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1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례적으로 국정연설에 버금가는 모두발언을 했다. 25분 정도에 걸쳐 생중계된 발언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가진 한일정상회담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이를 왜곡해서 비난하는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에 대한 단호한 비판에 집중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 대통령이 이처럼 강도 높은 반격에 나선 것은 민주당의 내년 총선용 기획물인 ‘반일 프레임’을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심화됨으로써 내년 22대 총선의 최대 악재로 부상하는 상황에서 이를 뒤집을 호재로 ‘반일 프레임’을 선택했다는 게 윤 대통령과 여당인 국민의힘의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미래에 무게를 둔 한일관계의 복원은 논쟁적 사안...민주당은 건설적 논의없이 ‘반일 프레임’으로 싸잡아 비난

사실 윤 대통령의 해법은 간단히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배상을 제안하고 이를 토대로 삼아 문재인 정부 기간 동안 단절돼온 한일관계를 복원시킨 것은 논쟁적인 사안이다. 과거와 미래 중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정책 결정이다.

미래의 관점에서 볼 때, 윤 대통령이 밀어붙인 한일관계 복원은 경제와 외교안보 측면에서는 긍정적 효과가 크다. 반면에 과거의 상처를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민주당과 야권은 이 같은 사안의 복잡성을 무시한 채 ‘굴욕 외교’, ‘친일 행각’ ‘매국 외교’ 등과 같은 극단적 화법을 동원해 윤 정부 전체를 몰아붙이고 있다.

민주당뿐만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 등 친야 성향 사회단체들도 일제히 들고 일어나는 흐름이다.

결국 한일관계 복원 흐름 속에서 정치, 경제, 외교안보 분야 등에서 어떤 실익을 추구해야 할지에 대한 건설적 논의는 실종된 채 상대방을 죽이고 내가 살겠다는 ‘제로섬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내년 총선 판세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도록 기여할 최상의 기획물이 ‘반일 프레임’이라고 볼 수 있다.

윤 대통령, 민주당의 비판을 ‘정치적 이익을 위한 편한 길’로 규정

윤 대통령은 21일 발언에서 이같은 민주당의 의도를 정조준해서 비판했다. 윤 대통령은 “만약 우리가 현재와 과거를 서로 경쟁시킨다면, 반드시 미래를 놓치게 될 것이다”라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말을 인용하면서 “과거는 직시하고 기억해야 되지만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고 말문을 열었다.

윤 대통령은 “한일관계는 한 쪽이 더 얻으면 다른 쪽이 그만큼 더 잃는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전임 정부는 수렁에 빠진 한일관계를 그대로 방치했다”고 문재인 정부에 의한 한일관계 파탄을 지적하고 “저 역시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편한 길을 선택해서, 역대 최악의 한일관계를 방치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대적 민족주의와 반일 감정을 자극해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 한다면, 대통령으로서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다”고 단언했다.

과거사에 대한 배상과 사과에 대한 견해 차이를 이유로 한일관계가 수년 동안 파탄상태에 빠져온 만큼, 미래지향적이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한일관계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자신의 책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민주당의 선동적 비판은 ‘정치적 이익을 위한 편한 길’이라고 단언했다. 민주당이 민족주의 감정에 편승해 일본의 태도를 비판하는 총선 득표 전략을 펴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외통위서 민주당은 ‘대통령 탄핵 사유’ 주장...박진 장관, “정책 판단은 탄핵 사유 아니다”

석동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왼쪽부터), 박진 외교부 장관,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2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무소속 김홍걸 의원의 질의를 경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석동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왼쪽부터), 박진 외교부 장관,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2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무소속 김홍걸 의원의 질의를 경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21일 오후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지난 16일 열린 한일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여야간 양보없는 설전을 벌였다.

민주당은 회의 시작부터 이번 정상회담을 ‘친일적 결단’, ‘외교 대참사’라고 비난하면서 '대통령 탄핵 사유'라는 극단적 주장까지 폈다.

민주당 조정식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은 매번 해외 순방을 갈 때마다 사고를 쳐 왔는데 이번엔 해도 해도 너무했다"며 "윤 대통령의 방일은 대승적 결단이 아니라 국격을 무너뜨린 친일적 결단이자 외교 대참사"라고 강조했다.

