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르네상스를 연 니콜라오 5세가 1455년 서거하자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열렸다. 그러나 로마의 양대 귀족인 콜론나와 오르시니 가문의 대립으로 이탈리아 출신 후보를 선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비뇽 유수의 악연이 있는 프랑스 출신을 택할 수는 없고 과도기적으로 스페인 출신인 알폰소 보르지아 추기경이 교황(갈리스토 3세)으로 선출되었다. 알폰소 보르지아는 나이가 많아(77세) 오래 재임하지 못하리라 여겨졌다. 이것이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 
  그는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태어났고 교회법 등에 정통한 법률전문가였으나 외교에도 뛰어난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1429년 대립교황 클레멘스 8세의 사임을 종용했고 그 보상으로 마르티노 5세 교황에 의해 발렌시아 주교로 서임되었다. 1443년에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가 교황에 적대적인 바젤 공의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하였다.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그 공을 높이 사서 알폰소를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이기는 쪽을 확실히 밀어주는 외교적 선택 덕분에 승승장구했다. 

  스페인 출신 교황으로 족벌정치 시행
  그는 교황이 된 후에 친인척과 동포들을 많이 기용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가 죽었을 때, 로마에서는 야만인의 통치가 끝난 것을 축하할 정도였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이방인이었다. 로마는 귀족과 공화주의자들이 모반을 계획하는 등<윌 듀런트, 문명이야기5-2> 배타적인 도시였다. 자기 세력이 약했던 교황은 이탈리아 추기경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우려도 있었고, 자신의 안전과 십자군 등 현안을 밀어 붙이기 위해서는 주변에 믿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교황령의 요새들에 스페인출신 사령관과 수비대를 두면서, 조카인 베드로를 천사성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같은 집안 출신 20대 초반인 두 조카와 포르투갈 출신 동 하이메를 추기경에 임명했다. 그중 한 사람인 로드리고 보르자는 교황청에서 가장 수입이 많은 부총리자리에 앉혔다<문명이야기 5-2>. 
  그러나 교황의 족벌 정치에 대한 비판은 다소 증폭된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친인척 등용은 다른 교황들도 어느 정도 시행해온 관행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이방인에 대한 반감이 많이 작용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스페인 사람을 선택할 때는 자기들이 마음대로 조종해서 자신들이 요직을 차지할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교황이 자기의 친족을 동원해서 그 기대를 무참히 깨 버리니 이에 대한 반발이 생긴 게 아닐까. 
  문제는 교황이 임명한 조카들이 무능하지는 않았지만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던 것 같다. 로드리고는 훗날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되었지만, 자신의 애인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솔직하다보니 부도덕한 인물로 가십거리가 되었다. 외국인이 요직을 차지한 게 기분 나쁜데 미운 짓을 하니 더 밉게 보였을 것이다. 

 예술과 학문을 등한시한 것은 십자군 전비마련 때문
 전임 니콜라오 5세와는 달리 예술과 학문에 무관심해서 많은 인문주의자들을 실망시켰고,  니콜라오의 로마 재건 계획을 중단시켰다는 비난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결정은 그가 예술을 몰라서가 아니라 십자군 군비 마련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유럽문명의 원천인 동로마 제국이 투르크에 의해 멸망하자, 사람들은 비탄과 분노에 사로잡혀 이교도 토벌과 콘스탄티노플의 회복을 위한 십자군 결성을 외쳤다. 한편 오스만 투르크의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제국의 수도를 정복했으니 로마제국의 나머지 영토까지 점령해야한다고 생각한 듯, 과감한 팽창정책으로 유럽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결성을 주창했다. 동로마를 잃어버려 인기가 하락한 전임교황을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모른다. 교황은 전 유럽에 특사들을 급파하여 세금을 거두고, 교황청의 예술품과 비싼 책들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 각국 군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십자군 원정을 위한 헌금 요구는 프랑스와 독일의 공분을 샀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자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백성들이 지금은 분노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것이고, 긴 호흡으로 사안을 판단해야한다고 군주들은 생각했다. 특히 투르크와 직접 국경을 마주하지 않는 국가는 관심이 적었다. 각자 도생의 시대라 군주들은 자기나라의 내부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아라곤과 나폴리의 왕 알폰소는 십자군 함대를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가 아니라 자신의 영지를 점령하고 있는 제노바를 공격하는데 이용해서 갈리스토 교황을 격노하게 했다<나무위키>. 이미 유럽각국의 민족주의와 국가이기주의가 강해져 있었고 신앙심은 상대적으로 약해져 있었다. 기독교 대의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군주들의 비협조와 십자군 승리
  군주들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신은 교황의 십자군결성이 빛을 보게 했다. 메흐메트 2세는 1456년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벨그라드를 공격했는데, 겁에 질린 헝가리왕 라슬로 5세는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도망쳐 버렸다. 코소보 전투 이후 권력을 잃었던 헝가리의 명장 후녀디 야노시가 다시 일어서서 헝가리를 지키기 위한 지원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귀족들은 국왕의 부재를 핑계로 참전을 꺼렸다. 이때 갈리스토 3세 교황이 후녀디를 '기독교 세계의 방패'라 칭송하며 그의 모병을 돕고 나섰다<나무위키, 후녀디 야노시>. 교황의 후원으로 후녀디는 10,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오스만 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벨그라드로 진격할 수 있었다. 후녀디의 군대는 도나우 강을 막고 있던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고 벨그라드에 진입하여 투르크 군의 성안 진입을 막고, 포위하고 있던 투르크 군을 대파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군사적 승리로 교황은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갈리스토 3세는, 루앙에서 마녀 혐의로 화형(1431년) 당한 잔 다르크 사건을 재심에 회부해서, 1456년 6월에 그녀의 무죄를 선언했다.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의 희생을 애석해한 프랑스 백성들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노예제도 인정의 과오  
  갈리스토 교황은 개인적으로 소박하고 경건하게 살았지만 영적인 구원보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을 중시했지 않았나 생각된다. 1456년 갈리스토 교황은 포르투갈 정부에게 이교도를 정복할 권한과 아프리카인들을 노예화할 수 있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당시 대서양 개척을 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개척, 정복 등을 통해 확보한 북아프리카와 대서양 지역에 대한 소유와 관리권한에 대한 교황청의 승인을 요청했는데, 전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1452년 사라센인과 이교도들을 정복하고 노예화하는 권리를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에게 부여한 바 있었다<나무위키>. 갈리스토 교황의 칙령은 니콜라오 5세가 발표한 것을 재차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칙령들은 차후에 노예무역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그의 전임자인 에우제니오 4세의 1435년 칙령과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에우제니오 4세는 이교도들(흑인 노예들을 가리킴)도 하느님을 본 따서 창조된 인간이기 때문에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어떤 기독교 신자도 이들의 자유를 함부로 박탈할 권한이 없다고 천명하였다.

  신앙심이 결여된 르네상스 교황들
  노예제를 승인한 교황의 결정은 신앙심이 물질적 이익에 패배한 사례라 하겠다. 신의 뜻보다는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중시하는 르네상스라는 시대가 그런 판단을 불러온 것 같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을 알기 힘들고 인간의 계산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판단보다는 물질적 이익이 되느냐에 더 몰두하게 만든다. 교황들은 성직자로서의 역할보다는 계산적인 정치가로 변해갔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도덕이 결여된 정치적 결정은 부메랑으로
  우리정치도 현실적 이익만 보지 말고 지금 내린 결정이 미래에 어떤 비판을 받을지 고민을 좀 했으면 한다. 도덕이 결여된 정치적 결정은 당장은 이익처럼 보여도 언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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