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9회. “빅브라더의 精神世界”

 

20세기 세계사에서 인간평등을 모토로 삼은 대부분의 공산주의 정권들은 일인독재와 인격숭배의 디스토피아(dystopia)로 귀결되고 말았다. 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수백, 수천만, 혹은 10억 이상의 인간집단이 단 한 명의 영도자를 그토록 흠모하고, 추종하고, 숭배하게 되는 걸까? 영웅적 카리스마 때문일까? 매스미디아의 선전선동 때문일까? 계급투쟁, 인민해방, 민족주의 등등의 이념들 때문일까? 세뇌교육 때문일까? 감시와 처벌 때문일까? 억압과 통제 때문일까? 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상상을 절하는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범하고도 그대로 권력을 유지하고 심지어는 인격신(神)이 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자료를 훑어보고, 석학의 강연을 들어보고, 현장을 답사하고, 주변 학자들과 대화를 나눠 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특히나 빅브라더 모택동의 신비로운 마력은 상식으로 납득될 수 없을 듯하다. 백화제방운동(1957)과 반우파투쟁(1957-1959) 당시 그가 남긴 연설문들을 분석해서 미약하나마 그의 정신세계를 잠시 엿보려 한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1. 신중국의 프티부르주아지(Petite Bourgeoisie)

 

오늘날 북경 고궁박물관, 곧 자금성(紫禁城)의 서쪽 인근엔 중해(中海)와 남해(南海)라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놓여 있다. 멀리 금대(金代, 1122-1234)부터 원·명·청을 거쳐 20세기 초까지 지속적으로 개발된 이 중남해(中南海)는 현재 국무원, 중앙서기처, 중앙관공청 등 주요 정부기관이 밀집해 있는 중공정부의 핵심부이다. 백화제방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2개월 쯤 전이다. 1957년 2월 16일 최고지도자 모택동은 중남해 내부의 주요회의 장소인 이년당(頤年堂)에서 작가, 철학자, 교육자들을 불러놓고 “문화 및 이념의 문제”에 관해 열변을 토했다.

 

일부 중국의 학자들은 우파를 색출하려는 모택동의 양모(陽謀)가 이미 이 연설에서 시작됐다고 분석한다. 아직 “물속에 낚싯대를 드리우거나”(釣魚) “동굴 속의 뱀을 끌어내기(引蛇出洞)” 전, 인민 속에 잠복하는 우파를 잡기 위해 커다란 밑그림을 그리는 단계였다는 설명이다. 묘하게도 연설 도중 모택동은 중국의 계급구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이 거대한 소자산가(小資産家)들의 왕국임은 객관적 현실이다. 근로계급은 2천 4백만 밖에 되지 않는데, 그 중의 절반이 산업노동자들이며 나머지 절반은 당 간부들로서 한 축을 이룬다. 반대 축엔 3천만의 지주, 부농, 부르주아지가 있다. 이 양축 사이에 5억 5천만의 소자산가들이 존재한다. 1천 2백만 간부들은 아직 완전히 무산계급이 되지는 못했다. 오직 2백만 정도만이 진심으로 변했다 할 수 있다. 문화·예술의 문제는 바로 이런 현실을 통해 조명되어야만 한다.”

 

소자산가 혹은 소시민이란 불어 프티부르주아지(petite bourgeoisie)의 번역어이다. 1950년대 중국의 인구통계를 보면 85-90프로의 인구가 농촌에 거주하는 촌민들이었다. 3천만의 지주, 부농, 부르주아지는 1957년 당시 6억 인구의 5프로에 불과한 숫자다. 5억5천만이라면 6억 인구의 91.6프로에 달한다. 대체 모택동의 프티부르주아는 누구이며, 그는 어떤 통계를 기준으로 인구의 91.6프로를 소자산가라 분류했을까?

 

고전 마르크시즘의 계급론에 따르면 프티부르주아지는 반(半)자유 상태의 농민 및 중소상인들을 의미한다. 하층 무산계급과는 달리 그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세계관, 가치관, 종교 및 예술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결코 윤택한 생활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부르주아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계층이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조선조의 빈한한 양반층은 물론, 백정, 재인, 광대, 기생 등의 명백한 천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양민들 역시 프티부르주아에 속할 것이다. 프티부르주아는 단순히 경제적 지표보다는 “계급의식”(class consciousness)을 기준으로 나눈 개념이라는 점에서 주체성 혹은 주관성(subjectivity)을 강조하는 모택동사상에 제대로 들어맞는 개념이다.

