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1492년 인노첸시오 8세의 선종후 콘클라베에서 스페인 출신인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되었다. 교황선거에는 열강의 이해관계도 개입되었다. 피렌체는 로렌초 데 메디치가 넉달 전에 죽어 대책이 없었고 베네치아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밀라노공국의 섭정인 ‘일모로’는 조카를 몰아내고 왕좌를 찬탈하기 위해 교황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동생인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을 통해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스포르차는 과도기적으로 연로한 카르파 추기경을 밀었으나 의결정족수인 2/3를 넘지 못했다. 그 때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이 잽싸게 스포르차 추기경에게 접근해서 직위와 뇌물, 밀라노 문제 협조를 약속한 후 당선되었다고 소문이 났다. 내막의 진실은 알기 힘들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과거 교황선거에서도 그랬고 오늘날 정치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어쨌든 역사상 가장 비난을 많이 받았던 교황이 선출되었다.

새 교황은 재정과 사회기강을 잡는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 줬다. 바티칸 직원의 숫자를 줄이고 경비를 삭감하며 기록을 엄격히 관리해서 인노첸시오 8세가 남긴 적자재정을 2년 만에 해결하였다. 봉급은 즉시 지불하고, 살인 등 무질서는 형을 엄격하게 집행해서 부정과 범죄를 줄이고 사회기강을 잡았다. 그는 풍자와 논쟁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허용했다. “로마는 자유도시입니다. 누구든 자기 좋을 대로 말하고 쓸 수가 있어요. 그들은 나에 대해 나쁜 말을 많이 하지만 난 마음 쓰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문명이야기 5-2>. 그러나 족벌주의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스페인 출신인 교황이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지, 자신의 아들인 18세의 체사레 보르자를 추기경으로 만들고, 친인척을 요직에 앉혔다. 그는 가족을 사랑했던 것 같다. 첩인 반노차를 30년 이상 성실하게 정실 아내처럼 대했고 그녀와 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항상 곁에 살게 했다. 타락한 교황으로 비판받을 소지를 제공했다. 

국제정세는 험악했다. 나폴리가 교황령내 땅을 매입해서 교황을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자, 알렉산더 교황은 베네치아, 밀라노, 페라라 등과 동맹을 맺고 이에 대응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2세가 이탈리아 내에 스페인 세력끼리 싸우지 않도록 교황과 나폴리왕을 화해시켰다. 그 결과 교황의 아들과 나폴리왕의 딸이 결혼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침공과 교황의 굴복
  그러나 위기는 계속되었다. 나폴리의 페란테 왕이 죽자 프랑스왕 샤를 8세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왔다. 다수의 추기경들이 프랑스 왕 편을 들자고 했지만 교황은 거부했다. 나폴리와 얼마 전에 화해했고 이 지역에서 스페인 계통의 아라곤 왕가가 오랜 기간 뿌리를 내렸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샤를 8세가 군대를 일으켰다. 교황의 숙적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 프랑스 왕에게 타락한 교황을 폐위하자며 접근했고, 밀라노의 일모로는 조카의 외척세력인 나폴리를 억누르기 위해 프랑스에 협조했다. 피렌체의 성직자 사보나롤라도 프랑스 왕을 찬양하며 타락한 교황을 몰아내고 교회개혁을 완수하라고 외쳤다. 추기경들도 체사레 등 6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서 교황을 폐위하라고 간청했다. 다급한 교황은 오스만제국의 술탄에게까지 도움을 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프랑스군은 아무 저항 없이 로마를 점령했고, 교황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성직자들이 교황의 폐위를 주장했지만 샤를 8세 입장에서는 스페인 왕의 반발 등 위험을 무릎 쓸 필요가 없었다. 왕의 목표는 나폴리였다. 이를 위해 자신의 군대가 라티움을 방해받지 않고 통과시킬 것, 프랑스 편을 든 추기경을 용서할 것, 투르크의 인질인 젬과 아들인 체사레를 넘길 것 등 조건을 제시했을 뿐이다. 젬을 데려간 것은 나폴리를 점령한 후 투르크 십자군 원정에 나서겠다는 명분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교황 폐위 계획은 철회되었고 교황은 살아남았다. 

국제 정세 변화와 프랑스군 회군
그런데 프랑스 군이 나폴리를 점령한 후에 국제정세가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폴리 사람들이 모든 공직을 프랑스 인이 차지하며 자신들을 지배하려하자 격분했고, 어떻게 하면 프랑스군을 쫓아낼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등 경쟁국들은 너무나 쉽게 이탈리아를 정복한 프랑스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 인질로 잡혀간 체사레 추기경도 영리하게 도망쳐 나와 교황의 짐을 덜어 주었다.

교황은 반 프랑스동맹을 호소했고, 분노한 스페인, 시샘하는 독일, 조심스러워진 베네치아, 프랑스를 끌어들인 밀라노까지 동맹에 가담했다. 프랑스 왕은 자신과 군대가 이탈리아 한복판에서 포위당했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회군하기로 했다. 나폴리를 떠나 피렌체도 들르지 않고 급히 북으로 향한 프랑스군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타로강 근처에서 동맹군과 마주쳤다. 프랑스 왕은 많은 부하들을 잃고 가까스로 알프스를 넘을 수 있었다. 프랑스병(매독)을 이탈리아에 남겨놓고….

