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바르나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사망하면서 5살의 라슬로 5세가 헝가리 왕이 되었고, 당시 헝가리 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후녀디 야노시가 섭정이 되었다. 헝가리도 우리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 언어군이라서 그런지 앞의 후녀디가 성이고 야노시가 이름이다. 변변치 않은 가문 출신인 후녀디 야노시는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헝가리군의 총사령관까지 올랐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투르크인들은 아이들이 울어댈 때 호랑이 대신 ‘얀쿠스 라인(후녀디 야노시의 터키 발음)’이 온다고 했다 한다. 헝가리를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지켜낸 공로로 그의 사후에 아들이 헝가리 왕 마차시 1세로 옹립되었다.

  바르나 전투는 십자군 측에서는 너무나 아쉬운 전투였다. 거의 다 이긴 전투를 젊은 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패배했기 때문이다. 후녀디 야노시는 바르나 전투 이전에는 투르크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고, 투르크 군의 장 단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꼭 설욕하고 싶었다. 당시는 장군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왕의 섭정으로 헝가리를 사실상 통치하는 군주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이 모든 전투 상황을 통제할 수 있게 되어, 바르나 전투 때처럼 왕의 실수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투르크 군을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바르나 전투 후 4년이 지나 무라드 2세가 알바니아의 반란자 스칸데르베그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하자, 후녀디 야노시는 이때다 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발칸 주민들의 반란을 유도하고, 스칸데르베그와 힘을 합친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무라드 2세는 두 군대가 합세하기 전에 각개격파하기로 계획한 듯하다. 스칸데르베그를 저지할 일부 군대만 남겨두고 자신이 직접 4만 대군을 강행군시켜 헝가리 군이 오고 있는 세르비아의 코소보지역으로 나아가 후녀디를 기다렸다. 

  무라드2세의 각개격파 전략

  알바니아의 지도자 스칸데르베그는 후녀디의 헝가리 군에 합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세르비아의 군주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방해 때문이었다. 세르비아는 오스만 투르크 편에 서 있었다. 무라드 2세는 바르나 전투 직전의 니시전투 등에서 십자군에 패배하자 세르비아의 영토를 반환하는 등 평화협정을 제시했는데, 헝가리군 등 십자군은 협정을 깨고 바르나전투를 일으켰지만 세르비아는 평화협정을 지키며 바르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세르비아 왕 주라지는 어렵사리 얻은 세르비아 지역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번 전쟁도 반대하였다. 이에 후녀디 야노시는 그를 적으로 간주하고 세르비아국의 북부를 약탈하며 진군하였고, 이에 주라지는 오스만 술탄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헝가리군의 동태를 일일이 술탄에게 보고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비밀병기에 무너지다

  10월 17일 양군은 코소보 벌판에서 마주쳐 접전을 벌였는데, 헝가리 군이 오스만 군의 측면을 기병대로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측면을 공격하던 기독교군이 오스만 투르크의 경기병대에게 패하여 후녀디의 본영으로 물러나자, 후녀디는 기사들과 경보병대로 이루어진 본대를 이끌고 무라드 2세의 본진에 공격을 가했다. 앞을 가로막던 예니체리(janissary) 군단은 이 공격에 무너지고, 헝가리 기병대는 오스만군의 중앙을 돌파하였으나, 오스만군의 본진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예니체리 군단이 술탄 스스로 직접 지휘할 경우, 전열이 일시 흐트러지더라도 궤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편 이렇게 예니체리가 초반에 쉽게 무너진 것은 무라드 2세의 속임수라는 주장도 있다. 일부러 밀리는 척하면서 포위하는 전략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투르크 군은 4륜 우마차 (바겐)를 활용한 바리케이드로 본진을 방어하고 있어 헝가리기병이 돌파하기 힘들었다. 마차를 이용한 바리케이드는 바겐부르크(Wagenburg, 수레로 만든 요새)라 불리는데 바르나 전투때 헝가리 군이 사용했던 기술이다. 무라드2세는 바르나 전투에서 바겐부르크wagenburg의 유용성을 확인하고 곧장 오스만 군대에 적용하여 4년 뒤에는 똑같은 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야만족이라 깔본 투르크의 학습능력이 대단히 뛰어났던 것이다<무라드 2세의 군사교리 개혁 arşiv-i sema>. 
  후녀디가 지휘하는 본대의 공격이 실패하자, 오스만군은 반격에 들어갔고 지친 헝가리군은 그들의 본영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예니체리는 퇴각하는 수많은 헝가리 기병들을 살해하였다. 
  후녀디는 패하여 도망치는 중에 세르비아인들에게 붙잡혀 다시는 세르비아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함께 후녀디의 둘째 아들인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를 주라지의 조카딸과 결혼시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에 발칸의 기독교 국가들은 더 이상 오스만 제국에게  저항할 힘을 잃게 되었다.

