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대만 등에서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공격적으로 나서는 가운데, 일본도 반도체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이나 대만에 비해 수년 이상 뒤처진 것으로 평가받는 일본이 최근 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례없는 속도전에 나선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반도체투자 홀대 정책’을 공식화하고 있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획재정부에 반도체 등 전략산업에 대한 세제 지원을 확대하라고 지시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획재정부에 반도체 등 전략산업에 대한 세제 지원을 확대하라고 지시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정부, 뒤늦게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 15% 입법 추진...민주당 협력은 미지수

미국과 중국은 자국내 반도체 신규투자에 대해 각각 25%와 최대 100%의 세액공제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반면, 우리 국회는 지난해 12월 23일 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기존 6%에서 고작 2% 인상한 8%로 정한 조세특례제한법(조특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세수 감소를 우려한 기획재정부가 더불어민주당 방안(대기업 기준 10% 세액공제)보다 낮은 세제지원책을 우긴 탓이다.

다행히 3일 정부가 반도제 투자 세제 지원 관련 법이 통과된 지 11일 만에 추가 감세 방침을 공식화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지난달 30일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 등 국가전략산업에 대한 세제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정부가 3일 발표한 반도체 투자 세제 지원 강화 방안에 따르면 반도체·배터리·백신·디스플레이 등 국가전략기술의 당기(연간)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이 대기업 기준 현재 8%에서 15%로 오른다. 올해 투자 증가분(직전 3년 평균치 대비)에 대해서는 국가전략기술 여부와 상관없이 10%의 추가 공제 혜택이 주어져 최고 25%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정부의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지는 야당의 반발을 고려할 때, 미지수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가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시설 투자에 대한 대기업 세액공제율을 기존 8%에서 15%로 대폭 상향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가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시설 투자에 대한 대기업 세액공제율을 기존 8%에서 15%로 대폭 상향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일본에 건설되는 TSMC공장 투자금은 11조원, 40%를 보조금 지급...공기도 2년으로 단축

이와 달리 일본의 반도체 속도전은 ‘2024년 말 TSMC 제품 생산’을 목표로 365일 24시간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대만 반도체 기업인 TSMC가 중국, 미국에 이어 3번째로 해외에 짓는 일본 구마모토 공장은 지난해 4월 착공한 이후 ‘5년 걸릴 공사를 2년 내에 끝내겠다’는 목표 하에, 한밤에도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투자금은 총 1조2000억 엔(약 11조6400억 원)으로, 일본 정부는 이 중 약 40%인 4760억 엔(약 4조6200억 원)의 보조금을 투입했다. 반도체가 경제 안보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세계적 반도체 기업들의 일본 내 투자 유치를 위해 파격적인 지원을 한 것이다. 당초 2021년 10월 TSMC가 “일본 정부로부터 공장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고 발표한 지 불과 6개월 만인 지난해 4월 공사가 시작됐다는 점도 정부의 이례적인 지원책에 힘입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사는 밤낮·휴일 없이 24시간 이어져 같은 해 말 공장과 사무실 건물 4개 동이 수십 m 높이까지 올라갔다. 공장이 완공되면 2024년 10∼20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반도체가 월 5만5000장(300mm 웨이퍼 기준) 생산될 예정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사 진행을 위한 지자체의 협조도 눈에 띈다. 공장이 지어지고 있는 구마모토현 기쿠요(菊陽)정은 공업용수 확보 문제를 수개월 만에 풀었고, 도로 정비 및 신규 건설도 추진 중이다. 기쿠요정 관계자는 “지하수 고갈을 걱정하는 일부 주민의 문의가 있긴 했지만 공장 건립 반대운동은 전혀 없었다”고 동아일보는 최근 보도했다.

지역 금융사인 후쿠오카파이낸셜그룹은 대만 최대 민간은행인 CTBC와 제휴하고 대만 반도체 기업 및 스타트업의 일본 진출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현지 국립대인 구마모토대는 지난해 대학원에 반도체 교육연구센터를 설치했다.

