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과몰입 이유는 한국의 헌정질서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
정권교체가 국가 정체성 교체로까지 이어지는 나라
北 추종하는 좌파가 민주화 가치 대변하게 된 것이 대한민국의 비극
우파는 세계사적인 성공 신화 썼지만 '정치의 부재'가 치명적 문제
반면 좌파는 오직 정치만 했다, 더욱 필사적으로 대한민국 체제 해체하려 해
좌파는 선비, 우파는 중인들의 정신적 후손...우파에 정당정치가 부재하는 이유 아닐까?
우파 시민들은 우파 정당에 입당해 활동해야 한다

주동식 객원칼럼니스트
주동식 객원칼럼니스트

요즘 같이 여야 정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는 지식인들이 정치권에 두는 훈수도 많아진다. 훈수의 디테일은 지식인마다 다르지만, 요지는 비슷하다. 정치의 상대를 적으로 보지 말고, 이겨서 쓰러트리려 하지 말고,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라는 것이다.

이런 훈계에는 중요한 전제가 깔려 있다. 즉, 한국인들이 정치에 지나치게 몰입한다는 것이다. 과거 4색 당파의 전통까지 소환되면 한국인의 정치 과몰입은 민족성의 문제로 승격된다. ‘엽전은 어쩔 수 없다’는 자기비하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렇게 노골적인 표현을 쓰지는 못하지만 메시지 아래 깔린 정서는 비슷하다.

한국 사회가 정치에 과몰입하는 것은 분명하다. 오죽하면 한국 정치를 소용돌이에 비유하는 그레고리 헨더슨의 저술이 한국 정치를 분석하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을까? 헨더슨이 말하는 ‘소용돌이’는 정치가 블랙홀처럼 한국 사회의 모든 가치와 담론, 자원을 빨아들이는 현상을 말한다. 지식인들이 한탄하는 한국 사회의 정치 과몰입 현상이 이것이다.

하지만, 정치 과몰입은 비판한다고 없앨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한국인들의 심성을 따지기보다 한국인들이 권력 지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권력 지향적이라는 말은 정치 과몰입이라는 말과 사실상 같은 의미이다). 정치 과몰입이라는 표피적 현상만 따지는 것은 사실상 지식인의 직무 유기이다.

한국인들이 정치 과몰입이 되는 이유는 한국의 헌정 질서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헌정 질서가 안정되고 국가의 정체성이 분명한 나라에서는 정권이 교체된다 해도 변화의 폭에 한계가 있다. 특정 정치 세력이 집권해도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 일본 등이 이런 경우이다.

대한민국은 다르다. 정권 교체가 사실상의 국가 교체로 이어지는, 국가 정체성 변화를 시도하는 일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는 건국 당시부터 헌정 질서 내부에 잠재해있던 문제였다.

제헌 헌법에도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제헌헌법 제84조는 균등주의의 이상을 추구한 경제민주화 원칙을 내걸었고,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농지개혁, 자연자원의 국유화, 운수·통신·금융·보험·전기·수리·수도·가스 등 공공성을 띤 중요 기업들에 대한 국영화를 명시했다. 대외무역에 대한 국가통제도 조문화됐다. 1954년 제2차 개헌에서 비로소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색채를 강화하고 통제경제 요소를 완화했다.

대한민국은 국가 정체성을 두고 대립과 투쟁, 혼란의 역사가 되풀이됐다. 사실상의 내전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 교체가 된 후 전직 대통령이 정치적 참수형에 처해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단순한 정부 교체가 아니라, 근본적인 국가 교체이기 때문에 과거 국가의 수반은 정치적으로 소멸되는 것이 당연하다. 새로운 국가가 들어선 경우 과거의 국가는 정치적으로 완벽한 부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제헌 헌법부터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배경은 무엇일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분단이다. 분단은 근대화의 방향과 노선을 놓고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내건 대한민국이 사회주의와 인민민주주의를 표방한 북한 김씨조선과 체제 경쟁을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이런 체제 경쟁을 고려해서 헌정 질서 내부에도 사회주의적 요소를 반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부 수립 이후 본격화된 농지개혁이 대표적이다. 이 농지개혁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6.25전쟁에서 북한의 남침을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내전이 진행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 분단이 헌정에 반영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내부에 또 하나의 휴전선이 그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대한민국 내부에는 또 하나의 휴전선이 그어져 사실상 내전이 진행중인데, 북한 김씨조선 내부에는 왜 이런 휴전선도 없고, 내전도 가시화되지 않는 것일까.

