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이 벌어지면 수많은 기자가 벌떼같이 달려들어 저주의 굿판을 벌인다. 경쟁하듯 쏟아낸 기사들은 ‘언론’이라는 정화조를 거쳐 사실로 둔갑하여 인터넷이나 SNS를 타고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그 결과 ‘디지털 인민재판’이나 다름없는 인격 살인 행위가 곳곳에서, 너무 자주 벌어진다. 한국 언론은 남의 약점을 잡아 추문을 폭로하는 '쓰레기 들추기 저널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회의 흉기, '펜을 든 강도'로 타락했다.

#. 언론사인가, 범법 집단인가?

야당 국회의원과 유튜브 매체의 폭로를 통해 한동안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대통령, 법무부 장관의 심야 술자리 파동 진위 공방이 경찰 수사를 통해 확실하게 밝혀졌다.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이 유명 법무법인 변호사 30여 명과 심야에 여성 첼리스트가 연주하는 청담동 고급 술집(Bar)에서 술판을 벌였다는 야당 의원과 시민언론 더탐사의 문제 제기는 가짜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유튜브 시민언론은 법무부 장관의 자택(아파트) 앞에서 10여 분 생중계를 하면서 한 장관의 자택 호수를 의도적으로 노출했고,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등 내부로 무단 침입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자택 주소와 장관 가족 이름까지 공개해버렸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아파트의 현관과 복도 등 공동공간에 무단 진입하는 행위는 주거침입죄의 기수(旣遂, 범죄에 대해 그 범죄가 완성된 것을 뜻함)에 해당한다. 형법상 2명 이상이 같이 주거침입을 했을 경우 특수주거침입죄가 성립되어 5년 이하 징역에 처할 수도 있다.

언론은 사실 보도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취재기자는 계좌추적권이나 수사권, 통신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법적 자격이 없다. 따라서 취재 과정에서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건전한 언론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최대한 극복하기 위해 단계별 게이트 키핑(gate keeping) 절차를 거치도록 하는 등 부단히 노력한다.

더탐사의 대통령·장관 술판 보도는 야당 의원과의 기획·공모 과정이 있었음이 드러나면서 통념적으로 존재했던 언론 상식을 간단히 초월해 버렸다. 이번 파동은 취재기자의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가짜 뉴스 생산이라고 비난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으로 발전한 것이다. 

#. 실종된 언론의 감시·비판·견제 기능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철학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권력은 없으며, 모든 정부는 감시받아야 한다는 믿음이다.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에 대한 언론의 감시·비판·견제 기능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언론이 감시와 비판을 통해 정당한 권력 행사가 되도록 유도해야 건강한 민주주의가 정상 작동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 언론은 본연의 기능이 고장 나 버렸다. 특정 소수 언론만 그런 게 아니라 진보와 보수, 좌우 진영, 사주(社主)가 있는 민영 언론은 물론이요,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공영방송마저 불편부당(不偏不黨), 시시비비, 가치중립의 성역을 무시로 벗어나 제멋대로 활보하는 언론 디스토피아 세상이 전개된 것이다.

대통령, 법무부장관이 변호사 30여 명과 심야에 술판을 벌였다고 가짜 뉴스를 보도한 유튜브 매체.
대통령, 법무부장관이 변호사 30여 명과 심야에 술판을 벌였다고 가짜 뉴스를 보도한 유튜브 매체(사진: 시민언론 더탐사 화면 캡처).

그들은 공동체의 지속 성장과 건전한 유지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속 진영의 이념과 상업적 이익의 추구를 위해 움직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진다. 이런 아비규환의 혼란 상황에서 언론의 정도(正道) 운운하는 것 자체가 지나친 이상 추구 현상 아닐까?

#. 가짜 뉴스의 끝판왕, 한국 언론

한국 언론의 가짜 뉴스 양산 시스템은 그 역사가 매우 깊다. 몇 가지 대표적 사례를 소개한다.

