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근 객원 칼럼니스트
오정근 객원 칼럼니스트

최근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과학법’ (CHIPS and Science Act of 2022)은 1988년 도입되었던 슈퍼301조를 연상하게 한다. 미국의 반도체과학법은 미국이 반도체산업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기술적 우위를 강화하기 위한 반도체 생태계 육성법안으로 반도체와 과학산업에 2천800억달러(약366조 원)을 투자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미국 반도체 지원법'으로도 불린다. 2022년 7월 27일 미국 상원이, 하루 뒤인 7월 28일에는 하원이 본회의에서 법안을 통과시킨데 이어 8월 9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 법안에 서명했다. 경제살리는 데는 미국에서는 여야가 따로 없음을 보여준 법안이다.

주요 지원내용을 보면 미국 내 반도체 시설 건립 보조금 390억 달러, 연구 및 노동력 개발 110억 달러, 국방 관련 반도체 칩 제조 20억 달러 등 반도체 산업에 직접적으로 520억 달러가 지원된다.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글로벌 기업에 25%의 세액 공제를 적용하는 방안도 담겼다. 이는 향후 10년간 반도체업계에 240억 달러를 지원하는 효과와 맞먹는다. 미국에 반도체 시설을 지으면 업체당 최대 30억 달러의 보조금도 받는다. 법안이 시행되면 미국 내 반도체 투자를 약속한 삼성전자를 비롯해 인텔, 대만 TSMC 등이 수혜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공개된 미국 반도체과학법에 따른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기준은 한국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우선 보조금을 받으면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에 따라 10년간 중국 같은 우려 국가에 반도체 시설을 투자하는 데 제한을 받는다. 구체적으로 보조금 대상 기업은 중국 시스템반도체 사업에서 28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급 이하 미세공정에는 투자할 수 없는 내용의 약정을 미 상무부 장관과 맺게 된다. 메모리 반도체 부문의 중국 투자 제한 범위도 미 상무부 장관이 정할 방침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서 낸드플래시 같은 메모리반도체 생산공장을 수십조원을 투자해 운영해 오고 있는데 기술향상을 위한 추가투자를 못하면 급신장하고 있는 반도체기술에 밀려 중국투자는 허공에 날리게 될 우려도 없지 않다.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과도한 이익을 얻으면 초과이익을 미국 정부와 공유하고, 현금 흐름 등 상세한 재무계획을 공개해야 하며, 또 노조가 정한 대로 임금을 지급하고, 작업 규칙을 만들고, 어린이 보육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등 만만찮은 부담까지 지게 된다. WSJ이 대중 견제라는 외교정책 목표와 내년 대선을 겨냥한 노동·복지 정책까지 몰아넣은 ‘프랑스식 좌파 정책’이라고 비판할 정도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도 크게 당황하고 있다. 기업 영업기밀 공개와 초과이익 반납, 노조와의 협력 등이 현실화할 경우에 대비해 현지 투자에 관해 다시 계산기를 두드려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미국 대만 일본 등 경쟁국들이 막대한 투자를 무기로 선두 다툼을 벌이는 상황에서 우리만 머뭇거릴 수도 없는 처지다. 미국 국민의 세금으로 반도체 시설 건립에만 390억 달러(약 50조원)의 반도체 보조금을 지원하는 만큼 미국 경제와 안보를 위해 필요한 일은 하겠다고 미국은 주장하지만 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침해할 우려가 있다. 극도의 보안 유지가 필요한 공정기술의 핵심이 노출될 수도 있다.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들은 바이든 정부의 자국 이기주의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미국의 반도체과학법은 4차 산업혁명의 중요한 전력산업인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의 반도체굴기를 꺾는 것은 물론 현재 미국은 설계, 한국 대만은 제조공정으로 나뉘어져 있는 세계반도체 산업의 판도를 미국 중심으로 새판을 짜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는 미국 중심 전략으로 보인다. 이러한 미국의 중국 반도체 견제를 위한 강공대책이 한국반도체에 엄청난 유탄이 될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는 한국의 가장 중요한 핵심산업이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 중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18% (1292억 달러)로 다른 품목 대비 압도적으로 높다. 반도체 경기가 좋아져 반도체 수출이 증가하면 전체 수출 실적이 증가하고 반대로 반도체 경기가 가라앉으면 전체 수출 실적도 저조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반도체 수출이 10% 감소하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0.64%포인트 줄어들고, 반도체 수출이 20% 감소하면 1.27%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2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43% 하락한 59억6000만달러를 기록하며 7개월째 하락세를 이어갔다. 산업연구원은 올해 반도체 수출이 전년 대비 9.9% 감소할 것이라는 관측을 최근 내놨다. 한국은행은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을 1.7%로 전망했는데, 대한상의 보고서 분석대로라면 반도체 수출 둔화가 지속될 경우 올해 경제성장률이 1% 초반까지도 밀릴 수 있는 셈이다. 최근 반도체 수출 부진이 장기화되면서 국내 실물경기 회복 시기도 당초 기대보다 더 지연될 우려도 커지고 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2일 비상경제장관회의 겸 수출투자대책회의에서 "반도체 경기의 반등 없이는 당분간 우리 수출 회복에 제약이 불가피한 어려움이 큰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이런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미국의 정책가이드라인은 물론 중국의 반도체굴기가 목적이지만 한국의 핵심산업인 반도체산업에 유탄이 되고 이는 한국경제를 크게 휘청거리게 할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1988년 슈퍼 301조를 연상하게 한다. 1980년대 미국은 경상수지 적자로 몸살을 앓고 있었던 반면 일본은 경상수지 흑자를 구가하고 있었다. ‘일본경제가 언제 미국경제를 능가할 것인가’라는 책과 논평들이 장안의 지가를 올리고 있던 때였다. 그 때 미국이 들고 나온 전략이 1985년 플라자회담과 1988년 슈퍼301조다. 1985년 플라자회담은 일본 엔화를 고평가시켜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를 줄이는 전략이었다. 이 회담으로 1985년 달러당 240엔 수준이던 엔달러 환율이 1995년에는 100엔 선으로 하락했다. 