김씨조선은 체제 비판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체제 경쟁에 임했다. 체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 자체가 북한 체제의 핵심적 내용이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이 근대 국민국가도 아니고, 공화국도 아니라는 증거이다. 김씨조선은 무슨 명분을 내걸어도 사실상 전근대 전체주의 체제인 것이다.

반면 대한민국은 체제 비판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체제 비판을 허용하는 것 자체가 체제의 성격이다. 대한민국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이런 개방성과 유연성을 진전시켜왔다. 대한민국이 경제, 사회, 문화 등 대부분의 영역에 걸쳐 북한을 압도하고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이런 개방성과 유연성에 힘입은 것이었다.

대한민국 내부에 제2의 이념 대립 전선이 형성된 것은 바로 이 개방성과 유연성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개방성과 유연성의 가치를 압축한 정치적 표어인 민주화의 명분을 좌파가 장악했다는 점이다. 개방성과 유연성을 철저히 배격하는 사회주의 진영과 북한 김씨조선을 추종하는 좌파가 민주화의 가치를 대변했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이렇게 된 이유로 건국 과정에서 우파가 동원할 수 있었던 이념적, 물질적, 인적 자원의 한계를 들 수 있다. 소련은 한반도에 진주할 당시부터 김일성을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정해두고 있었고, 분단부터 북한 정권 수립에 이르는 로드맵을 마련해둔 상태였다. 로드맵과 함께 단계별로 투입할 자원도 비교적 풍부했다.

반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한반도에 진주했다. 어떤 정치인과 정치세력을 대리인으로 내세울 것인지에 대해서도 혼돈을 일으켰으며 이승만, 김구 등 우익 정치인들과도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건국을 지원할 자원이란 점에서도 미국은 소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6.25전쟁 직전 국군 소위가 2.4달러의 월급을 받은 반면 북한 인민군 소위는 260달러의 월급을 받았다. 100배가 넘는 차이이다. 중위와 대위로 올라가면 격차가 줄어들지만 이 경우에도 역시 국군이 받는 급여는 북한군 급여의 20분의 1에 불과했다.

이념 자원에서도 소련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체계적인 세계관에 더하여 레닌의 조직 이론과 정치투쟁 이론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이는 인적 자원의 우세로 이어졌다. 소련은 일제 강점기부터 이념적 조직적으로 훈련받은 좌파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이념적 동질성이 높았다. 하지만, 미국의 인적 자원이 되어야 할 우파들은 친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이념적으로도 동질적이지 않았다.

이런 이념적 인적 취약성은 여수 순천 사건이나 제주 4.3 등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잔인한 폭력을 동원하는 문제를 낳았다. 우파의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설득보다 물리적인 제압을 앞세웠던 것이다. 이는 두고두고 우파의 정치적 정당성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근본적으로 개방성과 유연성을 배격하는 좌파가 민주화의 가치를 대변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이것이다.

부족한 자원으로 건국과 6.25전쟁을 치르고 산업화의 과제까지 수행하면서 우파는 세계사적인 성공 신화를 쓸 수 있었지만, 치명적인 한계도 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정치의 부재였다. 이념적 인적 취약성 때문이다. 우파는 건국과 산업화의 주역이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는 한 적이 없었다. 반면 좌파는 오직 정치만 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건국과 산업화를 주도한 세력의 정치 부재 즉 정치 이념과 철학, 전략과 인적 자원의 부재가 정치 과몰입 현상을 낳았다고 봐야 한다. 정치 자원 부재의 반대 급부로 정치에 대한 욕구의 과잉 즉 정치 과몰입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특히 87년 체제 이후 이런 현상이 더욱 극심해졌다. 대한민국의 법적 소유권 즉 주류의 위상은 우파에게 있었지만, 실제적인 정치적 정당성은 좌파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부동산 등기부의 소유주와 실제 점유권자가 다른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전은 필연적이다.