한국인의 기억 속에 헤이그 밀사 사건이 깊게 각인된 이유는 애국 투사 이준 열사의 장엄한 죽음 덕분이다. 그런데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 발간하는 대한매일신보는 이준 열사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장 입장을 거절당하자 “이준 씨가 분기를 이기지 못해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열혈(熱血)을 뿌려 만국을 경동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8일 호외)라고 할복 자결설을 보도했다. 황성신문도 “이준 씨는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자기 복부를 할부(割剖)하였다는 전보가 도래하였다는 설이 유(有)하더라”(「황성신문」, 1907년 7월 19일)라고 맞장구를 쳤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 묘역. 그는 평화회의장 입장이 거절되자 항의하기 위해 할복 자결한 것이 아니라 종기 제거수술 과정에서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대한매일신보가 가짜 뉴스를 보도하여 이준의 사인을 전 국민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 묘역. 그는 평화회의장 입장이 거절되자 항의하기 위해 할복 자결한 것이 아니라 종기 제거수술 과정에서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대한매일신보가 가짜 뉴스를 보도하여 이준의 사인을 전 국민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준 열사의 사인(死因)은 회의장 입장이 거절당하자 항의하기 위해 할복 자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뺨에 난 종기 제거 수술 도중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사망한 것이다. 일본 측 정보 보고서에도 이준이 헤이그에서 단독병(丹毒病)으로 사망하여 호텔 사환과 동행했던 1인이 장례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독병이란 연쇄상구균에 감염되어 피하조직과 피부에 병변이 나타나는 급성 접촉성 전염 질환이다.

이준의 사망 원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자 국사편찬위원회는 1956년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사실관계 추적에 나섰다. 그 결과 베델의 동료였던 양기탁으로부터 “내가 신채호·베델과 협의하여 이준의 죽음을 민족적 긍지로 삼아 만방에 선양할 목적으로 할복자살로 꾸며내 보도했다”라는 내용을 확인했다. 이준의 할복자살은 조작된 가짜 뉴스였음을 실토한 것이다.

#. 만보산 사건으로 인한 화교 살해 폭동도 가짜 뉴스가 촉발

1931년 7월 2일, 조선일보는 ‘만보산에서 많은 조선인이 부상 당했다’라는 호외를 발간했다. 동아일보도 다음날 관련 기사를 대서특필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만보산 사건은 1931년 7월 창춘 인근 만보산(萬寶山) 일대에서 조선인 180여 명이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수전(水田)을 개발하기 위해 중국인 경작지를 가로질러 관개용 수로를 판 것이 발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를 당한 중국 농민과 조선인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이 내용을 조선일보가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다수의 한인이 중국인의 공격을 받아 부상당했고, 조선 농민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라는 오보를 한 것이다.

만보산 사건에 대한 가짜 뉴스를 보도하여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 142명이 살해당하고 542명이 중경상을 입도록 만든 조선일보의 기사.
만보산 사건에 대한 가짜 뉴스를 보도하여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 142명이 살해당하고 542명이 중경상을 입도록 만든 조선일보의 기사.

문제의 가짜 뉴스에 자극받은 조선인들이 복수를 외치며 한국에 진출한 화교를 공격하고 나섰다. 조선인들은 도끼와 곤봉으로 무장하고 화교 상점과 거주지를 파괴·약탈·방화하고 중국인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등 전국적인 대폭동으로 번졌다. 특히 평양의 화교 사회가 큰 피해를 당했다.

당시 조선인 폭도들의 만행을 목격한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 피에 굶주린 이리떼처럼 화교를 공격했다”라고 증언했다. 7월 8일까지 화교는 사망자 142명, 중상자 542명, 실종 91명의 인명 피해와 함께 250만 원이라는 엄청난 재산 피해를 봤다. 1931년 말까지 3만여 명의 화교가 폭동을 피해 보따리 싸서 귀국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인들은 복수를 위해 만주나 중국 일대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를 습격하여 큰 피해가 발생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상해 임시정부는 중국 진출 조선인에 대한 반감을 무마하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군 지휘부를 폭사시키는 의거를 단행한 것이다.

#. 김일성 사망 오보, 서해훼리호 사고 당시 언론의 광란

해방이 되어 이 나라 언론이 이성을 회복하고 사실 보도에 앞장섰을까? 그렇다고 생각하시면 참으로 순진한 독자에 해당한다. 해방 후에도 한국 언론의 가짜 뉴스 퍼레이드는 가속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한국 언론계에 길이 남을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짜 뉴스의 주인공은 조선일보가 차지했다.

조선일보는 눈에 뭐가 씌었는지 1986년 11월 16일 멀쩡히 살아 있는 김일성이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고 호외까지 발간하여 보도함으로써 국제적 망신살이 뻗쳤다. 조선일보는 이 희대의 오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지난 2020년 3월 4일 창간 100주년을 맞아 “주요한 오류와 실수를 되짚어보고, 미처 바로잡지 못한 오보를 특집 지면을 통해 정정하고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라는 사고(社告) 기사를 게재하는 것으로 퉁 쳤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김일성이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고 가짜 뉴스를 보도하여 망신살이 뻗친 조선일보 보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김일성이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고 가짜 뉴스를 보도하여 망신살이 뻗친 조선일보 보도.

