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폭동·반란이 일어나고 진압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좌익 진영에서는 이 모든 희생이 군과 경찰, 우익 청년단의 학살 만행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모든 희생이 군·경찰·우익 청년단 소행이라는 주장은 놀라운 역사 왜곡이다. 좌익 빨치산들도 엄청난 양민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 왜 하필 1948년 4월 3일 제주였을까?

4월 3일이다. 제주가 비극의 땅으로 변했던 날이다.

이 땅에선 봄이 올 때마다 정치적 격변이 유난히 많았다. 1960년의 4·19가 그랬고, 1980년 서울의 봄과 5·18 광주가 그랬다.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은 그래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예언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 잔인한 달에도 죽은 땅은 라일락을 피워 올리고, 기억과 욕망으로 뒤섞여 잠든 뿌리는 봄비에 뒤척인다(T. S 엘리엇, ‘황무지’ 중에서). 1948년 4월 3일 발생했다는 제주 4·3사건은 무엇이고, 대체 그 무렵 제주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나라 입법 전문가들이 제정한 4·3특별법은 제주 4·3사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 놓았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눈을 까뒤집고 특별법 조항을 살펴봐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기 위한 폭동·반란”이란 기초적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특별법의 정의에 의하면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소요와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무고한 희생을 당했을 뿐이다.

희생을 당했으니, 당연하게도 보상을 규정하고 있다. 보상금 규모는 사망 또는 행방불명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은 9천만 원, 후유장애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은 9천만 원 이하의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장해등급 및 노동력 상실률을 고려하여 위원회가 결정한 금액을 제공하도록 되어 있다.

무슨 이유에서 제주에서 소요와 무력충돌이 일어났는지, 희생자들은 왜 희생을 당해야 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숱한 이념 편향 인사들의 선전선동 덕분에 제주 4·3은 인민항쟁이니, 공권력의 무자비한 주민 학살 만행이니 하는 가짜 사실들이 덧씌워졌다.

야당과 좌익 진영은 그러한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리는 법까지 만들겠다고 국민을 상대로 공갈 협박을 일삼는다. 참으로 잔인한 봄이 맞기는 맞는 것 같다.

#. 제주 4·3의 외적 요인: 1948년 2월 19일 캘커타 회의

그렇다면 제주 4·3사건은 왜 하필 1948년, 제주에서 발생했던 것일까?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을 따져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었던 미국과 소련 간의 화해가 파탄 난 것은 1947년 봄이다. 이 무렵 동유럽과 발칸반도에서 격렬하게 추진되는 소련의 팽창정책과 공산화 정책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 및 봉쇄정책을 선언한다. 이것이 1947년 3월 12일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이다.

미국은 서유럽으로 향하는 소련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1947년 6월 5일 먀셜 플랜을 가동했다. 유럽 경제를 부흥시켜 공산주의 방파제로 삼기 위해 막대한 달러를 푸는 전략이었다. 1949년 4월 4일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여 미국과 서유럽의 집단안보를 강화했다.

이에 맞서 소련은 공산권 국가 간 경제협력기구인 코민포름(Cominform, 공산당·노동자당 정보국)을 창설했다. 미국이 유럽 방어 전략으로 나오자 소련은 아시아로 눈을 돌린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개회사에서 안드레이 즈다노프 소련 최고회의 주석은 “우리는 아시아의 민족주의 운동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말은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여 폭동 반란을 일으켜 공산화하겠다는 뜻이다.

미국이 서유럽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 나서자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아시아의 민족주의 운동 적극 지원"을 선언했다.
미국이 서유럽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 나서자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아시아의 민족주의 운동 적극 지원"을 선언했다.

1948년을 전후하여 소련은 아시아 일대의 공산당에게 무장투쟁을 지령하여 민족해방투쟁(Wars of National Liberation)을 본격화하게 된다. 그러한 지령 중의 하나가 1948년 2월 19일부터 인도의 캘커타에서 열린 ‘동남아 청년대회’였다. 소련공산당의 비밀 지원 하에 개최된 이 대회에는 월맹(북베트남), 인도네시아, 실론(스리랑카), 버마, 인도, 파키스탄, 네팔, 필리핀, 말라야 등 아시아 국가들이 참가했다. 이밖에도 옵서버로 북한을 위시한 8개국이 초빙되었다.