같은 당 김상희 의원은 제3자 변제 방식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해법과 관련, "대통령께서 피해자들이 전혀 동의하지 않고 대법원 판결을 뒤엎는 해법을 가지고 일본에 갔다"며 "무슨 배짱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맞는가"라고 따졌다.

민주당 김경협 의원은 이날 회의장에서 역술인 '천공'이 '일본에 고마운,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한다'고 발언한 영상을 틀고, "친일 대일외교 기조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천공의 지침을 보면 알 수 있다"며 "이는 최순실에서 천공으로 바통 터치된 '제2의 국정농단'"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은 "야당은 윤 대통령의 방일을 계속 비판하고 있지만, 사실 이 문제는 전임 정부인 문재인 정부가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라고 꼬집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답변에서 "정부의 정책 판단은 탄핵 사유가 아니다"라며 "심각한 인신공격이고 명예훼손"이라고 반박했다. 또 향후 후속조치와 관련 "연내 기시다 후미오 총리 답방 등 셔틀외교 지속과 고위급 교류·소통을 활성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반일 프레임’ 고착화 전략...박홍근은 국정조사 추진, 이재명은 독도법 개정안 대표 발의

그러나 민주당은 내년 총선까지 ‘반일 프레임’을 끌고가기 위한 행보에 돌입하고 있다.

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는 21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한일정상회담과 관련 "신(新) 을사조약에 버금가는 대일 굴욕외교를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며 "민주당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정조사 추진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박 원내대표는 "치욕적 조공과 굴욕 외교로 일본의 환대만, 그리고 친교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윤석열 정권의 단견이야말로 완벽한 식민지 콤플렉스"라면서 "그러니 국민들이 윤석열 대통령, 박진 외교부 장관, 김성한 안보실장, 김태효 안보실 1차장, 정진석 의원을 일컬어 신(新) 을사오적이라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가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가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명 대표는 이날 ‘독도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하는 내용의 독도의 지속가능한 이용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10월 25일인 독도의 날을 법률에 따른 공식 기념일로 지정해 독도 수호 의지를 알려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번 개정안은 이 대표의 세 번째 대표 발의 법안이다.

국정조사와 관련 입법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반일 프레임’을 지속적인 어젠다로 키워나가려는 전략에 돌입한 것이다.

이에 앞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이 20일 오후 전주 풍남문 광장에서 ‘검찰독재 타도와 매판매국 독재정권 퇴진 촉구’ 시국미사를 봉헌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윤석열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성명서를 통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강제동원 배상안은 일본 극우 인사들의 망언에 뒤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며 "일본으로 건너가 아낌없이 보따리를 풀었지만, 가해자의 훈계만 잔뜩 듣고 돌아왔다. 오늘 대통령의 용퇴를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의 정면돌파 전략 성패, 한일 간 ‘실용주의적 후속조치’에 달려

민주당과 친야 단체의 ‘반일 프레임’ 몰이가 지속적인 효과를 발휘할지는 향후 한일관계 복원의 구체적 성과여부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즉 앞으로 성과가 가시화될수록 민주당의 반일 프레임을 정면돌파한다는 윤 대통령의 전략은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아진다. 당장은 비판 여론이 고조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가 생길 것으로 정부 여당은 판단하고 있다.

특히 윤 대통령은 21일 발언에서 한일정상회담의 후속조치를 세밀하게 설명, 자신의 선택이 ‘실리주의 외교’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양국의 공동 이익을 논의하는 정부 간 협의체 조속 복원, NSC 차원의 ‘한일 경제안보대화’ 출범, 일본의 반도체 관련 3개 소재 부품 수출 규제 조치 해제, 상호 화이트리스트의 신속한 원상회복 등을 향후 진행될 구체적 성과로 거론했다.

또 “용인에 조성될 예정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일본의 기술력 있는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을 대거 유치함으로써 세계 최고의 반도체 첨단 혁신기지를 이룰 수 있다”면서 “한국산 제품 전반의 일본 시장 진출 확대에도 기여하고 일본 국민의 한국 방문이 늘어나면 내수 회복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외교 안보 차원에서는 2019년 한국이 취한 GSOMIA 종료선언으로 인한 불확실성 제거, 한일중 3국 정상회의 재가동을 위한 공동 노력, 한일 정상이 수시로 만나는 셔틀외교 등의 구체적 성과를 거론했다.

윤 대통령의 정면돌파 전략의 성패는 이러한 후속조치의 가시화 여부에 달려있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