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몰락이 우파의 성공 보장해주지는 못해
기울어진 이념 지형 극복하려면 우파가 주도하는 정치담론 있어야
우리나라 우파는 이념성 결여, 좌파와의 대결에서 치명적 약점
이념 대결의 정점이 '통일', 우파 청년들이 열린 자세 가질 필요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가 지난 5일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38.9%, 부정 평가는 58.9%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는 지난주보다 2.5%포인트 오르는 등 2주 연속 상승했다.

이어서 뉴시스가 지난 4~6일 전국 18세 이상 남녀 10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윤 대통령 지지율이 39.5%로 좀더 높게 나타났다. 그리고 여론조사공정이 지난 5~6일 전국 18세 이상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41.5%를 찍었다. 마침내 40%대를 돌파한 것이다.

정권 초기임에도 지지부진했던 대통령의 지지율을 지켜보며 속을 태웠던 보수 시민들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동안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반대로 지지율을 끌어올린 동력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았던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동안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좌파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자유민주 국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투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을 싫어하는 이유로 ‘독단적’이라는 항목이 항상 상위에 올랐던 배경이기도 하다.

지지율 반전은 윤 대통령이 추구하는 이런 가치와 진정성이 조금씩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신호이다. 특히 화물연대의 파업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대응한 것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지지율 상승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좌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던 상징자산의 위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점이다. 5.18과 세월호 등 대한민국의 가치를 부정하는 데 동원됐던 비극적 상징자산의 위력이 옛날 같지 않다. 좌파들이 ‘제2의 세월호’로 만들려고 총력을 기울인 이태원 사고에 대한 여론의 싸늘한 반응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이런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본다. 좌파는 앞으로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한다. 87체제 들어 그들의 정치적 우위를 보장해주었던 상징자산들의 위력이 쇠퇴한 상황에서 좌파들은 과거의 자산을 대체할 새로운 무기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영원히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좌파는 앞으로 정치적인 포지션과 의미는 상실하고 종교집단 비슷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좌파의 몰락이 우파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좌우 대립 전선은 본질적으로 이념 투쟁이다. 87체제의 등장 이후 좌파는 대한민국의 주류 이념의 자리를 차지했다. 1980년 5.18의 피를 틀어쥐고, 최고 권력을 자기 손으로 직접 뽑고 싶다는 국민적 여망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그것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87체제 즉 6공화국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등장한 공화국 가운데 최장수 체제로 자리잡았다. 그만큼 체제의 안정성이 높다는 얘기이고, 다른 말로 하자면 좌파의 이념적 주도권이 강고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걸 깨트리지 않으면 우파에게는 미래가 없다. 윤석열 정권이 등장하고 지지율이 반등했다고 해서 이 기본 구조가 바뀐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똑같은 사건이라도 좌우 진영에 대한 대우가 현격하게 달라진다. 좌파에게는 온정과 이해의 대상인 사건이 우파에게는 혹독한 비난과 단죄의 대상이 되곤 한다. 고등학교 졸업 자격부터 박탈해야 할 조국의 딸 조민이 여전히 의사 노릇을 하고 있는 반면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의혹의 제기만으로도 일사천리 중졸 학력으로 추락했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좌파의 이념적 주도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렇게 좌파 쪽으로 기울어진 이념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파가 주도하는 정치 담론이 있어야 한다. 그 담론을 실현하는 투쟁 과정에서 대중을 의식화·조직해야 한다. 이런 투쟁에서 승리할 때 우파는 비로소 이념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우파가 주도해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을 바꿀 수 있는 전략적 담론 중 하나가 통일론이다.

통일은 선택이 아닌 당위이다. 통일은 한반도 근대화 과정의 최종 결론이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근대화를 향한 투쟁과 진통의 역사였다. 구한말 당시 개화파 또는 친일파라고 불리는 세력이 바로 조선의 반동성을 극복하고 근대화를 추구한 집단이었다. 이들과의 투쟁에서 조선왕조가 극단적인 반동성을 드러내면서 이들의 복벽을 주장하는 세력은 전멸했다. 그리고 한일합방 이후 근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세력도 사라졌다.

하지만, 식민지기에 들어서면서 ‘어떤 근대화인가’를 두고 조선 내부에서 갈등과 대립이 본격화됐다. 미국과 영국 등 해양문명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방식의 근대화인지 아니면 독일과 프랑스 등 대륙문명에서 발원하여 러시아에서 발화한 사회주의 혁명에 기반한 근대화인지를 두고 전개된 갈등이었다. 일제에 의해 본격 근대화의 걸음마를 시작한 조선은 여기에 대한 판단 능력이 없었다.

소련이 구현한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실상에 대한 서구 지성계의 비판은 1936년 프랑스의 문호 앙드레 지드의 <소련 방문기>가 거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당시는 러시아혁명의 성공의 영향으로 서구 사회의 지식인들조차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충만했던 시대였다.

서구의 지성계에서 소련 비판은 사회적 자살처럼 여겨졌던 만큼 지드의 발언은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사회주의 이념과 현실에 대한 본격적인 풍자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출간된 것도 1945년의 일이었다. 세계적으로도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비판은 아직 무르익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이 1923년 그의 영향 아래 하와이에서 발행되던 잡지 <태평양 잡지>에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공산당의 當不當(당부당)’이란 글을 쓴 것은 탁월한 안목이었다. 이승만은 그 글에서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재산의 평등 분배, 자본가 계급의 타도, 지식계급의 제거, 종교탄압, 국가 폐지 등은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조건에서 조선인들이 사회주의를 근대화의 유력한 방편으로 이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가장 비타협적인 독립운동 세력으로 인정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사회주의는 또한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과 현실 세계의 모순 구조에 대해 나름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제시하고 있어서 지식인층에게 매력적이었다. 식민지기에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그냥 ‘주의자’라고 불렀던 것이 이를 보여준다. 당시 하나의 이념으로서 체계를 갖춘 유일한 사상이 사회주의였다는 얘기이다.