캘커타 회의에 참여했던 각 나라들에 무장투쟁이 지령되었고, 회의 이후 수개월 내에 말레이반도,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남한에서 일제히 무장 폭동·반란이 일어났다. 1948년 남한에서 발생한 제주 4·3 폭동, 국군 14연대 반란사건도 캘커타 회의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김점곤의 견해다(김점곤, 『한국전쟁과 노동당 전략』, 박영사, 1973, 81~82쪽).

#. 제주 4·3의 내적 요인: 남로당 지도부 월북

남로당은 1947년 5월 미군정의 행정명령 제2호에 의해 전위대인 민주청년동맹이 해체되었다. 대다수 당 간부가 검거되거나 구속영장이 발부되면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박헌영 이하 대부분의 수뇌급 간부들이 월북했다. 하지만 월북한 남로당 간부진 중 극소수에게만 평양 정권에 참여 기회가 주어졌을 뿐, 대다수는 권력에서 소외되었다. 그들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식객 취급을 받아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해주에서 무위도식하는 신세가 되었다.

남로당이 북한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남한 내에서 ‘주목할 만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이 남한에 확고하게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북로당 권력층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들도 놀랄 만한 화끈한 투쟁이 필요했다.

1948년 1월 초 한국에 도착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 가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총선 실시가 가시화되자 월북해 있던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은 남한의 총선을 폭력을 동원해 저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3월 1일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5월 9일(후에 5월 10일로 변경) 38선 이남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남로당은 즉각 “남한만의 단독 총선을 적극적으로 보이콧 한다”고 선언했다. 이들이 언급한 ‘적극적 보이콧’란 단순히 총선에 참가하지 않거나 방관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수단 방법을 총동원하여 선거를 파괴하고 방해하겠다는 메시지였다.

#. 왜 하필 폭동 장소가 제주도였을까?

남로당이 대대적인 무장폭동 장소로 택한 곳은 제주도였다. 당시 남로당 간부였던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남로당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를 폭동 장소로 택한 이유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해방 직후부터 공산당의 조직 활동이 활발했고, 공산당의 선전과 조직 활동으로 도민의 사상이 붉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박갑동, 『박헌영-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도서출판 인간사, 1983, 198쪽).

제주도는 일제 시대에 일본을 통해 좌익사상을 접했다. 이때부터 제주에 마르크스주의 연구 클럽이 조직되었고, 한국공산당 지부도 결성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섬의 학생들에게 널리 퍼져 제주에서는 제주청맹사건, 혁우동맹 사건, 야체이카 사건 등 사회주의 비밀조직을 결성했다가 탄압을 받았다.

진압을 나온 군에 체포된 제주 빨치산. 해방공간에서 제주도는 남로당 세력이 비교적 온존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남로당 중앙당은 제주에서 폭동을 일으켜 남한 제헌의원 선거를 방해하라고 지령했다.
진압을 나온 군에 체포된 제주 빨치산. 해방공간에서 제주도는 남로당 세력이 비교적 온존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남로당 중앙당은 제주에서 폭동을 일으켜 남한 제헌의원 선거를 방해하라고 지령했다.

존 메릴은 해방 후 제주도민의 80% 정도가 적극적 또는 소극적인 남로당 지지자였다고 말한다(존 메릴 지음, 이종찬·김충남 공역, 『한국전쟁의 기원과 진실』, 두산동아, 2004 64~69쪽). 섬이라는 고립된 지역적 특성 상 지도급 인사가 공산주의 사상에 감염되면 지연(地緣) 혈연(血緣) 관계나 협소한 공동체 사회에 따른 배타적인 도민의식으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이 불온한 사상에 오염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외래인(본토인)에 대한 피해의식은 뿌리가 깊어 본토민에 대한 제주도민의 반항적 단합심은 남로당 조직을 단시일 내에 팽창시켰다(김점곤, 앞의 책, 145쪽). 제주도는 사실상 인민공화국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4·3 사건이 제주에서 일어난 직접적 원인이다.