좌파는 대한민국에 대한 법적 소유권이 없다. 그래서 좌파들은 더욱 필사적으로 대한민국 체제를 해체하려 한다. 법적으로 소유권을 등기해놓지 않는 점유 상태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이 중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끊임없이 북한에 추파를 보내며 전세계를 상대로 대북 제재 해제를 간청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대한민국의 레짐 체인지이다.

이 문제도 결국 우파 정당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우파 정당이 정치적으로 아무리 불완전해도 다른 답은 없다.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상징자산’에 있다. 대한민국에서 고유한 상징자산을 가진 정치세력은 좌파와 우파 정당뿐이기 때문이다.

상징자산은 필자가 만들어 사용해온 개념이다. 정당이나 정치세력이 자신의 정치 철학이나 노선, 정책 즉 정치적 정체성을 대중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의 강령이나 규약, 당헌 당규, 정강 정책 등을 연구하는 것은 정치학자나 평론가의 역할이지 대중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직관적으로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정치적 상징이 필요하다. 이것이 상징자산이다.

우파의 상징자산은 건국과 산업화, 반공, 자유민주주의, 법치, 시장경제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 등이다. 좌파의 상징자산은 민주화, 인권, 복지, 평화통일, 경제민주화, 김대중과 노무현 등이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중도나 제3의 정치세력에 대한 요구가 끊이지 않음에도 결국 좌우 대립 구도로 귀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적 상징자산을 갖추지 못한 정치세력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선거의 여왕’으로까지 불렸던 박근혜 대통령이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했다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복당한 것에서도 상징자산의 위력을 알 수 있다. 정치인 자신이 상징자산의 위상으로까지 격상되지 못하는 한 좌우 양 정당에 집약된 상징자산의 위력을 이겨낼 수 없다는 실증 사례이다.

관건은 우파의 리뉴얼이다. 별다른 성과를 내지도, 좌파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지도 못했지만 ‘뉴라이트(New Right)’라는 네이밍에 담긴 시대적 요구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우파 리뉴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우파가 벗어던져야 할 굴레가 정치에 대한 경원 심지어 혐오 현상이다.

우리나라 좌파를 조선 선비들의 정신적 후손이라고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우파는? 필자는 이들이 조선 중인(中人)들의 정신적 후손이라고 본다. 정치에 대한 경원과 혐오가 그런 정신적 DNA를 잘 드러내고 있다.

중인은 직업적으로 실용적인 태도를 갖기 쉽다. 하지만, 이는 자신만의 세계를 고수하고 공동체나 열린 세상에 대해 문을 걸어 잠그는 폐쇄적인 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게 정치에 대한 거리 두기로 나타난다. 우리나라 우파 시민들은 정치인이나 정당을 ‘사기꾼’으로 폄하하는 성향이 강하다.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런 태도로는 좌파를 이길 수도, 대한민국을 바로 세울 수도 없다.

아무리 거슬리고 눈에 차지 않아도 우파 시민들은 우파 정당에 입당해 활동해야 한다. 그리고 당비를 월 1만원 이상 내고, 공천 등에서 당내 민주화를 조직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비행기의 수명을 관리하는 기준으로 피로 수명(fatigue life)이라는 게 있다. 비행 시간이 누적되면서 동체와 날개 등의 재료에 균열이 발생해 비행기의 수명을 단축하는 현상이다. 필자는 가끔 국가에도 이런 피로 수명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비행기가 설계와 재료 구성에 따라 수명이 결정되는 것처럼 국가도 설계 이념과 인적 구성에 의해 수명이 결정되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지금 대한민국의 동체는 지나치게 많은 정치적 자극에 의해 피로가 누적된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다.

그런 기준에서 본 대한민국의 수명은 어느 정도일까? 확실한 건 적절한 수리와 점검, 부품 교체가 비행기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것처럼 대한민국도 정치 질서의 정비와 인적 교체가 체제의 건강성과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과 세계 시민들의 입장에서 굳이 대한민국 체제가 영속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더 좋은 정치 이념과 노선이 등장한다면 새로운 체제로 업그레이드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의 등장은 항상 전쟁을 수반한다. 유혈을 최소화한다 해도 전쟁은 전쟁이다. 그 과정의 고통이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고쳐 쓸 수 있는 데까지는 대한민국을 유지 보수해가면서 끌고 가야 하지 않을까?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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