 "매우 시기상조" "최종금리 수준은 지난번 예상한 것보다 높아질 것" 등등의 매파적 발언에 무게를 실었다. 시장 기대와 엇갈린 셈이다. 내년 기준금리가 9월 점도표(연준 위원들의 향후 금리 전망을 나타낸 도표)에서 제시된 4.6%를 넘어 5%에 육박할 가능성을 파월이 암시했다는 분석이다. 미 연준의 목표는 인플레이션 잡기이다. 이를 위해서는 매파적 기조를 유지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기침체’도 감수하겠다는 분위기이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유럽연합(EU), 영국 등 서구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중앙은행, 잉글랜드은행 등도 연거푸 자이언트 스텝 밟아

미 연준의 매파적 기조가 유지됨에 따라, 유럽중앙은행(ECB)의 최종 금리 수준도 높아질 것이라는 게 시장의 관측이다. 로이터·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미 연준이 자이언트스텝 인상을 단행한 다음날인 3일(현지시간) 라트비아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제 상황과 관련해 “가벼운 수준의 경기침체 정도로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록적인 물가를 잡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운데). [사진=연합뉴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운데). [사진=연합뉴스]

ECB는 이미 기록적인 물가를 잡기 위해 지난달 27일 기준금리를 2차례 연속 0.75%포인트 인상한 바 있다. 지난달 유로존의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10.7% 상승, 12개월 연속으로 최고치를 경신했다. ECB의 목표는 연 2%로 물가상승률을 끌어내리겠다는 것이다.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BOE)도 지난 3일(현지시간) '자이언트 스텝'을 밟았다. 통화정책위원회(MPC)에서 기준금리를 연 2.25%에서 연 3.0%로 0.75%포인트 올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4년 만에 최고 수준의 기준금리이다.

경기침체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BOE는 영국의 경기침체가 올해 3분기에 이미 시작됐고, 2024년 중반까지 2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BBC에 따르면 BOE는 금리 고점이 내년 가을께 연 4.5%가 될 것임을 시사했다. 그동안 나왔던 금리 고점인 4.75%나 6% 전망에 비해서는 낮아진 수치이지만, BOE가 향후 큰 폭의 금리인상을 단행할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흥국생명의 콜옵션 포기는 외화채권시장의 ‘돈가뭄’ 신호탄?

이처럼 선진국 정부들이 일제히 돈줄을 조이면서 국내 외화채권시장에 ‘돈가뭄 비상’이 걸리고 있다. 흥국생명이 오는 9일 조기상환일이 도래하는 5억 달러의 신종자본증권에 대해 콜옵션 행사를 연기하기로 한 것은 그 신호탄이라는 분석이다. 콜옵션은 채권만기 중간에 돈을 상환할 수 있는 권리이다. 흥국생명의 경우 10년 만기인데 중간시기인 5년째에 조기상환할 수 있는 조건을 걸었다. 그 조기상환을 포기한 것이다. 조기상환을 포기하면 이후 금리가 높아진다. 따라서 99.9%의 기업들은 콜옵션을 행사한다. 높은 금리 부담은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국생명이 콜옵션을 포기한 것은 자본력 약화 때문일까. 금융위는 "흥국생명의 경영실적은 양호하며, 계약자에 대한 보험금 지급 등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회사"라고 강조한다. 흥국생명은 갚을 돈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시장 전문가들도 금융당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기류이다.

흥국생명의 계산법= 콜옵션 포기할 때 물어야할 추가금리보다 새 채권 금리가 더 높아

그렇다면 흥국생명은 왜 콜옵션을 포기했을까.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는 4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두 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박 교수는 “우선 보험회사는 일정 부분의 자기 지분을 가져야 하는 룰이 있는데, 그걸 한번에 갚아버리면 그 비율이 낮아져버리는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지분을 팔아서 콜옵션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 지분율이 법정하한선보다 낮아지는 문제점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는 지난 4일 CBS라디오에 출연해 흥국생명이 콜옵션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사진=CBS 유튜브 캡처]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는 지난 4일 CBS라디오에 출연해 흥국생명이 콜옵션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사진=CBS 유튜브 캡처]

두 번째 이유가 더 중요하다. 박 교수는 “기업은 다시 새 채권을 발행해서 기존 채권을 조기상환했는데 고금리 추세로 인해 새 채권을 발행할 때 금리가 콜옵션을 포기했을 때 물어야 하는 금리보다 높아진다”면서 “흥국생명으로서도 새 채권을 발행해서 콜옵션을 행사하는 것보다 콜옵션을 포기하고 추가 금리를 부담하는 게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선진국 정부들의 고금리 기조로 인해, 신종자본증권은 만기가 10년이지만 5년만에 조기상환된다는 시장의 관행 혹은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내년에 만기 도래하는 외화채권 규모 35조원, ‘콜옵션 포기’ 속출할 경우 대혼란 불가피

문제는 내년에 만기가 도래하는 외화채권 규모가 약 249억 220만 달러(약 35조 3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이다. 이는 올해 204억 3929만 달러보다 21.8% 증가한 수치이다. 흥국생명과 같은 콜옵션 포기가 잇따를 경우, 채권시장의 대혼란이 불가피해지고 결국 기업들의 채권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돈 가뭄’이 찾아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더욱이 한전은 올해 최대 40조원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공공기관채 발행에 나서고 있다. 한전과 같은 AA등급의 우량 공기업들이 채권시장을 독식할 경우, 일반 기업들은 채권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이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특히 글로벌 부동산 시장의 거품 붕괴가 본격화되면서, 상당수 건설 및 부동산 기업은 ‘돈 빌릴 곳이 없어지는’ 자금 경색 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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