#. 남로당 중앙당 지령에 의한 폭동·반란

남로당 중앙당은 2·7 투쟁이 예상과는 달리 별 성과 없이 끝나자 조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제주도위원회에 연락책(이재복·조경순)을 보내 “폭동을 일으켜 단선·단정을 강력히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 지령은 남로당 제주도위원장 안세훈이 경찰에 피검중이어서 조직부장 김달삼에게 전달되었다(현길언, 『섬의 반란, 1948년 4월 3일』, 백년동안, 2015, 45쪽).

남로당 중앙당은 당 군사부 책임자 이중업과 군내의 프락치 책임자 이재복, 폭동 두목인 김달삼의 장인이며 중앙선전부장 강문석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현지에서 폭동을 부추겼다.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이 제주도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임을 증명하는 자료가 경찰이 노획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남로당 제주 지부는 중앙당에서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령이 내려오자 1948년 3월 15일 경 북제주군 조천면 신촌리에서 당 상임위원회를 열었다.

그들은 무장 반란을 일으킬 것인지 말 것인지 장시간 논의 후 13대 7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밝힌 반란 이유는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 둘째 단선 단정 반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 적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시간에 전 도민을 총궐기시키는 무장 반격전을 결정”했다(문청송, 『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 17쪽).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및 남로당 제주지부 당 상임위의 결정에 의해 발생한 극렬 폭동으로 제주도 전역에서 투표함이 불타고 행정기관이 파괴당했다. 제주도 선거관리 요원 중 절반이 사직하거나 빨치산에게 납치되었다. 투표를 방해하기 위해 빨치산들은 전화선을 끊고 교량을 폭파했으며, 차량 통행을 막기 위해 도로를 바윗덩어리로 차단했다.

제주도내 3개 선거구 중 2개 지역에서 등록된 유권자의 절반이 투표를 하지 못했다. 또 20%의 투표소에서는 투표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군정은 투표율이 절반에 미치지 못한 두 선거구의 선거를 무효화했다. 제주도에 배정된 제헌의회 2개 의석은 1년 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다가 1949년 보궐선거로 채웠다.

#. 제주 4·3 희생자를 들여다보니…

1948년 4월 3일 좌익 빨치산들이 일제히 폭동을 일으켜 선거가 중단되자 미군정은 1,700여 명의 경찰과 800명 규모의 국방경비대 병력을 제주도로 급파하여 토벌에 나섰다. 새로 9연대장에 취임한 박진경 중령은 3단계 전략에 따라 효율적인 진압작전을 실시했다.

제주 4·3의 진압 과정에서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와 희생자가 발생했다. 도내 400여 마을 중 259개 부락이 전소되고 1만 2,250호의 가옥이 불에 탔으며, 12개 면사무소 중 5개, 12개 경찰관서, 학교 34개소, 우체국 1개소가 소실되었다. 섬 인구의 10%에 이르는 3만여 명 이상이 희생되고 이재민 10만 명이 발생하는 등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게 된다.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가 파악한 희생자 분포지도.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가 파악한 희생자 분포지도.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폭동·반란이 일어나고 진압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좌익 진영에서는 이 모든 희생이 군과 경찰, 우익 청년단의 학살 만행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모든 희생이 군·경찰·우익 청년단 소행이라는 주장은 놀라운 역사 왜곡이다. 좌익 빨치산들도 엄청난 양민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근거를 소개한다.

폭동·반란이 벌어진 4월 3일 첫날, 좌익 빨치산들은 애월면 신엄 지서장 문익도 경감의 머리를 톱으로 잘랐고, 남원 지서 협조원 방성화는 폭도들이 쏜 총에 복부를 맞아 즉사했다. 김석훈은 도끼에 맞아 팔이 잘렸고, 고일수 순경은 칼로 난도질을 당하고 목이 잘렸으며, 함덕지서 지서장 강봉현은 죽창으로 난도질당해 죽었다. 화북 지서 협조원 이시성이 불에 타 죽고, 김장하 경찰 부부가 대창에 찔려 죽었다. 외도 지서 선우중태 순경이 혼자 숙직하다 무장대가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송효순, 『붉은 대학살』, 갑자문화사, 1979, 101쪽).

