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노래를 잊은 세시봉 세대들의 추억...뽕짝이 휩쓰는 시대 언어는 과연 정상인가
식민지와 전쟁의 굴곡진 정서, 뽕짝의 복권...저급화, 양극화가 시대정신 거꾸로 돌린다
노래를 잊었듯이 정치 마이크 빼앗겼을 수도

정규재 고문
정규재 고문

송창식의 ‘20년 전쯤에’를 다시 들어 본다. 목청껏 휘두르는 송창식 가수의 창법이 즐겁게 그러나 공허하게 다가온다. 그는 이미 늙었다. 그래서 그의 젊은 시절 목소리는 어쩐지 공허하게 들린다. 가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 가능성을 열었던, 한국말로 노래 부르고, 근대어로 노래 부르고, 일상어로 노래 부르고, 산업화 민주화 시대의 정서로 노래 부르던 가수들은 사라지고 없다. 송창식과 함께 윤형주도 조영남도 사라졌다. 그들은 늙었을 뿐이지만 그들의 노래는 사라졌다. 통기타도 사라지고 청바지를 입은 신생 국가다운 신선함과, 생경해서 반가운 신 한국의 정서는 사라지고 없다. 
대신 구수한 전라도 말과 그 언어의 가락을 여전히 그 속에 품고 있는 뽕짝이 돌아왔다. 서편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송가인이 그의 어머니의 꺾어지고 휘어지는 슬프고 가혹한 그래서 탁한 목소리와 함께 돌아왔다. 이것은 절대 근대적인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 시기의 노래이고 6.25 전쟁기의 노래다. 그렇게 트로트가 온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누가 뭐래도 엔카와도 유사한 음정의 노래다. 
트로트는 저급하다. 맞다. 트로트가 때리는 뇌의 부위는 확실히 임윤찬이 라흐마니노프를 신나게 쳐댈 때 때리는 클라이맥스에서의 뇌의 지점과는 다르다. 실연하고 한강 다리를 건널 때 듣는 것은 뽕짝이다. 그러나 집에서 가만히 앉아 마음을 정리정돈할 때 듣게 되는 것은 클래식이다. 하나는 고급이어서 깊지만 다른 하나는 저급하지만 감정의 진폭은 훨씬 넓다. 
TV를 틀면 온통 자연인 아니면 트로트다. 가히 천하통일의 기세다. 한국 tv 시장의 제작비의 협소함이나 상상력, 프로그램 제작능력의 빈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떻든 자연인 아니면  뽕짝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정말 저질의 정치와 저질의 사회 감각과 저질의 진영에 속한 사람들과 저질의 언론들이 완전하게 복권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식민지 백성의 수준에, 그때의 정서에 익숙하여 6.25전쟁으로까지 거슬러 가는 이별과 헤어짐, 실연과 가난, 혼란과 무질서의 국민 정서가 착 달라붙는 모양이다. 조성진과 임윤찬을 생각하면 실로 극단적인 양극화다. 하나의 정서가 민족형성기 동굴 속의 정서라면 다른 하나는 세계 속 대한민국이라는 너무도 다른 격차를 내포하고 있다. 문화 예술에 무슨 고급 저급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이런 상대주의야말로 저급의 저급성을 보호하려는 좌익적 논리에 불과하다. 최근 들어 보수가 독재 정권까지 보호하려는 원초적 권력 충동으로 나아가는 것과 70년대 세시봉과 청바지가 깨끗이 잊혀지면서 저질 문화가 복권되는 과정은 아주 닮아 있다. 더구나 뽕짝을 복권 시킨 수훈갑의 매체는 누가 뭐래도 조선일보와 tv조선이다. 참 희한한 일치다.
뽕짝과 조성진의 차이만큼이나 대중가요 내부에서도 지각변동이 컸다. 카카오와 이수만의 경영권 분쟁은 한국 연예산업의 돈이 벌어지는 부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인 그 누구도 BTS를 노래 부르진 않는다. 아니 “난 알아요!!!” 이후 노래란 노래는 대부분 듣기 전용이지 부르기는 잊은 지 오래다. 가사도 알아듣기 힘든 집단적인 리듬체조 형태로 K-팝이 진화해 갔던 거다. 원래는 가사가 너무도 분명한 노래들이었다. 송창식의 ‘우리들’에서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생각해 보라. 그 언어들은 얼마나 명징했던가. 그런 노래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아예 언어가 없는 노래들의 지배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어서 SG워너비에서 노래하던 김진호라는 젊은이는 김광식을 거의 복사한 ‘가족사진’을 불러 즐거운 의외성을 준다. 가수 김진호는 SG워너비에 기대어 겨우 살아 남았다. 
그러나 세시봉 세대는 이제 노래를 빼앗겼다. 부를 노래가 없다. 주 무대는 전쟁 세대의 아득한 감정 과잉의 트로트로 돌아갔고 다른 한쪽은 소녀들의 K-팝이 되어 동시에 멀어져간 것이다. 송창식의 낙관론에서 김광식의 우울증으로 나아갔던 근대화-산업화-민주화 시대의 노래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돌아보니 마이크를 빼앗겨버린 세대들은 그들의 정치 언어까지 박탈당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봤자 우리가 들을 노래는 없다. 자연인조차 먹방에 불과하게 전락한 지 오래다. BBC의 ‘자연인’의 대화를 즐길 공간은 아직 한국인의 교양 수준에서는 머언 이야기다. 대중은 저질 문화로 돌아갔다. 정치가 그것을 끌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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