 

바로 그런 소자산가의 개념에 따라 모택동은 인구의 90프로 이상을 사상개조(思想改造)의 대상이라 생각했다. 쉽게 말해 부르주아도 못되는 자들이 부르주아 행세하는 정신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계층을 교도해서 혁명의식을 갖는 무산계급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는 발상이었다. 예컨대 모택동은 대학생들에 대해서 같은 연설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학생의 80프로가 지주, 부농, 자산계급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모두 일하지 않는 계급이다. 당연히 젊은 사람들은 더 많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 그들 중에서 헝가리 사태를 원하는 자는 극소부에 불과하고, 대부분 공산주의를 지지하겠지만, 과거에 불만세력들조차 [한국전쟁 당시]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투쟁을 지지했었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헝가리 사태를 원하지 않겠지만, [그들 중엔] 헝가리 사태를 일으키려 하는 자들도 존재할 것이다.”

 

다수 대학생들 틈에 숨어서 헝가리 사태를 일으키려는 잠재적 반혁명분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모택동은 바로 그들을 솎아내야만 전체인구의 90프로가 넘는 소자산가 계급을 혁명의식 충만한 무산계급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모택동의 눈앞에선 90프로 이상의 인민들은 부르주아의 문화와 가치를 버리지 못한 소자산가, 소시민, 프티부르주아지에 불과했다. 그들은 모두 감시, 교화, 처벌, 개조의 대상이었다. 모택동은 당시 6억 인구의 사상, 감성과 가치관을 지배하는 명실 공히 인민의 빅브라더였다. “백가쟁명”은 바로 그런 빅브라더의 주문에 의해 시작되었다.

 

작자미상.
작자미상. 모택동의 소자산가 개념에 따르면 이 그림 속의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갈 듯. 

 

2. 인민과 인민의 투쟁

 

모택동의 관찰에 따르면 1956년 폴란드 소요와 헝가리 봉기의 후폭풍으로 유럽 각국의 공산당들은 퇴조기로 접어든 상태였다. 프랑스 공산당은 기관지를 폐간했으며, 스위스 공산당 총서기를 중국 대사관에 은신해 있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도 공산당원의 탈당이 이어졌고, 영국의 지식분자들 역시 공산당을 거부했다. 바로 그런 세계 공산혁명의 퇴조에 따라 중국에서도 크고 작은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권위에 도전하는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태업도 따랐다. 모택동은 당시 상황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민주독재를 새롭게 정의해야 함을 느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거리에 쏟아져 나와 반소(反蘇)와 반독재의 기치를 내건 수십만의 군중들은 과연 정의로운 민주투사들이었나? 모택동은 그들이 내건 “대민주(大民主)”는 올바른 민주가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 민주란 인민민주독재이며, 민주집중제도일 뿐이었다. 고전적 공산주의 기본이론에 따르면 상부구조(superstructure)는 경제적 토대(economic basis)에 복무할 뿐이다. 따라서 “민주”란 제도는 그 자체가 숭고한 목적이 아니라 공산주의 실현의 수단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모택동이 생각하는 참된 민주란 계급의식을 자각한 인민대중이 일사분란하게 자발적으로 공산당 지도부의 지시에 따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민주적집중제도와 인민민주독재는 그렇게 유기체적 전일성을 지향하는 전체주의 이념일 뿐이다. 2017년 12월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린 “촛불혁명”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꺼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런 국제정세의 인식 아래 모택동은 1957년 2월 27일 “인민 내부의 모순을 처리하는 올바른 방법에 관해”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한다. “백화제방”의 시동을 거는 역사적인 연설이다. 과연 이 연설에서 모택동의 공공연한 계략이, 음모(陰謀) 아닌 양모(陽謀)가,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연설문을 잘 읽어 보면, 묘한 암시가 곳곳에 깔려 있다. 우선 제목에서 말하는 “인민 내부의 모순”이란 어떤 의미일까?