피에 굶주린 빨치산들은 순경 1명의 목에 1만 원, 경사는 2만 원, 경위 이상은 3만 원, 경찰 지휘관은 100만 원의 현상금을 걸고 경찰관 살해를 부추겼다. 또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잔악행위가 곳곳에서 자행됐다.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은 제주도 폭동과 관련한 진상발표를 했는데, 「대동신문」(1948년 6월 9일)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948년 4월 18일 북제주군 조천읍에서 빨치산들이 육순이 넘은 경찰관의 부모를 목 졸라 죽인 후 사지를 절단했고, 임신 6개월이 된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형수를 때려죽였다. 4월 20일에는 임신한 경찰관 부인의 배를 갈라 죽였고, 이틀 후인 4월 22일에는 모슬포에서 경찰관의 아버지를 총살한 후 수족 절단, 임신 7개월 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 채로 생매장했다.

5월 19일에는 제주읍 도두리에서 마을 부녀자 11명을 체포하여 눈오름이라는 삼림지대로 끌고 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빨치산 50여 명이 윤간한 다음 총검과 죽창, 일본도 등으로 부녀자의 젖가슴과 배, 음부, 볼기 등을 찔러 숨이 넘어가기 전에 생매장을 했다.’(류형석, 『삼팔선(제3권)』, 삶과 꿈, 2016, 204~205쪽)

군과 경찰, 우익 청년단은 이런 끔찍한 일들을 자행한 폭도들을 국가의 명령(당시엔 국가가 수립되기 전이었기에 통치의 주체인 미군정의 명령)에 의해 정당하게 토벌한 것이다. 끝까지 저항하다가 사살당한 폭도나, 폭동·반란의 와중에 행불된 자들도 특별법에 의해 국가가 배상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폭동·반란자들의 그 후

폭도 두목 김달삼은 북한 정부 수립을 위한 지하 선거를 위해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1948년 8월 2일 성산포에서 어선을 타고 제주도를 탈출, 목포에 도착한 그는 38선을 넘어 월북했다. 김달삼의 월북으로 이덕구가 제2대 제주 인민유격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김달삼은 평양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제주도 폭동 진상을 보고하여 대의원들의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김일성, 허헌 등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헌법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9월 9일 북한에서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제주도 빨치산들은 또 다시 활동을 개시했다. 1948년 10월 23일 제주도 북방 50여 개소에서 봉화가 오르자 곳곳에서 인공기가 게양되었다. 다음날 이덕구는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한동안 격렬하게 투쟁하던 이덕구는 제주도를 탈출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 지리산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과 합류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하산 도중인 1949년 6월 7일 새벽 3시, 제주도 용강리에서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경찰은 자수를 권했으나 총을 쏘며 반항하자 집중사격을 가해 사살했다. 이덕구가 사살된 후 제3대 사령관은 김의봉이 맡았다.

1949년 6월 7일 사살된 이덕구의 시체가 십자형 틀에 묶여 제주 관덕정 광장에 전시됐다. 군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겉옷 주머니에 수저가 꽂혀 있었다고 한다.
1949년 6월 7일 사살된 이덕구의 시체가 십자형 틀에 묶여 제주 관덕정 광장에 전시됐다. 군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겉옷 주머니에 수저가 꽂혀 있었다고 한다.

1946~48년 미군정이 남로당 간부진에 체포령을 내리자 상당수 간부들이 월북했다. 또 1948년 4월의 남북협상, 8월 25일의 해주 지하 선거를 위해 남로당원이 대거 월북했다. 북로당은 이들을 냉대했고, 당원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월북자들이 북한에서 왕따 신세가 되자 박헌영은 월북한 남로당원을 강동정치학원으로 보내 게릴라 훈련을 시켰다. 이들은 남한에서 크고 작은 일이 발생할 때마다 남파되었다.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가 여수·순천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박헌영은 11월 4일 강동정치학원에서 180여 명의 빨치산을 선발, 양양과 오대산 지구로 남파했다. 이런 식으로 강동정치학원을 수료한 빨치산 게릴라들은 1948년 1월 1일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 2년 7개월 동안 4,000여 명이 남파되었다. 이들은 남한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빨치산의 무장투쟁을 지도하거나, 유격전을 전개했다.

월북했던 김달삼도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원 500명으로 조직된 549부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그는 영양·영덕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토벌군에 쫓겨 북으로 퇴각하다가 정선군 지경리에서 사살 당했다. 대부분의 남로당 월북자들은 북에서도 냉대 받고 쫓겨나 남한으로 침투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토사구팽을 당한 것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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