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은 국민 모두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남의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그 무엇보다 피 냄새를 좋아한다. 하나의 빗방울이 떨어져 폭우가 되고, 광란의 격류가 되어 대지를 집어삼키듯, 바야흐로 『군중과 권력』의 원리가 본격 작동하기 시작했다. 피 냄새에 환장한 하이에나들의 권력을 향한 발광이 개시되었음이 피부로 느껴진다.

#. ‘나’는 없다. 오로지 ‘우리’만 있을 뿐

부모를 잃으면 청산(靑山)에 묻고, 자녀를 잃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참혹한 근심을 얻는다는 뜻에서 참척(慘慽)이라 한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는 자식을 잃고 극도의 슬픔으로 인해 시력을 잃었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 고사를 통해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은 빛을 잃어 천지가 캄캄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에서 상명지통(喪明之痛)이란 사자성어가 등장했다.

미국 작가 트로브리지(John Townsend Trowbridge)는 “자기 갈 길을 떠나는 자식의 눈물은 하루밖에 안 가지만 뒤에 남는 부모의 슬픔은 오래 계속된다”는 말을 남겼다. 어떤 말로 그 슬픔을 달랠 수 있을까마는 먼저 이번 이태원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한국 현대사를 되돌아보면 대군중이 일시에 한 곳에 모인 사례가 허다하다. 1956년 제3대 대선 때 야당인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한강 백사장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고 외치며 선거 유세를 할 때 30만 인파가 몰렸다. 당시 서울 인구 160만, 유권자 수 70만 4,000명일 때의 일이다. 당시 신문보도에 의하면 이미 신익희 후보의 지방 유세 때 부산과 대구에서는 15만, 대전에서 2만, 인천에선 8만의 청중이 운집한 바 있다.

1971년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공원 유세 때 언론의 표현에 의하면 100만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광화문 촛불시위 때도 수십만 인파가 손쉽게 동원되었다. 지난 10월 8일 한강 불꽃놀이 축제에도 주최 측 추산 100만 인파가 불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가히 ‘군중의 나라’라 불려도 손색없는 모습이다.

한국인들은 잠시도 혼자 있으려 하지 않는다. 나 홀로인 상태가 두려운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끝없이 존재감을 확인한다. 이러다 보니 여러 곳에 소속되어 활발히 활동하는 행위는 ‘사회적 자산’으로 공인되어 형님·동생·선배·후배·동창·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능력자로 인정받는 세상이 되었다. 덕분에 한국인은 죽을 때까지 지연·학연·혈연의 얽히고설킨 인연의 울타리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그 많은 소속 집단의 모임이나 경조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 무리나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힘든 것은 물론이요,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 반열로 추락하는 수모를 각오해야 한다.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가족 내팽개치고 모임, 경조사에 기를 쓰고 참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화가 견고하게 정착된 사회이다 보니 나 혼자만의 시간을 내서 공부하고 사색하며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는 일 따위는 사치가 되어버렸다. 혼밥·혼술을 즐기다간 사회생활의 문제아, 외톨이, 아웃사이더, 루저로 낙인찍힌다. 이것이 보편적 한국인의 일상이다.

‘나’보다 ‘우리’가 더 자연스러운 심리상태, “우리가 남이가”라는 슬로건이 뜻하는 의미는 섬뜩하다. 집단의식, 집단문화, 패거리의 일원으로서의 ‘나’가 존재할 뿐,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은 존재할 공간이 없는 세상이란 뜻 아닌가.

#. 나의 생명과 안전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 기본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사고의 기승전결을 살펴보면 이태원 사고의 결말이 어느 곳으로 향할 것인지 대략 짐작이 간다. 애도 기간의 종료와 동시에 희생양이 설정될 것이고 그에 따른 정치공세, 여론몰이, 언론의 폭주와 선동이 마녀사냥식으로 펼쳐지게 될 것이다. 이 와중에 특정 세력이 그럴듯한 가짜 뉴스를 바이러스처럼 퍼뜨려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다.