 

앞선 칼럼에서도 설명했지만,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모든 인간을 크게 인민(人民)과 적인(敵人)으로 구분한다. 인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이지만, 적인은 공민의 자격조차 박탈당한 일종의 비(非)인간(non-human)이다. 모택동에 의하면, 적아(敵我)모순, 즉 인민과 적인의 사이의 모순은 적대적 모순이다. 반면 인민 내부의 모순은 적대적이지는 않다. 적아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선 반드시 적인들을 억압하고 굴복시켜야만 한다. 적인을 억압하고 굴복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그들 모두의 언론자유와 선거권을 박탈하는 인민독재가 요구되지만, 인민과 인민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는 인민독재가 적용될 순 없다. 모택동이 말한다.

 

“(인민)계급에 대한 (인민)계급의 독재이다. 그들을 통제하고, 그들을 죽이고, 그들을 체포해야 한다. 물론 인민정부를 통해야만 하고, 인민을 요구한다. 현재 우리가 민주집중제도라 말하는 이 제도는 인민내부의 범위에만 적용될 뿐, 적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인민은 그 범위 내에 있지만, 독재의 문제, 다시 말해 누군가 다른 사람을 독재적으로 지배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민은 인민에 대한 독재를 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민이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여행과 시위의 자유를 갖고 있음은 헌법에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의 문제이다. 민주는 리더십의 민주, 리더십을 집중하는 민주를 말한다. 무정부로서의 민주가 아니다. 무정부주의는 인민의 요구가 아니다.”

 

묘한 발언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인민과 적인 사이의 대립은 인민독재를 통해서만 해소되는 적대적 계급투쟁이다. 적대적 계급투쟁이므로 적아의 투쟁에서 인민은 인민정부를 통해 적인을 통제하고 죽이고 체포할 수 있다. 반면 인민과 인민 사이의 대립은 민주집중제도를 통해서 민주적으로 해소되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모택동은 놀랍게도 헌법에 보장된 인민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중국의 헌법에 따르면 인민은 표현, 집회, 결사, 여행, 시위의 자유를 갖는다.

 

1950년대 현실에서 모택동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을 듯하다. 모택동 역시도 “외국에는 자유가 많지만, 중국의 자유는 적다”는 말을 한다. 다만 서구 사회의 자유는 부르주아지 계급의 자유일 뿐이라 주장한다. 중국이 비록 독재국가이지만, 중국인들은 서구인들에 비해 결코 적잖은 자유를 누린다는 궤변이다. 그는 왜 그런 궤변을 늘어놓은 것일까? 바로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불씨를 당기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해도 과연 그는 자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표현의 자유가 건전한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기여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비판의 물꼬가 터지자 잠시 열린 자유의 공간에서 수많은 비당원 관료집단과 인텔리들과 대학생들은 세차게 정부의 문제점들과 공산당 독재의 불합리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비로소 무서운 자유의 파괴력을 직시했고, 그 자유를 다시 뺏기 위해 2년에 걸친 집요한 반우파투쟁의 광기를 이어갔다.

 

1950년대 초 삼반오반(三反五反)운동의 한 장면http://news.ifeng.com/a/20160608/48942157_0.shtml
1950년대 초 삼반오반(三反五反)운동의 한 장면http://news.ifeng.com/a/20160608/48942157_0.shtml

 

 

3. 비록 죽였지만, 잘못은 아니라는

 

중국헌법 전문에 명기된 “모택동사상”이란 과연 무엇일까? 모택동은 서구의 자유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추상적인 자유는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구체적 현실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자유가 있을 뿐이라고.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모택동사상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구체적 현실에서 이뤄진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바로 “모택동사상”을 이룬다.