분단은 이런 조선 내부의 이념적 갈등이 현실에 표출된 사건이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부 세력의 영향도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조선 내부의 갈등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 내부 갈등이 아니라면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조선 전역에 걸쳐 이념 대립이 처절하게 전면화됐던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내부 갈등을 단시일 내에 전면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6.25였다. 이렇게 얘기하면 북한의 남침을 합리화하는 것처럼 여길 수도 있지만, 차원이 다른 얘기이다. 6.25 이전에도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유혈 충돌이 빈번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북진 통일의 당위성을 계속 강조했다. 동족상잔과 남침의 원죄는 북한에게 있지만, 조선 내부의 이념적 대립이라는 요소를 외면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을 둔 투쟁에서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분단은 근대화 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장기전으로 그리고 근대화의 내용을 둘러싼 체제 대결로 전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이건 근대화를 둘러싼 조선 내부의 갈등이 힘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치열했다는 걸 보여주는 동시에 이런 이념 대립이 무력으로 해결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고 본원적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조선인들은 근대화 노선을 둘러싸고 ‘누가 옳은가’를 궁극적으로 입증하는 경쟁에 돌입했던 것이다. 만일 6.25전쟁으로 통일이 됐다면 그런 체제 대결은 무산됐을 것이다. 이건 한반도 민중들에게 주어진 세계사적인 고난이자 과제였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운명이었다.

근대화는 국민국가의 건설로 정치적 표현을 완성한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은 이 과제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심지어 70년대까지도 북한이 이 경쟁에서 앞서는 것으로 보였지만, 이후 전세는 역전됐다. 사실 북한이 체제 대결에서 앞서갔던 것은 일제가 식민지기에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했던 군수산업과 발전 시설 등 인프라 덕분이었다.

전쟁으로 그 대부분이 초토화됐다고 하지만, 그 잔해를 수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서 건설하는 대한민국의 조건보다 유리했다. 특히 그 인프라를 운영했던 경험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자산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다.

체제 경쟁에서 대한민국은 승리했고, 북한은 이 경쟁에서 완패했다. 문제는 국민국가의 건설이 통일을 통해 완성된다는 점이다. 근대화를 둘러싼 남북의 체제 대결은 결국 통일 국민국가의 건설을 통해서 실현될 수밖에 없다. 체제 대결도 결국 구체적인 현실을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그게 바로 통일이다.

우파는 건국과 산업화를 통해 근대 국민국가의 뼈대를 완성했고, 민주화로 가는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근대 국민국가로 가는 결정적인 요소가 결여돼 있었다. 그게 바로 이념성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핵심이 이념성이다. 혈연과 전통문화 등 선천적이고 자생적인 공동체에 근거를 둔 전근대 국가와 달리 국민국가는 국민(nation)의 자발성이 핵심이다. 우리나라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오해와 달리 국민(nation)은 ‘민족’이라는 번역어로 통용되는 인종적(ethnic, racial) 구성요소가 아니라, 근대적 헌정질서에 대한 동의의 개념이 강하다. 이 헌정질서에 대한 동의가 바로 이념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 우파는 이념성을 결여하고 있고, 이것이 좌파와의 대결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드러나고 있다. 87체제 이후 이 약점은 점점 뚜렷해졌고, 이는 정치 투쟁의 열세로 드러났다. 광우병 난동과 촛불시위 그리고 탄핵이 이런 정치 투쟁의 열세가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건들이다.

이념 대결의 정점이 통일이다. 체제 대결에서 승리한 대한민국이 이념 투쟁과 정치 투쟁에서 북한에게 열세를 보여온 것이 이념성의 부재 때문이라면 그 극복은 통일 담론의 형성을 통해 가능해진다.

통일 담론은 국민들에게 남북 체제의 우열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념 부재의 우파 시민들을 정치 투쟁의 전사로 훈련시키는 정치 학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정치 학교가 한두 가지 요소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통일 담론은 그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청년층은 우파가 좌파와의 정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현재의 2030세대는 4050세대의 좌파 편향성을 본격적으로 벗어던질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청년층 역시 이념적 정체성은 아직 애매하다. 이런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통일 담론에 대한 거부감이다.

우파 청년들도 대개 통일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곤 한다. 심지어 통일에 대해 얘기하는 것 자체를 좌파에 대한 동조로 이해하는 성향도 나타난다. 대한민국에서 통일 담론을 주도해온 것이 좌파 진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통일 담론의 좌파 편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우파 청년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전향적이고 열린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통일에 대한 피해의식도 문제다. 통일을 하면 굶주린 북한 주민들을 대한민국 청년들이 먹여살려야 한다는 우려가 대표적이다. 충분히 가능한 우려이지만 동시에 우리나라 우파들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미성숙한지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지금은 대한민국 역사의 제3기로 접어드는 단계이다. 1기는 우파가 건국과 산업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주류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던 단계였고, 2기는 좌파가 5.18과 87체제의 수립을 통해 반대한민국의 가치를 전면화하며 주류의 위상을 찬탈했던 시기였다. 여기까지가 정(正)과 반(反)의 대립이었다면 이제 다시 새로운 우파가 주도하는 합(合)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통일 담론은 바로 새로운 우파가 들어야 할 깃발이자 표상이라고 본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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