문화계·언론계·정치권·학계·지식인 사회 모두 진영 논리로 뭉쳐 확증편향의 노예가 되어 버렸으니 광기의 질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는 현재로선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3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이태원 사고의 후폭풍은 오래도록 갈등을 야기하고, 그 에너지가 기존의 정치권력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권력을 탄생시키는 진앙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상식의 차원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이 동물의 일원이었다는 진화론에 근거하면 인간의 행동원리는 동물의 본능과 거의 동일하다. 동물 행동학의 기본 특성은 개체의 안전이다.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초감각적 지각(Extrasensory perception, ESP)을 발달시켰고,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본능, 일발필살로 상대를 제압하는 공격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위기는 피하는 것이 우선이고, 일이 벌어지면 수단·방법·감각과 지각을 동원하여 생존이 최선이다. 숨이 끊어진 후 수풀이 메말라서 천적에게 발견됐다거나, 비가 많이 와서 수심이 깊어진 탓이라거나, 같은 무리가 제때 도와주지 않아서 등등을 항의해봤자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인간의 세계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특정한 날, 특정 장소에 다수 인파가 모일 것이 예고되었다면 조심하는 것이 기본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이태원 그 비좁은 지역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인파가 집중되어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되면 사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청춘남녀들은 진공청소기에 먼지 빨려가듯 이태원으로 모여들었다.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의지에 따른 자연발생적 현상이었다. 기회만 나면 특정 장소에 수만~수십 만 군중이 비슷한 복장을 하고 집결하는 특이 현상은 사회학적, 혹은 문화인류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할 정도다.

이태원 압사사고 현장 인근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이태원 압사사고 현장 인근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이 와중에 합리적인 판단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가 일어났다. 게다가 희생자의 규모가 너무 크고, 사망자의 사연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쯤 되면 자칭 진보 인사들은 "모든 책임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사회·국가에 있으니 현 정권이 책임져라”라고 검은 리본 달고 거리로 나선다. 대통령 탄핵은 미증유의 사고를 사전 예방하지 못한 책임을 묻는 당연한 프로토콜이 된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 본다. 나의 생명과 안전은 내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기본이요 정상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에 대한 무한 책임과 해결책을 사회와 국가에 돌리는 것은 합당한가? 하긴, 문재인 정부의 국정지표가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였으니 그런 주장이 나올 법도 한데, 이 기회에 제대로 따져 보자.

대체 내가 언제 내 삶을 국가가 책임져 달라고 요구했나? 내 삶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국가가 5,000만 국민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공무 인력이 필요할 것이며, 그에 따르는 천문학적인 예산과 비용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합리적 이성과 분별력은 실종되고 철없는 사회 타령, 국가 타령이나 하면서 사회가 내 삶을 책임져 달라고 칭얼대는 정신적 발육 부진 상태. 이것이 21세기 중반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참모습이다.

#. 한국형 전체주의 파시즘의 탄생

대체 왜 한국인들은 개인적 사색이라든가, 나만의 공간, 가족이나 친구끼리 간소하게 즐기지 못하고, 비슷한 복장과 분장을 하고 한곳에 모여 집단의 일원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일까? MZ세대라나 뭐라나 하는 청년들은 대체 언제부터 자칭 진보주의자들이 ‘군사문화의 잔재’라고 저주를 퍼붓는 획일화된 복장, 규율과 질서, 문화에 그토록 순종적인 모드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일까?

우선 한국인이 여차하면 특정 장소에 모여 군중의 무리에 소속되길 즐기는 특수 현상부터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현재 인구 5,000만 중 서울에 950만, 경기도에 1,350만, 인천에 300만이 거주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모여 살다 보니, 인류가 밀집 거주하는 데서 발생하는 온갖 사건·사고와 모순이 폭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특성을 안고 있다.

게다가 고도로 발달한 대중 교통망, 심야에도 범죄 걱정 없이 통행 가능한 치안 상태, SNS의 일상화 등이 개인을 군중화 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개인의 군중화’ 현상, 그 적나라한 표출은 2002년 월드컵에서 그 진수를 보여주었다.

세계인의 기억 속에 2002년 월드컵은 붉은 악마(Red devil)의 집단 응원으로 각인되어 있다. 다수의 한국인이 ‘빨갱이가 되자(Be the red’s)’라는 선동적 문구가 새겨진 붉은 티셔츠 입고 시청 앞 광장을 비롯한 곳곳에 모여 집단 응원의 신세계를 보여주었다.

2002년 당시의 월드컵 거리 응원은 한국형 전체주의 파시즘 탄생의 서곡이었다.
2002년 당시의 월드컵 거리 응원은 한국형 전체주의 파시즘 탄생의 서곡이었다.

천성이 자유주의자이고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스타일인 필자는 월드컵 당시 곳곳에서 판이 벌어진 집단 응원 모습을 보면서 한국인들의 자기희생적 응원 문화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에선 의문이 들었다. 거실에 차분히 앉아 혼자서, 혹은 가족과 함께 경기를 즐기는 게 아니라 비용 들여 붉은 티셔츠에 머리띠, 스카프 착용하고 수많은 인파에 파묻혀 다 함께 구호를 외친다? 아무리 축구가 좋고, 월드컵 16강이 염원이라 해도 이건 도가 지나친 현상 아닌가?