 

모택동의 비밀연설문들을 보면, 그는 스탈린 정권의 대숙청에 대해 소상히 보고를 받고 있었다. 중국에서 진행되던 국가주도 반혁명분자 숙청 과정도 주도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1957년 2월 27일 스탈린이 1934년 소련공산당 17회 전당대회에서 대표단과 중앙위원들을 체포해 처형했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는 [반혁명분자들을 숙청하는] 숙반운동(肅反運動)에서 대체 어떠했는가? 너무 못했나? 아니면 너무 잘했나? 내가 보니 결점도 있었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래도 참 잘했다. 소련보다 잘했고, 헝가리보다 잘했다. 소련은 극좌였다. 우리는 그들을 거울삼았다. 우리가 특별히 총명했던 것은 아니다. 소련이 너무나 왼쪽으로 갔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소련엔 두 가지 면이 있었다. 진정 반혁명분자를 숙청한 것인데, 이는 옳다. 다른 한 면은 많은 사람들을 잘못 죽였다. 주요인물들, 예컨대 공산당대표대회의 대표들을 90프로나 죽였다. 중앙위원들을 몇 명이나 죽였지? 제17차 당대표대회의 대표들을 80프로나 잡아서 죽여 버렸다. 제17차 당대회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들 중에서도 잡아서 죽인 숫자가 무려 50프로나 된다. 우린 그들을 거울삼았기에 그런 일은 피해갈 수 있었다. 잘못 죽인 사람들은 있었나 없었나? 있었다. [반혁명분자를 숙청하던] 숙반운동 당시 1950년, 1951년, 1952년, 이 3년 동안에 걸쳐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다섯 종류의 반혁명분자들을 제거하면서 지방토호들과 열신(劣紳, 악덕 신사紳士들)들을 죽일 때, 70만을 죽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잘못한 건 아니다. 꼭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은 몇 명 쯤 죽였는가? 70만을 죽였다. 그 이후엔 7만이 더 죽었다. 8만에는 못 미친다."

 

모택동은 스스로 “잘못 죽인” 사람들이 있었음을 시인하고선, 같은 문단에서 “근본적으로 잘못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무슨 말일까? 70만의 인명을 “잘못 죽인 것은 맞지만,” 죽인 것이 꼭 잘못은 아니다? “극좌의 오류”로 70만을 잘못 죽였지만, 공산혁명의 성공을 위해선 불가피하다? 아니면, 70만 중에 잘못 죽인 사람들도 속해 있었다? 학계의 정설은 50년대 초반 처형된 인명을 100만 정도라 추측해 왔지만, 최신의 연구에 따르면 1950년대 희생자의 숫자는 300만을 웃돈다. 분명한 사실은 여전히 숙반투쟁의 희생자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정도다. 같은 글에서 모택동은 홍콩 언론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홍콩언론들은 숫자를 부풀려서 우리가 2천만을 죽였다고 한다. 2천만에서 70만을 빼면 나머지는 1,930만이다. “[고대의] 독재자 주왕(紂王)도 이토록 사악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어떻게 2천만을 죽이겠나? 70만이 죽은 건 사실이다. 그치만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을 것이다. 인민이 생산력을 해방시키기 위해 학살을 요구했다. [우리가 학살한 자들은] 생산력을 저해하는 족쇄였다.”

 

결국 생산력을 막는 족쇄라는 애매한 이유를 들어 스스로 70만을 죽였노라 당당하게 말하는 빅브라더. 그럼에도 소련을 거울삼아 극좌의 오류를 피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빅브라더. 그 빅브라더의 정신세계야 말로 현대중국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아닐 수 없다.

 

https://www.newstatesman.com/culture/2014/05/how-west-embraced-chairman-mao-s-little-red-book
빅브라더 모택동의 정신세계는 1950-60년대 중국인민의 운명을 결정했다.
https://www.newstatesman.com/culture/2014/05/how-west-embraced-chairman-mao-s-little-red-book

 

           

<송재윤, 객원칼럼리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丁抒, <<陽謀: 反右派運動始末>> (香港《開放》雜志社,2007)

毛澤東, <<毛澤東選集>>(人民出版社, 1991)

Yen-lin Chung, “The Witch-Hunting Vanguard: The Central Secretariat's Roles and Activities in the Anti-Rightist Campaign,” The China Quarterly, No. 206 (JUNE 2011), pp. 391-411.

The Secret Speeches of Chairman Mao: From the Hundred Flowers to the Great Leap Forward, Edited by Roderick MacFarquhar, et al. (Harvard University Press, 1989)

毛泽东, “关于正确处理人民内部矛盾的问题(讲话稿)(一九五七年二月二十七日)

https://www.marxists.org/chinese/maozedong/marxist.org-chinese-mao-19570227A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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