일본 정부는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수급하려면 두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기시다 총리는 최근 “TSMC 공장 유치로 10년간 4조 엔(약 39조 원)의 경제 효과와 7000명의 고용 창출이 기대된다”며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추가경정예산으로 1조3000억 엔(약 12조6200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대만 TSMC 고위 관계자는 일본에 두번째 공장을 지을 가능성도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만 TSMC 고위 관계자는 "일본에 두 번째 TSMC 공장 건설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심지어 TSMC의 고위 관계자가 일본에 두 번째 TSMC 공장 건설을 고려하고 있는 것을 밝혔다고 연합보 등 대만언론이 지난달 11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허우융칭(侯永淸) TSMC 부사장은 지난 12월 8일 일본 TV도쿄 경제 뉴스 프로그램인 `월드 비즈니스 새틀라이트"(World Business Satellite)에서 이같이 밝혔다.

허우 부사장은 TSMC가 현재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건설 중인 반도체 공장 외에 일본에 새로운 공장 건설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일본 경제산업상은 지난달 9일 TSMC가 일본에 공장을 추가 건설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120조 투입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4년전 발표됐지만 ‘환경’ 논란 등으로 착공 못해

반면 우리나라는 용수 및 전력 등 기반 시설 확보에만 정부와 지자체, 주민이 수년씩 갈등을 겪고 있어,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총사업비 120조 원이 투입될 경기 용인시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은 2019년 2월 발표된 사업이 4년 만인 올 상반기에 착공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15만 m²(약 125만 평) 부지에 조성되는 클러스터에는 SK하이닉스와 협력사 50여 곳이 입주할 예정이다. 현재 토지 등 보상 절차를 마무리하는 단계로, 업계에서는 이르면 상반기(1∼6월) 착공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인근 지자체의 반대로 환경영향평가에만 2년 가까이 걸렸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SK하이닉스와 여주시가 갈등을 빚어온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산단)의 공업용수 취수 문제가 당정의 중재로 지난 11월에야 겨우 해결됐다. 사진은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사진=연합뉴스]
SK하이닉스와 여주시가 갈등을 빚어온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산단)의 공업용수 취수 문제가 당정의 중재로 지난 11월에야 겨우 해결됐다. 사진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예정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자체 인허가도 사업 지연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지난해 5월 여주시에 용수 시설을 위한 인허가를 요청했지만, 계속해서 결정이 미뤄진 탓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여당이 나선 지난해 11월에야 겨우 문제해결의 실타래가 풀렸다.

삼성전자도 이와 비슷한 사례를 경험했다. 경기 평택 반도체공장을 지으면서 전력을 공급하지 못할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고압선이 지상으로 지나갈 경우 지역 주민들의 건강권과 재산권이 침해된다며 안성시가 반대해, 송전선로 건설 사업은 5년이나 중단됐고 2019년에야 합의점을 찾았다. 합의에 따른 추가 비용 750억 원은 삼성전자가 부담해야 했다.

일본 기시다 정부는 12조원 추경 투입하며 ‘차세대 반도체’ 지원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는 너무 동떨어진 행보에,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도 민관 협력이 강화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시다 총리는 최근 “TSMC 공장 유치로 10년간 4조 엔(약 39조 원)의 경제 효과와 7000명의 고용 창출이 기대된다”며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추가경정예산으로 1조3000억 엔(약 12조6200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일본은 이번에 뒤처지면 반도체 경쟁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할 것이라는 절박감이 강하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전략 수립에 중점적 역할을 해 온 아마리 아키라 일본 중의원은 지난해 12월 도쿄 반도체 전시회에서 “제조 거점을 갖고 있지 않으면 소재 기술, 제조 장비가 (해외로) 빨려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위기감이 일본 TSMC 공장의 속도전에 반영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반도체 업계는 내년 상반기까지 메모리반도체 수요 하락세가 지속되고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점유율이 하락하는 ‘보릿고개’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신성장 분야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투자 경쟁도 더욱 격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반도체 기업들의 국내 설비 투자를 충분히 지원하지 못할 경우, 국내 반도체 경쟁력 약화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거세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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