서양에서는 어떤 선박이 해상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선장은 배와 운명을 함께 한다(The captain goes down with the ship)”라는 명예로운 전통을 따른다. 선장은 선박에 탑승한 승객이나 화물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후 배를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의로운 행동을 택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나라 선원법 제11조(선박 위험시의 조치)도 ①선장은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에는 인명, 선박 및 화물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 해야 한다. ② 선장은 제1항에 따른 인명구조 조치를 다 하기 전에 선박을 떠나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 위도 인근 해상에서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하여 292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속보 경쟁을 벌이던 언론은 서해훼리호 선장 백운두 씨가 ‘배에서 혼자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탈출한 선장이 몰래 일본으로 밀항했다’라는 가짜 뉴스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불확실한 목격담을 근거로 서해훼리호 선장을 파렴치범으로 몰아간 것이다.

희대의 가짜 뉴스 진앙지는 지방신문인 전북일보와 한겨레신문이었다. 이 보도에 모든 언론이 자극받아 비슷한 내용을 경쟁적으로 확대 재생산했다. 검찰과 경찰은 수사대를 현지에 급파하고 전투경찰 3개 중대를 동원하여 백 선장이 도주하여 은신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안 앞바다 일대의 수색에 나섰고, 백 선장을 과실치사 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서해훼리호 선장이 탑승객 내팽개치고  탈출하여 도망갔다고 가짜 뉴스를 보도한 한겨레신문.
서해훼리호 선장이 탑승객 내팽개치고 탈출하여 도망갔다고 가짜 뉴스를 보도한 한겨레신문.

그런데 사고 선박에서 혼자만 탈출하여 일본으로 밀행했다던 백 선장의 시신은 5일 후 선박 내부 조타실 뒤편 통신실에서 발견되었다. 언론은 백 선장을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무책임하고 비겁한 사람으로 낙인찍어 두 번 죽인 셈이다. 시신이 인양되자 오열하던 백 선장 가족은 취재진에게 “당신들이 살았다고 보도했으니 살려내라”라고 울부짖었다.

한국 언론사상 가짜 뉴스의 핵폭탄급 극치는 광우병 보도, 촛불 난동 보도인데 이 내용은 더 이상 언급하면 독자 여러분의 혈압을 자극할 우려가 있어 자제하기로 한다.

#. 쓰레기 들추기 저널리즘, 기레기들의 천국

‘쓰레기 들추기 저널리즘’, 영어로 표현하면 ‘머크레이커 저널리즘(muckraker journalism)’이란 용어가 있다. 남의 약점을 잡아 추문을 폭로하는 언론이란 뜻이다. 남의 추문을 폭로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도 않고 쓰지도 못하는 언론인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선(善)한 존재가 아니라 악(惡)의 잠재적 원천이 된다.

사소한 일이 벌어지면 수많은 기자가 벌떼같이 달려들어 사실 보도나 건전한 비판이 아닌, 저주의 굿판을 벌인다. 경쟁하듯 쏟아낸 기사들은 사실 확인조차 거치지 않은 ‘카더라’ 통신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라는 정화조를 거쳐 사실로 둔갑하여 인터넷이나 SNS를 타고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그 결과 ‘디지털 인민재판’이나 다름없는 인격 살인 행위가 곳곳에서, 너무 자주 벌어진다. 명예훼손 소송을 통한 법적 방어 장치 운운해봤자 이미 메뚜기떼가 쓰나미처럼 쓸고 지나가 만신창이가 된 후의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일 뿐이다.

한국 언론이 기업인이나 권력자, 1등, 상류층, 유명 인사, 전문가, 부자, 성공한 인물 등 소위 잘나가는 사람을 대상으로 벌이는 ‘집단 이지메’ 현상을 보면 한국 언론은 쓰레기 들추기 저널리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언론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패거리 현상보다 더 심각하고 무서운, 이익을 탐하는 집단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이다. 잘나가는 인물이나 조직, 집단이 사소한 사건·사고로 인해 조그마한 약점이라도 보였다 하면 마치 짐승 사체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처럼 몰려들어 집단적으로 물고 뜯는다.