필자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한국인의 행동양태에 대한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 필자는 사회학자, 심리학자, 문화인류학자, 정치학자 등과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응원에 열광하는 군중의 의미가 무엇인지 대화를 나눠보았다. 당시 전문가들이 분석한 요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한국인의 열광적 응원은 그 목적이 순수한 열정에서 월드컵 1승, 16강을 넘어 4강 진입이라는 승리 기원으로 모아지고 있으니 긍정적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처럼 응집된 에너지가 축구가 아닌 분야, 예를 들면 정치적 갈등이나 사회적 이슈, 이념 문제와 결합되면 광적인 군중심리로 돌변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군중심리를 컨트롤할 수 있는 합리적·이성적·논리적 감수성이 현저히 부족하다. 집단 군중을 설득하거나 통제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없다. 그런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 원로나 지도자, 존경받는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군중심리로 형성된 폭발적 집단 에너지는 통제 불능의 상황이 되어 기존의 시스템과 제도, 법치마저 단숨에 파괴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2002년 월드컵 길거리 응원은 한국형 전체주의 파시즘 탄생의 서곡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이후 발생한 여중생 장갑차 사고, 광우병 소동, 천안함 폭침, 세월호 사건, 촛불시위 과정에서 한국인은 군중 에너지 발산의 핵심 본질을 유감없이 경험했다.

특정 이념과 정치 세력의 기획, 분위기 조성, 혹은 선전 선동이 개입했는가의 여부는 차후의 문제다. 군중은 ‘집단의 일원’이라는 익명의 그늘 에 숨어 아낌없이 에너지를 발산했고, 이 과정에서 폭력, 파괴 같은 일들이 거리낌없이 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법적 책임도 지지 않았다. 급기야 촛불로 달궈진 군중 에너지는 합헌적 정부를 파괴하고 좌익 전체주의 정권 출범이라는 미증유의 일마저 거침없이 자행했다.

#. ‘개인’ 형성에 실패한 나라

군국주의 일본이 패전한 후인 1946년, 일본 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요지는 일본의 근대화는 위로부터 주도된 형식적 근대화였을 뿐, 양심에 매개된 자율적 개인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본에는 내면을 지닌 개인과 개인 사이의 수평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명령과 복종에 따르는 수직적 위계만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논문에 근거할 경우 한국은 어떤 상태일까? 한국인은 오랜 기간 유교(주자성리학)의 세례를 받아 극도로 교조화, 원리주의화 된 집단문화에 익숙해진 존재들이다. 유교(주자성리학)의 기본 원리는 공(公)은 의로운 것이요, 사(私)는 버려야 할 것, 악의 상징이었다. 주자성리학의 천국 한국은  ‘개인’이란 개념조차 불분명한 사회였다.오로지 지연·학연·혈연, 혹은 문중에 속한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개인만 존재했으니, 군국주의 일본의 상황보다 더 끔찍한 개인 말살의 사회였다.

근대 국가로 출범한 대한민국 시대에도 ‘개인’의 가치와 의식, 철학과 가치관은 교육의 대상에서 예외였다. '개인'에 대한 교육 부재 현상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 결과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의 존재는 휘발되고, 손쉽게 군중심리에 휩쓸려 ‘집단의 힘’에 자신의 자아를 수렴시키는 부평초 같은 떠돌이 인간군상이 양산되었다.

이런 사회적 특성에 젖어 살다 보니 ‘개인의 자유’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을 추구하는 사람은 천연기념물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절대다수는 틈만 나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받기 위해 군중에 휩쓸려 원초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군중의 일원에 소속되어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 너무나 편안한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 군중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파헤친 엘리아스 카네티

노벨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이란 명저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카네티는 군중의 행동 양태를 깊이 연구한 후 네 가지 특징을 발견해 냈다.

첫째, 군중은 언제나 성장하기를 원한다. 즉, 군중은 생겨나는 그 순간부터 더 많은 사람이 가세하길 바란다.

둘째, 군중의 내부에는 평등이 지배한다. 즉, 군중은 평등 이외의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셋째, 군중은 밀집 상태를 사랑한다. 그 무엇이 내부 틈새로 끼어들어 군중을 갈라놓는 것을 참지 못한다.

넷째, 군중은 하나의 방향을 필요로 한다. 군중은 항상 동적이다.

