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투르크를 무너뜨리기 위한 십자군은 바르나에서 패배했고, 비잔틴제국도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헝가리의 젊은 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성급하게 기병을 이끌고 오스만 투르크의 본진을 공격하다 죽은 것이 결정적인 패배원인이었다. 

 헝가리의 기병이 투르크의 좌측기병을 격퇴하자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무라드 2세도 위기를 느꼈다. 본진 좌우의 기마부대가 헝가리 군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본진만 덩그러니 고립된 구도가 되었다. 후퇴해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말을 탔지만 늙은 예니체리 병사가 고삐를 놓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에 생각을 바꾸어 하늘에 기도하며 항전을 결심했다. 마침 헝가리 왕이 투르크의 본진이 고립된 것을 알아채고 500명의 기병을 몰고 무라드 2세의 본진을 급습했다. 그때 헝가리 왕을 저지한 군대가 예니체리다. 이 보병부대가 철통같이 방어하지 않았다면 헝가리 왕의 돌진이 성공했을지 모른다.

  예니체리는 보병부대였다. 보병이 기병과 싸우는 것은 요즘 상황으로는 소총부대가 탱크 부대에 맞서는 격이다. 말들이 돌진해오는 상황에서 이에 맞서는 보병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순간적으로 엄청난 공포에 휩싸일 것이고, 오랜 경험과 냉정함, 규율이 없는 군대라면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아군 기병의 엄호가 없는 고립된 상황에서, 예니체리 보병들은 적 기병들의 돌격에 냉정하고 일사분란하게 맞섰다. 

  그 과정에서 헝가리 왕의 말이 창에 맞아 쓰러지게 되었는데, 투르크 역사는 무라드2세가 직접 던진 창이라고 하는데 진위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전투에서 투르크측을 승리하게 만든 결정적인 힘은 예니체리의 단호한 전투의지였다. 

  기독교 가정의 어린 소년이 최고의 충성집단으로

  예니체리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전투부대였다. 기독교 가정의 어린 소년을 징집하여 최고의 충성집단으로 만든 것이다. 확실하고 공정한 인센티브를 부여해서 공을 세우면 제국의 최고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면 용감히 싸웠고 평소에는 국내 치안과 술탄의 경호부대 역할을 담당했다. 예니체리가 새로운 세력으로 기득권세력을 견제하니 술탄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고위 관료나 고급 장교들의 아들이 세습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황제 이외에 정치세력화 할 수 있는 집단의 형성을 막았다. 그리고 제국 내 계층상승을 가능하게 하여 제국의 단결에 기여했으며 이슬람교의 확산을 도와 사회의 안정을 가져왔다.

  예니체리의 모델은 이집트의 맘루크  

  예니체리가 벤치마킹한 모델은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맘루크’라는 군사집단이었다. 파티마왕조는 튀르크 등 중앙아시아의 어린 노예를 데려와서, 카이로의 특수학교에서 전투기술과 행정을 가르치고 이슬람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기득권이 없어 왕에게만 충성하고 실력있는 전투 집단을 키우는 것이 목표였다. 맘루크는 십자군을 막아내고 이집트를 몽골족으로부터 방어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빼어난 전투역량 때문에 나폴레옹의 군단에 편입되기도 했다<나무위키>.

