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신문에 날만큼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사람은 착하게 살고 선하게 행동하며 정의의 편에 서려고 한다. 이 바람은 조직 폭력배들까지 팔뚝에 ‘차카게 살자’고 새길 정도로 절실하고 강렬하다. 가히 인생의 모토이자 인류 보편의 지향점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겠다. 문제는 착하고 선하고 정의로워서는 ‘어른’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나쁘고 악하고 부정한 것이 어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삶의 구속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그때부터 어른이라는 것이다. 삶의 구속성이란 예컨대 이런 거다. 모두가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 어디에선가는 항상 분쟁이 벌어지고 결국 전쟁이 터진다. 아무도 전쟁을 원치 않는데도 그렇다. 해서 평화란 유토피아처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그저 ‘개념’일뿐이다. 전쟁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당연히 평화는 아니다. 하나가 수단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이라서가 아니다. 전쟁의 반대말은 비非전쟁이다. 다만 전쟁을 하지 않을 뿐인 상태가 전쟁의 반대말이다. 한반도에서 남과 북은 현재 전쟁을 하지 않는다. 그럼 남과 북은 평화로운가. 일본과 중국은 전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럼 두 나라는 평화를 공유하는 사이인가. 중국 본토와 타이완은 서로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전쟁을 하지는 않는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그럭저럭 무난하게 지내는 중이다. 수많은 나라들이 옆에 붙은 나라와 분쟁의 불씨를 안은 채 살아간다.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세상이며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인내심이 바닥나거나 내부적으로 갈등이 포화상태가 되었을 때 이들은 기꺼이 전쟁을 선택할 것이라는 사실을. 1차 대전을 치르고 코밑에 피비린내가 가시기도 전에 유럽은 또 전쟁을 선택했다. 이게 증거요 예언이다.

어른이 되고자 한다면

삶의 구속성은 이런 거대한 담론의 차원에서만 우리를 속박하는 게 아니다. 일상에서도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는 매일 무너진다. 이를테면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들이 그렇다(실은 둘을 비슷한 말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만 자유롭다. 이후부터는 내내 자유에서 소외당하다가 죽을 때 다시 자유로워진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마땅히 그래야 옳지만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끝나는 것, 이게 삶의 구속성이다. 평등은 자유보다 더 공허하다. 이런 말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 반대다.” 칼 마르크스는 말했다. 이제까지의 인간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뒤에 한 줄을 빼먹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평등한 세상 같은 건 있어 본 적이 없다. 내내 계급은 있었고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삶의 구속성은 우리의 삶을 모질게 포박하고 있다. 이걸 직시하고 인정해야 그때부터 어른이 된다.

제국주의와 공범자들

재화는 정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이기적이고 가족 단위의 이기심은 너무나 당연하며 공동체나 집단의 이익추구는 보편이다. 누군가는 정해진 재화에서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제국주의는 나라가 총칼로 중무장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해당 국가의 국민이 제국주의적 삶에 익숙해질 때 완결된다. 내 밥상에 올라온 포동포동한 양고기가 어딘가 먼 곳에서 누군가가 기르던 소중한 가축이자 유일한 자산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그 가축을 대가 없이 빼앗겼다는 사실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망각할 때 비로소 제국주의는 완성된다. 고대 로마가 그랬고 나치 제 3제국이 그랬고 일본 제국이 그랬다.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카르타고의 피血라는 사실을 몰랐거나 모른 척 했다. 베를린의 중산층은 자녀들이 입는 예쁜 옷과 좋은 집과 식탁의 맛난 음식이 유대인의 눈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일본 제국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일찌감치 간파했듯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는 인간에게 너무나 당연한 본능이기에 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일상의 삶도 그렇다. 지배하려는 자들은 항상 있었고 그래서 세상은 지배해본 자와 지배해 보고 싶었지만 능력이 안 돼서 지배만 당하다가 끝나는 자들로 구성된 게 세상이다. 이른바 ‘갑질’도 일상에서 발휘되는 극소수를 제외한 인류 보편의 취향이고 취미 생활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절대 아니오, 강력하게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른이 되는 법

어른이 되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특질을 인정하고 세상의 구속성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덜 나쁜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회 지도층이라면(이 표현도 싫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배층을 순화시킨 건데 이것도 인정하기 싫다면 답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자세를 조금만 바꾸면 된다. 이익을 덜 챙기겠습니다, 가급적 공정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이렇게만 해도 당신은 어른이 되고 세상은 그나마 조금 덜 나빠진다. 구글의 사훈을 아실 것이다. “악마는 되지 말자.” 돈을 벌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익을 추구하되 그악스럽게 굴지는 말자는 거다. 이게 어른들의 세상이고 어른들의 실현 가능한 도덕이다. 그런데 여기 역행하는 인간들이 있다. 세상의 모든 좌익이다. 자기들도 안다. 자신들의 주장하는 보편적인 도덕은 현실에서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은 악하고 나쁠 기회가 없어서 덕분에 착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정치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좌익들은 꼼수를 쓴다. 그게 ‘척’이다. ‘척’이란 사실이 아님에도 부러 그리하는 흉내다. 외국 좌익은 겪어본 적이 없어서 한국 좌익만 보자면 착한 척, 선한 척, 정의로운 척이다. 실제로는 신체적 욕구에 충실하면서 착한 척, 이윤 추구에 결사적이면서 선한 척, 가족 이기주의의 끝을 보여주면서 정의로운 척이다. 이 ‘삼척’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적을수록 대한민국은 건강해진다. 반대로 이 ‘척’에 진영논리로 동조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대한민국의 장래는 어두워진다. ‘삼척’은 다른 사람도 어른이 못 되게 가로막는다. 대한민국 좌익들은 ‘척’으로 스스로를 기만하고 지지자들을 어린이 상태에 머물게 한다. 종의 멍에를 지지 말라, 박사님께서 그렇게 절규하셨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정신적인 종살이가 좋은 동포들이 많아 보여 걱정이다. 그 사람들 걱정이 아니라 내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대한민국이 건강하지 못할까봐, 내 자식들이 살아가야 할 대한민국이 유치에서 벗어나지 못할까봐. 모쪼록 새해에는 제발 다들 어른이 되자.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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