군중을 이루면, 그 집단은 더 확장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평등을 기본 원리로 삼으며,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군중심리에 의해 운동 에너지가 거칠게 발산된다. 그러한 운동 에너지가 폭력과 파괴의 원천이 된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군중과 권력의 관계를 냉혹한 시선으로 꿰뚫어보게 된 계기는 그가 유태인으로 태어나 독일에서 공부하며 ‘군중’의 추악한 속성을 적나라하게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현대인의 불안이 군중을 만들어냈고,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군중 에너지를 컨트롤하여 권력 장악의 기회로 삼아 역사를 망쳐왔다고 분석했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현대인의 불안이 군중을 만들어냈고,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군중 에너지를 컨트롤하여 권력 장악의 기회로 삼아 역사를 망쳐왔다고 분석했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모든 권력은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에서 나온다고 설파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끈질기면서 교활한 본성을 갖게 됐다. 그 본성은 평화로운 방식이 아닌, 공격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생존하기 위해 타인과 군중을 형성한다. 그렇게 형성된 군중을 카네티는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특정한 희생자를 공격하기 위해 모이는 추격 군중. 혁명 시기에 벌어지는 공개처형, 마녀사냥, 인민재판에 열광하는 군중을 상상하시기 바란다.

둘째, 생명이 위험할 때 형성되는 도주 군중.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발생할 때 탈출을 위해 이동하는 군중이 이 부류에 해당한다.

셋째, 뭔가를 금지당했을 때 형성되는 금지 군중. 파업 등이 그 전형적 사례다.

넷째, 울분과 기대가 폭발하는 순간 형성되는 혁명 군중.

다섯째, 카니발이나 월드컵 등의 행사 때 거리에 몰려드는 축제 군중. 이들은 위계질서나 도덕적 금기가 느슨해지고 그들 사이에 긴밀도가 높아져 생명 증식이 쉽게 이루어진다.

여섯째, 대립하는 두 편으로 갈려 형성되는 이중 군중. 아군과 적군, 좌익과 우익 같은 식으로 형성되는 군중으로 의회와 스포츠 등에서 종종 형성된다.

카네티는 현대인의 불안이 시시때때로 군중을 만들어냈고,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그러한 군중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컨트롤하여 권력 장악의 기회로 삼아 수없이 역사를 망쳐왔다고 분석해 냈다.

#. 군중은 거칠게 퍼붓는 폭우, 광란의 바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을 집필하기 전에 『현혹』이라는 저작을 통해 군중의 속성을 보다 적나라하게 형상화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의 독특한 세계와 언어, 환상과 생각에 젖어 있어 상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자신의 상대를 이해하는 능력이 없어 상대를 제멋대로 판단하고, 그것을 기정사실로 믿어 버린다. 그러한 인간 군상이 집단을 이루어 군중을 형성한다. 그렇게 형성된 군중의 속성이 무엇인지 카네티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는 군중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여전히 소위 개인으로 살고 있다. 군중은 거칠게 퍼붓는 폭우가 되어, 모든 물방울이 모여 같은 물방울이 되려고 하는 유일무이한 광란의 바다가 되어 자주 우리를 덮친다. 군중은 또 대체로 곧바로 흩어져버리곤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다시 불쌍하고 고독한 악마가 된다.

우리는 옛날에 우리가 그렇게 많았고, 그렇게 컸으며 그렇게 하나였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머릿속에 이성을 너무 많이 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질병은 인간 속에 있는 야수”라고 설명하고, 말 잘 듣는 어린 양들을 달래지만, 그것이 얼마나 진리에 가까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안에 있는 군중이 새로운 공격을 준비한다. 언젠가는 군중이 결코 흩어지지 않는 때가 올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한나라에서 생기고, 이 나라에서 아무도 군중을 의심하지 않을 때까지 주변을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너도, 그도 없고 오직 그들, 군중만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카네티가 설파한 군중의 모습과, 여차하면 모여서 집단 에너지를 발산하는 한국의 군중을 비교 연상해 보시길 권한다.

마지막으로 사족(蛇足) 같은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한다. 1987년 9월 23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우먼즈 오운(Woman’s Own)’이란 잡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너무나 많은 어린이들에게 잘못 가르쳤다고 생각합니다. ‘내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줘야 한다’, ‘내게 문제가 있지만 정부가 지원을 해줄 것이다’, ‘나는 집이 없다. 정부가 집을 마련해줘야 한다’라는 식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사회에 전가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회가 누구예요? 사회? 그런 건 없습니다. 개인으로서의 남자와 여자가 있고, 가족들이 있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먼저 스스로를 도와야 합니다. 스스로를 돕고 이웃을 돕는 것은 여러분들의 의무입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보다는 ‘집단에 속한 익명의 군중’을 선호하는 한국인들은 “사회, 그런 건 없다”라고 외친 대처 총리의 명언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때가 왔다.

이태원에서 비극적인 사건은 국민 모두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남의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그 무엇보다 피 냄새를 좋아한다. 하나의 빗방울이 떨어져 폭우가 되고, 광란의 격류가 되어 대지를 집어삼키듯, 바야흐로 『군중과 권력』의 원리가 본격 작동하기 시작했다. 피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의 권력을 향한 발광이 개시되었음이 피부로 느껴진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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