기자들은 건전한 감시 비판을 통한 공동체의 영속이나 지속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론사, 혹은 개인적 치부를 위해 게재 여부를 흥정하고, 내용이나 제목을 적당히 분칠하거나 삭제하는 등 은밀한 거래가 자행된다. 과거에는 ‘사이비 기자’라 하여 이런 행위자들이 특정 소수였던 데 비해 최근에는 이런 현상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너무 자주, 그리고 한두 사람이 운영하는 인터넷 언론은 물론이고 지방지, 대형 언론사 할 것 없이 광범위하게 전파된 것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오죽했으면 한 대기업 홍보 책임자는 이 나라의 언론을 “펜을 든 강도”라고 표현했겠는가. 구한말 조선을 여행했던 영국 왕립지리학회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조선의 양반 관리들의 조직적인 착취 수탈 행위를 목격하고 저들을 “면허받은 흡혈귀”라고 비판한 것과 어찌 그리 닮은꼴인가.

언론은 정당한 보도 행위를 통해 시청률이나 신문 판매 부수에 따르는 광고료 수입으로 유지 운영하고, 미래를 대비한 투자를 하여 발전의 선순환을 이뤄가는 것이 순리다. 좋은 기사를 보도하여 해당 언론사의 구독자·시청자가 늘고, 그와 함께 광고 수익도 늘어나 이익이 창출되는 경영환경이 조성되어야 언론의 감시·비판·견제 기능이 정상 작동된다.

이것이 어느 순간 무너져 특정 기사를 무기로 기업이나 개인, 조직으로부터 광고 명목으로 금품을 뜯어내는 것으로 존립하는 언론은 언론이 아니라 사회 기생 세력, 혹은 조폭 범죄집단과 다를 것이 없는 사회의 흉기가 된다.

한국 언론은 언제부터인가 ‘염불보다는 잿밥’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 전형적인 ‘쓰레기 들추기 저널리즘’으로 타락해버렸다. 이념의 도구로 전락한 좌파 언론은 공정·정의·분배 구호를 앞세워 사회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결로 분열시키고, 우파 언론은 사주의 이익과 포퓰리즘, 상업주의에 휩쓸려 언론 망국의 디스토피아를 연출하고 있다.

#. 언론 위기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와 직결

인터넷 온라인 문명이 고도화되면서 결정적 타격을 입고 있는 분야 중의 하나가 언론이다. 1936년 헨리 루이스가 창간한 시사 화보 잡지 <라이프(Life)>는 2007년 문을 닫았다. 시사 잡지의 대명사로 통하던 <뉴스위크(Newsweek)>는 2012년 4월 종이 잡지를 폐간하고 디지털 잡지만 발간하고 있다. 한 시절 ‘떠오르는 태양’이었던 언론업종이 3D 사양산업으로 분류되고 있음을 보며 문명사의 잔인한 ‘진보의 법칙’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문제는 언론의 위기가 언론 그 자체의 위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에서 50여 년간 기자와 편집인으로 활약한 로버트 카이저는 ‘미국 언론의 위기,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글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짚어냈다.

“건강한 민주 사회의 유지에는 호각을 들고 있다가 규칙 위반 사례를 발견될 때 호각을 불어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심판이 꼭 있어야 한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은 대중을 분열(파편화)시키고 전문 언론을 약화시킴으로써 언론이 사회적 책임감을 수호하는 능력을 약화시켰다. 정통 언론이 약화되면 이들의 자리는 누가 차지하게 될까?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점점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몇 가지 추세는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즉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은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좋아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결국 언론도 결국 계급, 지역, 종교적 성향, 세대, 인종, 정치적 성향 등등에 따라 각각 파편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심화되면서 과거 미국을 단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언론이 이제는 사회를 분열시키는 많은 요인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정치인이나 평론가들은 점점 더 자신의 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부합하는 ‘사실’을 기꺼이 만들어내고 있다.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선전에 열중하고 있는 언론도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대중도 이제 이런 상황에 크게 낯선 느낌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 주류 언론사는 최고의 언론사로서의 책임감을 지키는 데 필요한 재정적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언론은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다. 따라서 효과적인 감시 언론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민주적 통치 역시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위기 상황이 벌어진 것은 분명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벌어진 많은 변화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미래에도 언론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영토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 하나뿐이다.”

이제 우리는 언론의 위기에 이어 자유민주주의의 위기까지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국 언론은 여전히 ‘쓰레기 들추기’ 행태로 날을 지새우느라 바쁘다. 언론의 막장 자해극은 좌와 우,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동시다발적이고 전방위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이것이 한국 언론 생태계의 부인할 수 없는 자화상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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