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를 아는 사람이라면 슬리퍼를 손에 들고 다니지도, 공식 석상에 슬리퍼 바람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것도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 자신은 대통령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센 사람이라고 과시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는 순간 우스워지고 격이 떨어지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다. 품위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에 대한 존중과 절제이기 때문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언제부터였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단지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품위를 지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찌 보면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진정한 품위와는 관련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품위있는 일이라고 스스로 여겼던 일들을 지키려 많은 노력을 해왔다.

이를테면 이런 일들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도 비를 피하기 위해 신주머니를 머리 위에 얹고 뛰지 않았다. 아니 웬만한 비쯤에는 아예 뛰지도 않았다. 우산을 써도 학교에 도착하면 옷이 흠뻑 젖어버릴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날, 다른 아이들은 윗도리는 교복을, 아랫도리는 체육복을 입는 당시만 해도 묘한 차림으로 돌아다녔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단정한 교복 차림을 유지하고 내 체온으로 젖은 옷을 말렸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겨울철 교실에 들어서면 오버코트를 벗어서 걸상 옆 팔걸이에 걸도록 가르쳤다. 그것도 코트를 뒤집어 걸라고 했다. 정말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겨울마다 그대로 행했다. 조금 춥다고 교실에서 오버코트를 둘러쓰고 있는 것은 품위 없는 행동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규칙 위반을 지적할 교사가 없는 예비고사 시험장에 가서도 나는 오버코트를 가지런히 뒤집어 걸상 팔걸이에 걸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것이 품위 유지의 기본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 불 구경, 싸움 구경이라고 하지만 나는 불 구경은 물론 싸움 구경하러 우르르 몰려가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길거리에서 큰소리 내며 싸우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거니와 웬만하면 바르고 정확한 말과 글을 사용하려고 최선을 다해 왔다. 화급한 상황이 아니면 무단횡단하지 않고 아무 데서나 넘지 말아야 할 차선을 침범하지 않는다. 설거지할 그릇 수에 상관없이 냄비나 프라이팬째 식탁에 올리지 않으며 음식을 허겁지겁 게걸스럽게 먹지 않는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의 통화는 간단히 하고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집 밖 내게서 생긴 쓰레기는 내 주머니나 가방에 넣었다가 반드시 버릴 수 있는 장소에 버린다. 무엇보다 악의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으며 한번 내놓은 주장을 뒤집을 때는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이 변명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성의는 보이는 것이다. 이것들은 내가 정한 나에 대한 규칙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박세리 선수가 초보 골퍼들과 함께 라운딩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본 적 있다. 함께한 이들은 골퍼로는 초보였지만 다른 종목에서는 베테랑을 넘어 레전드급인 선수들이었다. 거의 골프는 처음 쳐보는 한 선수가 공을 못 맞추고 헛방을 쳤다. 그와 같은 팀을 이뤘던 다른 멤버들이 연습 스윙을 한 번 더 한 것이라고 우겼다. 이때 박세리 선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운동 선수였잖아? 너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해.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내가 생각하는 품위 있는 행동은 이런 것이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자신의 판단으로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 설사 그것이 자기 혼자 만든 규칙이라도 어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그런 자신에 자부심을 갖는 것.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품위라는 말 자체가 아예 자취를 감춘 듯하다. 품위를 가르치는 사람은 물론 그것을 논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텔레비전에서는 작은 생선을 두 손으로 들고 뜯어먹는 장면이, 씹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을 입안에 쑤셔 넣는 장면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렇게 먹어야 제맛이라는 해설도 곁들여진다. 언제부터 우리 음식 문화가 그렇게 비루하고 천박해졌는지 알 수 없다. 비속어나 비문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은 아나운서든, 일반 연예인이든, 자막이든 차이가 없다. 그래도 방송에서 바른 한국어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옛일이 되고 말았다. 금세 드러날 거짓말을 일삼고 앞뒷 말을 빈대떡 뒤집 듯 뒤집고 해명도 안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전동 킥보드나 대여 자전거를 길 한복판에 넘어뜨려 팽개치고(?) 가는 것은 물론 과자 껍데기나 음료수 캔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길에다 버린다. 앞 머리카락에 헤어롤을 감은 채 집 밖으로 나서는 모습은 더 이상 신기하지도 않다. 대통령의 파면을 발표하는 중차대한 일을 하러 집을 나서는 재판관이 머리에 헤어롤을 매단 채 대중 앞에 나타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이 모든 일이 품위 없는 행동이다. 품위를 모르는 사람은 부끄러움도 모른다.

 

개성이 존중되는 요즘 세상에 품위 같은 구 시대 유물을 왜 들먹이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많은 일에 품위의 유무는 연결되어 있다. 품위를 존중하고 유지하려 노력하는 분위기가 사회 밑바닥에 깔려 있다면 언어가 훼손되는 것이나 예절이 엉망이 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저마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바른 말 고운 말을 쓰고 알아서 예의 바른 언행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품위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품위 있는 언행을 하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일일이 하나씩 가르치지 않아도 웬만한 질서는 잡힌다. 수많은 사고가 품위 없는 행동과 방심에서 촉발된다. 엘리베이터나 출렁다리에서 재미로 발을 구르는 일, 인파가 몰린 곳에서 장난 삼아 앞사람을 밀치는 행위들이 커다란 참사를 부르기도 한다. 품위는 스스로에 대한 존중이며 절제이다. 일단 품위를 지키기 위해 하지 말라는 짓을 하지 않으면 사회의 많은 위험이 사라질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많은 중고등학생이, 특히 남학생들이 등굣길에 삼선 슬리퍼를 손에 덜렁덜렁 들고 다닌다. 특정 브랜드의 검정색 바람막이를 입듯이 그것도 유행인지도 모르겠다. 신주머니를 들고 다니는 것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유치한 짓이라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신주머니를 가방에 넣자니 더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손에 들고 다니는 걸지도 모르겠다. 부모도 교사도 이를 말리지 않는지 그들은 거침이 없다. 슬리퍼 들었던 손은 깨끗이 씻을지 쓸데없는 의구심도 든다.

삼선 슬리퍼를 손에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품위를 배우지 못한 세대가 사회에 나가면 아무 데나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서는 행태를 거리낌 없이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 품위를 아는 사람이라면 슬리퍼를 손에 들고 다니지도, 공식 석상에 슬리퍼 바람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것도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 자신은 대통령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센 사람이라고 과시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는 순간 우스워지고 격이 떨어지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다. 품위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에 대한 존중과 절제이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나는 사원이 200여 명에 달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였는데 어느 날 점심 식사 후 귀사 시간 엄수, 슬리퍼 신고 사무실 밖에 다니지 말 것등의 지침이 내려졌다. 당시 우리 부서의 부장이 부서원을 모아놓고 이 지침을 전달했다.

이런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다 스스로 알아서 하겠지만, 이건 뭐 어린애들도 아니고. 이렇게 빡빡하게 어떻게 회사 생활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오래가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괜히 시범 케이스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기를 당부합니다.”

그 부장의 말에는 귀사 시간을 안 지키거나 슬리퍼를 신고 외부로 돌아다니는 것을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린애들도 아닌데 이런 지침을 내린 것에는 나도 불만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무조건 지키라든가 그까짓 무시하라는 말보다는 훨씬 설득력 있었다.

그런데 삼선 쓰레빠기자가 소속한 방송사에서는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 슬리퍼를 끌고 나타나 고성을 지른 그 기자에게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었다며 상을 주었다 한다. 회사도 그 기자와 같이 품위 없는 쓰레빠수준임을 만천하에 고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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