  피렌체 응징과 교황군 육성
  교황은 천우신조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간담이 서늘했다. 반 프랑스동맹에 가담하지 않은 피렌체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당시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사람은 수도사 사보나롤라였다. 그는 로렌초 메디치 사후 피렌체에 신권정치를 시행했고, 프랑스 군대에 길을 내주며 교황을 폐위하라고 샤를 8세에게 강권했다. 프랑스 군대가 물러간 뒤에도 교황의 로마소환요구를 거부하며 교황의 타락을 계속해서 비판했다. 일렉산데르 교황은 피렌체를 고립시키면서 사보나롤라가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다. 결국 오랜 경제봉쇄로 피렌체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짐에 따라 사보나롤라는 지지자를 잃고 화형을 당했다. 
  그리고 로마를 점령당한 후 교황청을 방어할 강력한 군대와 완충지대가 되어줄 교황령을 확실히 지배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는 아들인 체사레 보르자를 통해 실행해 갔다. 

  대단히 유능한 교황과 비난
내정개혁과 알렉산데르 교황의 위기 대응능력을 보면 그가 대단히 유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왜 그가 이다지도 비난받게 되었을까?
  ① 성직자의 독신주의 불고수 
  그 이유는 첫째, 그는 성직자의 독신주의를 지키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는 타락한 시기라 많은 성직자들이 숨겨놓은 처와 자식이 있었고, 교황으로 선출될 때도 그의 처와 자녀들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교황처럼 내놓고 자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성직자들은 남의 이목이 두려워 아들을 조카라 불렀으나 그는 아들을 아들이라 불렀다. 아들과 딸, 내연녀와 바티칸에서 함께 살았다. 본인은 솔직했고 성직자의 독신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일반 대중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또 남녀 간의 문제에 관대한 이탈리아를 떠나 독일 등 북유럽의 신도들을 설득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자기들이 기부한 돈과 세금으로 로마의 성직자들이 사치스럽고 타락한 생활을 즐긴다고 생각했다. 

② 지역 감정: 이탈리아가 아닌 스페인 사람
  둘째 알렉산데르 교황이 스페인 사람이어서 이탈리아 사람들의 배타적 감정이 작용했던 것 같다. 아마 알렉산데르가 비판받은 실질적인 요인일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스페인 출신 교황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좋은 자리를 이탈리아 출신인 자신들이 차지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정책을 추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꼭두각시가 되기에는 너무나 유능했다. 자신의 아들과 친족들을 통해 친정체제를 구축해 갔고 프랑스의 침입에서도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나 이탈리아를 단합시켜 프랑스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냈다. 아들을 시켜 교황령을 정복하고 사실상 보르지아 군주국을 만들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정말 얄미웠을 것이다.

  ③ 타종교에 우호적
  셋째,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고, 이슬람교도인 술탄과도 평화를 유지하고 도움을 요청할 정도였다. 1492년 스페인을 기독교도가 장악하고 이교도들을 쫒아냈을 때 갈 곳이 없는 유대인들을 받아준 교황이 갓 즉위한 알렉산데르 6세였다. 로마시내의 한 구역을 유대인거주지로 설정했고 그들의 예배당도 허용했다. 스페인은 순수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유대인을 쫓아냈는데 교황은 그들을 불러들였으니 비난받을 거리가 될 만했다. 정적들은 술탄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가로채서 프랑스 왕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십자군을 결성해서 술탄과 싸워야할 교황이 술탄에게 도움을 청한 사건을 당시 유럽 사람들이 어떻게 봤을까. 피렌체의 수도사 사보나롤라는 이러한 내용을 강도 높게 비판했으며 전 유럽에 배포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알렉산데르 교황은 굉장히 합리적인 인물이다. 박애주의에 기초한 기독교의 본질에도 맞고 모든 종교의 공존과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술탄과의 외교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투르크와 국경을 맞대고 헝가리 왕에게 많은 원조를 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교황취임 40년 전에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되었고 교황으로 취임하는 해에 스페인은 이슬람교도와 유대인들을 몰아내고 기독교 국가를 완성해 냈다.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간의 갈등은 계속되어 양종교간에 갈등이 고조되어 있을 때였다. 일반 민중은 교황의 이러한 포용적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④ 최대의 정적이 다음교황으로, 종교개혁과 맞물려
  평생의 적수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 다음 교황이 되어 알렉산데르 교황을 깍아내린 것도 한 원인이었다. 율리오 2세는 체사레  보르자를 속이고 그를 몰락시켰고,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임교황과 그 가족을 비난했을 것이다. 실제로 교황의 딸이 시집간 페라라를 공격하며 그녀를 내쫓으려 했다.
  시기적으로도 종교개혁 직전이어서 종교개혁자들의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타락한 교황의 대명사로 언급되고, 르네상스 시대 카톨릭의 폐해와 비난의 상징이 되었다. 

한일관계는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식’ 연설이 야권의 비판을 받고 있다. 일본의 반성과 사과를 앞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여야를 막론하고 반일(反日) 감정을 국내정치에 이용해왔다.  국익을 위해선 일본과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친일파란 비난이 두려워 일본 때리기에 동조했다. 이제 냉정하게 국익을 생각할 때다. 대통령께서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한일 간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표현일 뿐이다. 국제 정치는 냉혹하고, 외교는 우리의 생사가 달린 문제다. 이웃나라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5천만 국민의 행복과 안녕에 관련된 것이다. 과거를 잊지 않아야겠지만 우리는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감정적으로 대할 문제가 아니다. 알렉산드르 교황시기 로마 유린을 보더라도 잘못된 외교적 판단은 엄청난 참사를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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