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이 외화채권의 조기상환(콜옵션 행사)에 실패해 채권 시장에서 한국물(국내 기업의 외화표시채권)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신용등급 AAA의 한국전력공사 발행 채권(한전채)도 투자자를 채우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국내 금융사들은 물론 공공기관 발행 채권 전반에 자금경색이 확산되는 조짐이다.

더불어민주당 정일영 의원이 한전으로부터 제출받은 '회사채 유찰 분석'에 따르면 한전은 레고랜드 사태 이후인 지난달 17∼26일 네 차례에 걸쳐 1조2000억 원 규모의 채권 발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9200억 원만 응찰해 5900억 원 상당의 채권만 발행할 수 있었다.

가스공사와 한수원도 지난달 24일 2000억 원, 1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각각 발행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유찰됐다.

한전은 "레고랜드 사태로 금융시장이 급격히 경색되면서 유동성 급감, 투자심리 위축으로 채권 발행 예정량을 채우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한전은 천문학적 적자임에도 정부의 전기요금 인상 억제로 인해 채권으로 자금을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전채는 최근 3년간 유찰된 사례가 없었다.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는 데다 금리도 높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전채는 발행 규모(10조7500억 원)의 2.3배인 24조5000억 원이 몰렸다. 올해 한전채 응찰액은 발행 규모(24조5500억 원)의 1.8배에 그쳤다.

한전은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해외채권 발행을 고려 중이다. 아울러 은행 차입을 늘리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한전에 2조∼3조 원 규모의 은행 대출을 공급해 채권시장 유동성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다. 정부 여당은 한전채 발행 한도를 늘리는 것도 검토 중이다.

흥국생명은 최근 외화채권의 조기상환(콜옵션 행사)에 실패했다. 신종자본증권은 통상 자본 확충의 목적으로 발행되며 5년 내에 조기상환하는 것이 업계 불문율이다. 하지만 흥국생명이 이를 포기하면서 국내외 채권시장에는 국내 금융회사와 기업들의 재무 상태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액면가 100달러인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거래 가격은 4일 72.2달러였다. 콜옵션 미행사 공시 직전인 10월 말 가격(99.7달러)에서 27.6%나 급락했다. 동양생명 신종자본증권(2025년 9월 콜옵션 만기)도 지난달 말 83.4달러에서 이달 4일 52.4달러로, 우리은행 신종자본증권(2024년 10월 만기)도 87.5달러에서 77.8달러로, 신한금융지주 신종자본증권(2023년 8월 만기)도 96.6달러에서 88달러(3일 기준)로 각각 떨어졌다. 

국내 기업의 외화채권 인기가 떨어지면,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은 발행 금리 상승 등으로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 금융당국은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 주기를 최대한 겹치지 않게 하겠다는 방침이다. 당국 관계자는 "회사채 발행이 한꺼번에 이뤄져서 자금이 한쪽으로 쏠리면 다른 채권시장에 자금 공급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진기 기자 mybeatle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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