슈퍼301조는 1974년 제정된 미국통상법 301조를 1988년에 미국종합무역법으로 개정한 것으로 보복조치의 발동권한을 대통령에서 미국통상대표부(USTR)로 이관하고 불공정 무역관행의 정의를 넓혀, 개별 상품이나 서비스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적인 시장폐쇄성을 문제삼아 이에 대한 보복을 할 수 있도록 강화했다. 이에 따라 통상대표부가 매년 외국의 무역장벽 사례를 의회에 보고하고 30일 이내에 그 중에서 시장개방협상을 벌일 우선협상대상국을 지정해 무역보복협상을 의무적으로 벌이도록 했다. 주로 미국에 대해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었던 동아시아국가들이 중심이었다. 미국은 지금은 환율협상대상국을 지정해 오고 있다.

당시 한국은 경제개발 시작이후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지속해 오다 1986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때마침 슈퍼301조가 발동되면서 미국으로부터 지속적인 원화가치 절상압력을 받았다. 연간 수차례의 대미 환율협상이 지속되기도 했다. 그 결과 1985년 달러당 890원 수준이었던 원달러 환율은 1989년 660원대 까지 하락했다.

1986년 사상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던 경상수지 흑자는 4년간만 지속되고 마침내 1990년 적자로 다시 악화된 후 1996년에는 적자폭이 GDP 대비 4%까지 악화되면서 마침내 1997년 금융위기를 겪었다.  일본을 타겟으로 했던 미국의 통상정책에 한국이 엄청난 유탄을 맞은 경우다.

이번에는 미국의 반도체과학법은 중국이 주요 타겟이다. 최근 ‘중국경제가 언제 미국경제를 따라잡을 것인가’ 중국경제가  규모면에서는 물론 1인당 소득면에서도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는 ‘중국몽’ 등이 등장하고 있는 배경도 1980년대 미일 관계와 유사하다. 그리고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중국이 주요 타깃인 반도체과학법이 한국경제에 큰 유탄이 될 우려가 커지고 있는 점도 유사하다. 유탄을 맞는 것은 한번이면 족하다. 1990년대 상처는 한국경제 근간을 흔들어 놓았다.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정부와 기업의 신속한 판단과 주도면밀한 대응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정부는 외교력으로, 기업은 냉철한 판단으로 미국 반도체지원 관련 독소조항을 걸러내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민관총력 대응이 절실한 실정이다. 방탄 논란으로 날을 새우는 국회도 하루빨리 정신 차리고 미국, 대만 등이 치고 나간 ‘반도체 시설투자 25% 세액공제’ 등에 버금가는 지원 법안을 내야 함은 물론이다. 지역주민들의 보상문제로 4년 째 첫 삽도 떠지 못하고 있는 용인 반도체단지도 기업과 지역주민들과의 문제라고 정부가 뒷짐을 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반도체인재도 육석하는 등 중국과 미국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도록 우리만의 반도체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과제다. 반도체 첨단 공정 기술 등 우리의 핵심 역량을 국내에 보전하는 종합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국회도 반도체지원법 통과를 더 이상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가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경제와 안보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경제안보 시대다. 만약 한국 반도체산업이 위기에 처해 주저 앉는 경우 미국이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지금처럼 높게 평가할 것인가는 최근 대만을 보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대만의 TSMC가 대만을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한 몸처럼 대응해야 한다. 지금처럼 통상교섭본부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대기업의 대미 투자는 국내 일자리와 수출을 줄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업이 대미 투자에 나서고 있는 것은 호혜적인 상생 가능성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말로는 동맹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내세우면서 미국이 자국 중심의 반도체 패권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비치는 건 미국입장에서도 바람직스럽지 않다. 진정한 동맹국 중심의 대책을 추진해야 한다.

오정근 객원 칼럼니스트 (자유시장연구원장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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