  외교의 실패 

아무래도 이번 코소보 전투는 후녀디의 충분한 준비 없이 추진된 듯하다. 후방에 아무런 예비대를 두지 않고 부대를 이끌었고<위키백과>, 외교적인 실책도 저질렀다. 세르비아가 전쟁에 반대하고 있는데 이를 강행한 것이다. 그 결과 세르비아를 투르크 편으로 돌려 헝가리 군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고 스칸데르베그와의 협공도 불가능해 졌다. 아무래도 복수심에 눈이 멀어 서둘렀다는 느낌이다. 

너무나 힘겨운 상대 무라드2세

  더욱이 상대방인 무라드 2세는 개인적인 수양 면이나 전쟁수행능력 모두가 탁월한 황제로 너무나 힘겨운 상대였다. 
“무라드는 공정하고 용맹스러운 군주이며 위대한 영혼을 가지고 끈기있게 노력했으며, 박식하고 관대하며 신앙심이 깊고 자비로운 군주였다. 또한 학문에 힘쓰는 사람과 과학이나 예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고 적극 장려해 주었다. 그는 훌륭한 황제이자 동시에 위대한 장수였다. 어떤 사람도 무라드보다 위대한 승리를 많이 거두지는 못했다<에드워드기번, 로마제국쇠망사>.” 투르크의 어느 역사가의 기술이다. 전제군주 시대로 다소 과장은 있겠지만, 책임질 줄 아는 자세와 국가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전쟁터로 나아간 군주였다.     
  바르나 전투 직전 평화협정을 제시하고 나서 그 책임을 자신에게 물어 왕좌에서 물러나서 수도원에서 수피들과 기도와 명상으로 일상을 보내다가 국가가 위태로울 때 전투에 불려나왔다. 바르나 전투 이후에도 왕좌에서 물러나 수도원에 돌아갔으나 어린 술탄의 지휘에 병사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다시 속세로 나오게 되었다. 

  군사기술 혁신에 뛰어났던 군주

  군사 기술 개혁도 많이 단행하였다. 무라드2세는 예니체리의 무기로 총을 받아들였고, 오스만군이 소형이나마 대포를 사용하도록 했다. 또한 아나톨리아 반도의 튀르크인들을 대상으로 우리의 예비군과 비슷한 비정규군인 아자프(Azap)를 창설해서 전쟁이 날 때 신속히 동원토록 했다. 이교도 소년을 징집해서 충원하는 제도를 예니체리 뿐만 아니라 관료에도 확대했다.  전술했듯이 이동식 요새인 바겐부르크(Wagenburg)기술을 도입했고, 대규모화해서 위력을 더했다. 군주가 똑똑하면 혁신이 대단히 빨리 일어나는 것 같다.
  한편 그는 평화를 사랑했다. 상대방이 선제공격을 하거나 도발하지 않는 이상 좀처럼 전투를 벌이지 않았으며, 적이 항복을 하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천금과 같은 위력을 지녔고, 협정은 반드시 준수했다. 비잔틴 제국의 요하네스 황제가 서방 교회의 도움을 얻기 위해 이탈리아의 공의회에 참석할 때에도 무라드 2세와 상의했는데, 술탄은 황제가 궁전을 비워도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을 안전하게 방어해 주겠노라고 안심시켰다고 한다<에드워드 기번>. 투르크를 막기 위한 군사적 도움을 청하러가는 황제가 술탄과 상의한 것이다. 아마 황제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사이에 무라드가 공격하지 못하도록 다짐을 받으려 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무라드의 말은 천금과 같이 무거웠고 믿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바르나와 코소보 전투에서 승리하고서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11세의 즉위를 승인하고 화평조약까지 맺었다. 
  나라가 융성할 때 신은 훌륭한 지도자를 주는 것 같다.

  험난한 대통령의 길

  대한민국이 짧은 기간 내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은 지도자들이 훌륭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농지개혁을 완수하고 6.25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이승만 대통령, 산업화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 산업화의 궤도를 잘 유지하여 최초로 경상수지 흑자를 이룬 전두환 대통령 등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다만 우리국민들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에 대단히 인색하다. 현직에 있을 때는 독재자란 비난을 받았고 사후에도 그들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같다. 참으로 대통령의 길은 험난하다./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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