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에게 미국 문화의 기원에 대하여 물어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아래와 같이 답변한다.

"자유를 찾아 전세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 노력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위대한 전통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미국의 전통 문화가 영국,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에서 온 초기 이주민들의 사상과 생활양식에 기반을 두고 있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 데이비드 피셔(David Fischer)의 연구에 의하면 미국의 모태가 되는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에는 본국에서 이주해 온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네 부류의 집단들이 각각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이민 집단은 런던 북동쪽의 이스트 앵글리아 - [지도1]의 Norwich 주변 지역 - 에 살다가 1629년에서 1640년 사이에 미국 동북부의 매사추세츠 - [지도2]의 Boston 주변 지역 - 로 이주했던 청교도들이다.

두 번째 이민 집단은 런던의 남서부 지역 - [지도1]의 London에서 Bristol 사이의 지역 - 에 살다가 청교도 혁명 이후 올리버 크롬웰의 철권 통치를 피하여 1642년에서 1675년 사이에 미국 남부의 버지니아 - [지도2]의 Williamsburg 주변 지역 - 로 이주해 온 왕당파들이다.

세 번째 이민 집단은 잉글랜드 노스 미들랜드 - [지도1]의 Leicester와 Sheffield 사이의 지역 - 에살다가 1675년에서 1725년 사이에 미국 동북부의 펜실베니아와 뉴저지 - [지도2]의 Philadelphia 주변 지역 - 로 이주해 온 빛의 아들들(Children of Light), 즉 퀘이커(Quaker) 교도들이다.

마지막 이민 집단은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및 북부 아일랜드 - [지도1]의 Carlisle 이북 지역 - 에 살다가 1717년부터 1775년 사이에 미국 셰넌도어 계곡과 앨러게니 대지 - [지도2]의 연한 갈색 부분 중 버지니아 서쪽 지역 - 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지도 1] 영국 지도
[지도 2] 영국령 북아메리카

 

1. 청교도들의 뉴잉글랜드 이주

1629년부터 개신교 중 칼뱅파에 속하는 청교도들에 대한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의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20,000명의 이스트 앵글리아 출신 청교도들이 현재 미국의 매사추세츠로 도피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신대륙에 제대로 된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를 언덕 위의 도시(a city on a hill)라고 불렀다. 현재 '언덕 위의 도시'라는 청교도들의 구호는 다른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특수성을 강조할 때 사용되고 있다.

매사추세츠에 이주한 청교도들은 주로 중산층이었지만 다른 종파의 기독교도들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단조롭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눈 앞의 돈벌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현대 미국인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청교도들은 자녀 교육에 열성적이었는데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는 습관을 들이게 했다. 그리고 무지한 상태의 아이들은 악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엄격하게 감시하고 훈육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매사추세츠를 시작으로 뉴잉글랜드 전역으로 퍼져 나간 청교도들의 '자유'는 다른 기독교 종파들 - 카톨릭 또는 성공회 - 로부터 탄압받지 않을 자유, 즉 신앙의 자유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종파들의 도덕적 기준이 느슨하다는 이유로 타 종파에 대하여 매우 배타적인 모습을 보였다.

미국 독립 이전까지 영국인들은 대서양 건너편의 뉴잉글랜드 사람들을 어처구니 없는 촌놈들 (Yankee Doodle)이라고 부르며 한심하게 생각했는데 미국 남부인들도 동일한 시각으로 이들을 바라 보았다. 양키(Yankee)라는 표현은 미국 독립 이후에는 미국 남부인들이 뉴잉글랜드인을 포함하는 미국 북부인들을 얕잡아 통칭하는 속어가 되었다.

2. 왕당파들의 버지니아 이주

1649년 청교도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이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선포하자 왕당파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해외로 도피한다. 그들 중 일부가 미국으로 도피하는데 성공회 신자들은 주로 버지니아로 카톨릭 신자들은 주로 메릴랜드로 도피했다.

1658년 크롬웰 사후에도 잉글랜드에서 버지니아로의 이민이 계속되는데 이들은 상류층 가문의 차남 이하 자제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토지 소유자였던 아버지가 장남에게 모든 토지를 물려 주고 사망하면서 가문 내 입지가 흔들리던 차남 또는 삼남들이 북아메리카에 자신만의 영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잉글랜드의 주류에 속하던 사람들, 그리고 런던 주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이주해 온 버지니아는 모국의 문화가 그대로 이식된 대서양 건너편의 잉글랜드였다. 크롬웰의 탄압을 피하여 이주했던 사람들은 그냥 유럽 대륙으로 도피했었더라면 지금 잉글랜드에서 살고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그 이후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모국의 큰 형 못지 않게 잘 살고 싶다는 바람에서 철저히 영국적인 삶을 살아가려 했다.

이들은 상류층 출신이었기에 많은 하류층 사람들이 계약제 하인 자격으로 함께 버지니아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는 소수의 상류층과 다수의 하류층으로 이루어진 남부 특유의 사회 구조의 시발점이 되었다.

버지니아로 이주한 왕당파들은 하인들까지 자신의 가족으로 생각하였기에 가족간 유대는 느슨하였고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을 다르게 교육시켰다. 남자 아이들의 경우 성장기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데 교육의 목표를 두었지만 여자 아이들의 경우 여성스러움, 세련됨, 화술 등 대인관계 기술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자녀들이 성장한 이후에는 버지니아 신사들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스스로 인내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자의식을 심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왕당파 후손들로 이루어진 버지니아 사람들은 신사 숙녀들만 글을 읽고 쓰면 된다고 생각하여 상류층 자제들의 교육에 있어서는 아들의 경우 영국 유학까지 보내는 등 매우 열성적이었지만 하인들이나 노예들에게 글을 가르치면 제대로 알지도 못 하는 인간들이 사회를 어지럽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류층 자제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하려 하지 않았다.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한 미국 남부인들의 '자유'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신사 숙녀로 자라난 우리들이 다른 하층 계급 사람들을 지배하고 이끌어 갈 자유를 의미했다. 따라서 백인 상류층이 백인 하류층을 통솔하고 백인들이 흑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인간들 사이의 차별 의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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