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세액공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 정부만 ‘반도체 투자 홀대 정책’을 공식화했다. 미국과 중국은 자국내 반도체 신규투자에 대해 각각 25%와 최대 100%의 세액공제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발신한 메시지, “신규 투자는 미국이나 중국 가서 해라”

한국 국회는 지난 23일 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기존 6%에서 고작 2% 인상한 8%로 정한 조세특례제한법(조특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세수 감소를 우려한 기획재정부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방안(대기업 기준 10% 세액공제)보다 낮은 세제지원책을 우긴 결과이다.

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수정안이 통과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수정안이 통과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를 두고 전형적인 소탐대실이라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한국 정부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한국의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에게 “앞으로 신규투자는 미국이나 중국에 하라”는 정책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반도체특위 민간위원과 학계, 미국의 3분의 1 수준인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율 재개정 촉구

이와 관련 문제의 조특법 재개정 여론이 커지고 있다. 국민의힘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반도체특위) 소속 민간위원들과 학계가 공동으로 26일 성명서를 발표, 반도체 설비투자 세액공제율 인상을 촉구하고 나섰다. 민간위원들은 “개정 조특법의 (대기업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는 8%로, 25% 수준인 미국 등 경쟁국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면서 “한국 반도체 미래가 없어졌다”고 단언했다. 미국의 세액공제율이 한국보다 3배나 높아진 현실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특위 민간위원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김정호·박인철 교수, 서울대 정덕균·황철성 교수, 성균관대 김용석 교수, 삼성디스플레이 박동건 고문,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안기현 전무 등이다. 또 대한전자공학회·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반도체공학회·한국마이크로전자 및 패키징학회 등 반도체 관련 4개 학회 학회장도 성명서 발표에 동참했다.

국민의힘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회. [사진=연합뉴스]
국민의힘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회. [사진=연합뉴스]

이들은 “이미 반도체 경쟁국 모두가 (반도체 정책을) 시장 자율에서 국가의 적극적 지원 및 개입으로 전환했다”면서 “우리 민간 기업도 정부의 적극적 지원 없이는 해외기업들과의 경쟁에서 격차 유지는 물론 생존하기도 어렵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을 투입해 세액공제와 보조금 지급정책을 마련하고 있는데, 한국의 기획재정부만 세수 감소를 이유로 사실상 투자동력을 차단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인식인 것이다.

이들은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단절시킨다”면서 “반도체 산업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현명한 재논의를 강력하게 요청한다”고 밝혔다.

TSMC와 격차 벌어진 삼성전자, 격차 좁히려면 미국이나 중국 투자가 유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최강자이지만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파운드리 중심으로 고속성장하고 있다. 시스템반도체 부문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 설비투자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판도를 가를 중대변수라는 데 이견이 없다. 실제로 글로벌 10대 파운드리 업체의 올해 3분기 매출은 전 분기보다 6% 증가한 352억1천만 달러로 집계됐다. 때문에 향후 파운드리 설비투자는 국가의 반도체 경쟁력과 고용창출을 좌우할 것으로 전망된다.

파운드리 1위는 대만의 TSMC이고 삼성전자는 2위이지만 양자 간의 격차는 최근 더 벌어졌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3분기 삼성전자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1분기 16.3%에서 2분기 16.4%로 소폭 올랐다가 3분기에 15.5%로 하락했다.

반면에 TSMC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1분기 53.6%에서 2분기 53.4%로 주춤했다가 3분기에 56.1%로 올랐다. TSMC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격차는 2분기 37.0%포인트에서 3분기 40.6%포인트로 확대된 것이다.

이 같은 각축전 속에서 TSMC와 삼성전자는 천문학적인 설비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보다 3배 이상 세액공제율이 높은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한국에 투자하는 것은 ‘자멸행위’에 가깝다. 미국이나 중국에 투자하는 게 경쟁력을 높이는 지름길이 된다.

최악을 선택한 국회, 대기업 세액공제율은 민주당안보다 낮추고 중소 및 중견기업은 현행유지

그러나 조특법 재개정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국민의힘 반도체 특위에 소속된 국민의힘 의원들은 더불어민주당과 여야 합의로 조특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처리한 만큼 이번 성명서 발표에서 빠졌다.

반도체 등 설비투자에 대한 기존의 세액공제 비율은 대기업 6%, 중견기업 8%, 중소기업 16%이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2030년까지 세액공제율을 대기업은 20%, 중견기업은 25%, 중소기업은 30%로 대폭 상향하자는 안을 냈다. 이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재벌 특혜’라는 판에 박은 논리를 폈다. 대신에 대기업 10%, 중견기업 15%, 중소기업 30%를 주장했다.

그런데 민주당보다 더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편 쪽은 기획재정부였다. 기재부는 ‘세수 감소’를 문제점으로 제기하면서 대기업 세액공제율 8%를 관철시켰다. 중견기업과 중소기업 세액공제율은 손도 대지 않았다. 국회가 여야 합의로 ‘최악’을 선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27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제57회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법인세 인하, 반도체 지원, 주식양도세 완화 등 경제 성장과 미래먹거리 확보를 위한 법안이 미진해 대단히 아쉽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27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제57회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법인세 인하, 반도체 지원, 주식양도세 완화 등 경제 성장과 미래먹거리 확보를 위한 법안이 미진해 대단히 아쉽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민주당의 ‘재벌특혜’와 기재부의 ‘세수감소’ 논리, ‘미중 몰아주기’로 귀결돼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국회 본회의에서 조특법 개정안이 통과된 직후 성명을 발표, “국회와 정부가 단기적인 세수감소 효과에 매몰된 것 같다”면서 “오히려 첨단산업 시설 투자 세액공제 비율을 높이면 한국이 미래 산업 주도권을 확보하고 산업과 기업이 성장해 지속적으로 세수를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야 정당과 정부가 국내 설비 투자를 확대함으로써 장기적 관점에서 세수확대를 도모했어야 했다는 지적인 것이다.

양향자 무소속 의원은 23일 기재부 수정안 반대토론에서 “반도체 시설 투자 세액공제율을 8%로 완전히 후퇴시킨 것은 25%를 세액공제 해주는 미국 등 국제 표준에 역행한다”면서 “정부의 뒷걸음질은 반도체 기업에 한국 탈출 허가증을 발급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또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를 가장 원하는 곳은 중소·중견기업”이라며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의 반도체 설비투자 세액공제율 인상을 포기한 데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민주당의 ‘재벌특혜’ 논리나 기재부의 ‘세수감소’ 논리는 결국 ‘미중 투자 몰아주기’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세액공제율이 미국의 3분의1에 불과한 한국에 굳이 투자할 반도체 기업이 존재할지가 의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야와 기획재정부가 이 같은 글로벌 반도체 전쟁의 실상을 자각하기 전에는 한국의 세액공제율이 미국이나 중국 수준으로 다시 인상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우려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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