  오스만제국에서도 이교도 노예를 양육해서 권력층으로 만드는 이 방법을 모방했다. 정복지의 비(非)이슬람교 가정에서 8~12세의 어린이들을 징집해서, 투르크어와 이슬람교를 가르치고 적성에 맞춰 엄격한 교육과 훈련을 시켜서 새로운 군인이란 뜻의 예니체리를 만들었다<송병건, 중앙선데이 2016>. 처음에는 전쟁 포로 중에서 뽑았다고 하는데, 무라드 1세 때에 기독교도 소년 중에서 뽑아다 훈련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후 이 정책이 상당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 무라드 2세는 군대뿐만 아니라 관료충원 까지 기독교 소년의 징병제도를 적용하게 되었다. 원래 발칸 반도 일대에서 징집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점령지가 늘어나면서 징집 지역도 확대되어, 그리스와 유럽 동남부 지역에서 가장 활발히 실시됐다고 한다. 징집은 선발 담당 관리가 각 마을을 돌면서 8~12세의 소년들 중에서 일정한 테스트를 통해 뛰어난 소년을 선발했다고 한다. 징집대상에서 무슬림은 원칙적으로 제외되었고, 징집된 소년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터키어를 배우면서 각종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예니체리 출신자는 오스만 제국이 강성해지는 과정에서 튀르크부족장, 귀족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성장해 갔다. 이들은 쉴레이만 1세처럼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고 정복전쟁을 추진했던 15~16세기에 가장 강성했으나, 17세기 이후 이들이 고위직에 오르고 재산과 인맥 등으로 기득권자가 되어감에 따라 규율이 문란해지는 등 국가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기득권을 타파하는 집단에서 스스로 기득권자로 변모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듯이 예니체리도 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정치적 행위나 상업적 이익에 관여하기도 했고, 이들을 견제하고 개혁하려는 술탄을 폐위시키기도 하였다. 예니체리가 출세의 지름길로 인식되면서 예니체리가 되는 자격요건을 완화하고 지원제를 도입하였다. 예니체리의 결혼이 허가됨에 따라 자신의 아들을 입대시키는 예니체리가 늘어났고, 세습을 금지하는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687년 당시 6만 명이 넘는 예니체리 중에서 제대로 징집되어 온 인원은 백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아예 이교도 출신의 소년 징집제도는 1703년에 폐지되었다<나무위키>. 그 결과 예니체리는 허약해졌고, 제국의 군사력도 약화되었다.  
  기득권에 대항할 때는 제국의 융성을 가져왔으나 이 집단자체가 기득권자가 되는 순간 예니체리는 시들기 시작했고 제국도 힘을 잃었다. 교육의 힘이 대단히 위대하며 공정한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예니체리가 제대로 기능할 때는 공정한 시스템이 작동했다. 

  예니체리는 상식을 넘은 위험한 방식
 
  어쨌든 예니체리는 기적의 시스템이었다. 적국의 소년들을 교육시켜 술탄의 근위대로, 즉 가장 하층계급일 수 있는 집단의 소년들을 징집해서 최고의 권력집단으로 만든 것은 상식을 뛰어넘는 정책이었다. 전쟁에 패해 적대적 감정이 팽배한 지역이고, 다른 종교를 믿는 집단에서 정예군대를 모집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이들이 배반을 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알바니아의 영웅이 된 스칸데르베그가 대표적이다. 그는 알바니아의 세습귀족의 자제였으나 볼모로 잡혀가서 어릴 적부터 예니체리 교육을 받고 오스만 투르크를 위해 봉사했다. 공을 많이 세워 대단히 높은 지위에 까지 올라갔으나,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300명의 병력과 함께 투르크 군대를 탈영해서 기독교진영으로 귀화했다. 이러한 배반사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적군의 자녀를 최고의 정예 부대로 육성하는 방식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맘루크의 선례가 있었다지만 선례만으로 위험한 방식을 채택하기는 쉽지 않다. 또 투르크 귀족등 기득권 집단의 반발도 적지 않았을 텐데 이 제도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신에 대한 믿음이 risk-taking의 힘

  신에 대한 믿음이 이러한 위험부담(risk-taking)을 추진하게 한 힘이 아닐까. 이슬람교를 적대적인 종교 집단에 전도하려는 열망에서 타종교를 믿는 어린 소년들에게 물질적인 성공의 길을 열어준 게 아닐까. 그 과정에서 최고의 전사 집단을 확보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양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정책의 성공사례라 생각된다. 우리 정치도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이런 방식을 배웠으면 한다. 그러면 정쟁이 이렇게 치열해지지 않을 것이다.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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