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0년 2월 24일 – 쿠빌라이 원나라 첫 황제로 즉위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칭기즈 칸의 정복 전쟁은 12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지만 유목민 부족 국가에서 벗어나 중국과 같은 제국을 건설한 것은 1260년 쿠빌라이 칸에 이르러서이다. 이것이 원나라이고 쿠빌라이는 원나라의 초대 황제 세조(世祖)가 되었다. 

 몽골은 1231년부터 시작하여 28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당시 무신이 집권했던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달아났고 한반도는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매번 처참히 유린되었다. 그때 몽골 측에서 한결같이 내놓은 요구 조건은 “왕이 육지에 나와 몽골 사신을 영접하고 태자가 몽골 조정에 입조하면 철군하겠다”라는 것이었다. 원래 입조 대상은 왕이었는데 그나마 태자로 양보한 것이다. 그러나 무신 정권의 반대로 출륙환도는 물론 입조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 조정이 40년 가까이 피해 있던 강화도 고려 궁터 입구. [사진=윤상구]

 1257년 제7차 침공이 있었을 때 고려 제23대 왕 고종은 완전한 항복을 결심했고, 1259년 고려 태자의 입조를 결정했다. 그해 고종의 태자 왕전(훗날 제24대 원종)은 남송을 정벌하러 간 몽케 칸을 만나러 전쟁터로까지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몽케 칸이 원정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 왕전은 무척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몽골 칸의 계승 다툼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에서는 쿠빌라이와 그 동생 아리크부케가 칸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왕전은 결국 쿠빌라이를 선택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그를 만났다. 그런데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칸이 될 확률은 쿠빌라이보다 아리크부케가 더 높았다. 새로운 칸을 선출하는 회의인 쿠릴타이는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열릴 것이고 몽골 본토에 영토를 가지고 있던 아리크부케가 더 유리할 터였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원정지 개평부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 먼저 쿠릴타이를 열었고 재빨리 새로운 칸에 즉위하였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던 쿠빌라이 앞에 고려의 태자 왕전이 입조를 하겠다고 나타난 것이다. 30년 가까이 몽골에 저항하던 고려의 태자가 미래가 확실치도 않은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쿠빌라이는 크게 감동했다. 새로운 수도 대도(大都)에 입성할 때 쿠빌라이는 왕전과 동행했다. ‘믿을 만한 친구’로 인정한 것이다.

 고려로 돌아온 왕전은 몽골로 떠날 때의 그가 아니었다. 칸의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은 권력자로 돌아온 것이다. 1260년에 귀국한 왕전은 4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몽골에서는 4년에 걸친 계승 전쟁 끝에 쿠빌라이가 아리크부케를 이기고 원 제국의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었다. 세조 쿠빌라이의 ‘절친’이 된 원종은 그의 도움으로 무신 세력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딸 쿠툴룩켈미시[忽都魯揭里迷失]를 고려 태자 왕심과 결혼시켰다. 이때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고 쿠빌라이와 왕전은 친구를 넘어서 사돈지간이 되었다. 이후 여러 명의 원나라 공주가 고려로 시집 왔지만 그들은 모두 제후의 딸이었고 황제의 딸은 쿠툴룩켈미시 하나이다. 아시아에서 몽골의 침략을 받고도 왕조를 온전하게 보존한 나라는 티베트와 고려뿐인데, 티베트는 몽골이 믿는 불교의 종주국으로 인정받았고 고려는 부마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로부터 50년 후에 일어난 이른바 입성책동(立省策動, 고려가 원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되어야 한다고 고려 대신들이 원나라에 청원한 사건) 때도 원나라는 쿠빌라이를 내세워 이 제안을 거절했다. 세조 쿠빌라이가 고려를 완전히 점령하지 않고 자신의 친딸을 고려 왕에게 시집보낸 것은 그의 ‘신성한 계책’이었는데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별 실익 없는 일로 고려 백성들의 원성을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 속셈이었을 것이다.

 몽골군은 침략한 영토에서 인정사정 두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패배의 씨앗은 동정’이라는 칭기즈 칸의 가르침을 철저히 받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손자 쿠빌라이가 고려 왕조를 존속케 한 것이 동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을 몽골의 칸으로 인정해준 왕전의 나라에 대한 진정한 보답이 아니었을까?

몽골의 침략 때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경주 분황사 당간 지주. [사진=윤상구]

 그런데 왕전은 무슨 생각으로 쿠빌라이를 택했을까? 손바닥에 침을 뱉어 튀겨봤든 그 전날 꾼 꿈이 쿠빌라이 쪽을 가리켰든 고려가 그나마 중국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고 왕조를 보존할 수 있었던 데는 왕전의 운명적 선택 덕분이 크다. 가끔은 이렇게 우연한 선택이 인생에, 국가에,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물론 고려 왕조 보존의 가장 큰 원동력은 30여 년에 걸친 고려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이었다. 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황인희 작가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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