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체사레 보르자는 마키아벨리에 의해 군주론의 모델로 제시된 인물이다. ‘새로운 군주’의 모범이라며 새로 권좌에 오른 군주라면 반드시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부언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기만과 술책을 통해 교황령의 군주들을 신속하게 몰아내고 자기 영토로 만들어가는 능력에 경탄했던 것 같다. 그에게서 군주론의 영감을 얻고 그를 불멸로 만들었다. 

  체사레는 스페인 출신인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아들이었다. 처음에는 교황의 뒤를 잇기 위해 추기경이 되었다. 그러나 추기경을 버리고 군인의 길로 나섰는데 아버지를 돕고 자신의 새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다. 

  로마에서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교황들이 자리를 보전하기는 싶지 않았다.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자신의 삼촌이자 자신을 추기경으로 발탁한 갈리스토 3세교황이 죽었을 때, 로마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의 폭동이 일어나서 형이 죽임을 당했고 본인도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진 적이 있었다.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때도 교황 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경험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자신의 신변을 지킬 강력한 교황군이 필요했다. 또 믿을 수 있는 측근에게 군대를 맡겨야 했다. 처음에는 둘째 아들 후안에게 그 역할을 맡겼으나 후안이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체사레 외에는 교황군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체사레는 교황보다 왕들이 힘이 세지고 있는 시대에 속세에서 자기역할을 찾고 싶어 했다. 샤를 8세의 침입 때 교황의 지위가 얼마나 취약한지, 무력이 없으면 성직도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성직자가 낳은 사생아라는 신분 때문에 교황이 되기도 힘들었다. 추기경이 될 때도 서류를 조작해서 어머니 반노차의 전남편을 공식 아버지로 기재한바 있다<문명이야기5-2>. 체사레는 교황군 총사령관이 되기 위해 막대한 연봉이 보장되는 추기경직을 버렸다. 

  대신에 동생 후안이 물려받게 되어있던 나폴리내의 영지를 체사레가 받았다. 나폴리의 정식 공주와 결혼해서 나폴리왕의 계승권을 가지고 싶어 했으나 공주는 교황의 아들과 결합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폴리왕도 정식 공주와의 결혼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실망하고 있던 체사레에게 프랑스 쪽에서 기회가 왔다. 

  마침 샤를 8세가 갑자기 죽고 루이 12세가 프랑스 왕이 되었는데 왕은 이혼을 원했다. 현 왕비인 잔 드 프랑스는 루이11세의 딸이었으나 곱추였고 자식을 낳지 못했다<시오노나나미, 체사레 보르자>. 그래서 프랑스왕은 브르타뉴 공국이라는 큰 지참금을 갖고 있는 전 왕비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왕이 이혼을 하려면 교황의 승인이 필요했는데, 교황은 체사레를 위한 영토와 신부감이란 조건을 내걸었다. 루이왕은 쾌히 승낙하고 나바라의 샤를로트와의 결혼을 주선했다. 

  체사레는 이 결혼으로 발렌티노 공작이 되었다. 관작에 걸맞게 잘생겼고 용기와 날카로운 지성도 갖고 있었다. 교황의 아들이란 이점도 최대한 활용해서 프랑스를 교황청의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밀라노와 나폴리를 공략하려는 프랑스와 동맹이 됨으로써 이탈리아는 불행해졌다.  

  체사레는 루이12세를 따라 밀라노 공략에 참여했고, 프랑스왕으로부터 군대를 빌려서 교황령의 독재자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교황령은 이탈리아 중부의 ‘로마냐’ 지방으로, 관리인들은 교회로부터 통치권한과 교황대리라는 관명이 주어졌고 연공금을 납부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불교사찰의 땅을 경작하던 큰 사하촌(寺下村)이라 보면 될 것 같다. 그러나 아비뇽 유수기간과 2명 이상의 교황이 대립했던 교회분열 기간을 계기로 연공금을 납부하지 않고 사실상 독립하고 있었다.

  체사레는 교황령의 태만한 관리자들을 몰아내고 교회의 것을 교회가 되찾겠다는 대의명분을 내걸었다. 알렉산데르 6세 교황도 “교회의 영토를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폭군들은 물러나라”는 교서를 발간해서 체사레를 도왔다. 

  교황령 정복전쟁과 새로운 국가건설

  체사레의 첫째 목표는 카테리나 스포르차가 다스리는 이몰라와 포를리였다. 그녀의 조부는 일개 용병대장에서 밀라노 공국을 차지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였다. 그녀는 여자지만 전쟁을 잘 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하지만 정치는 잘 못했던 것 같다. 폭정으로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녀는 체사레의 공격에 끝까지 저항했으나 주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해 패배하고 로마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체사레는 그녀의 영토에서 자행되고 있던 억압과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해방자로 여겨졌다. 

  이어서 페사로 카멜리노 우르비노 파엔차 등 11개 소국을 점령했다. 이탈리아는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의 4대강국과 합종연횡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밀라노는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었고, 나폴리는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쫓겨난 후 혼란스러웠고,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에서 오스만투르크와의 싸움에서 밀리고 있어 이탈리아 내부 문제에 전력을 쏟을 수 없었다. 체사레는 프랑스왕 루이12세의 후원하에 정복전쟁을 수행하고 있다고 홍보해서 교황령의 소군주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 위협과 내부분열 유도, 외교적 압박을 병행해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소 군주들이 전투다운 전투 없이 스스로 물러났다. 그만큼 그들의 통치가 민심과 이반되어 있었다. 리미니의 판돌포는 고액연금이란 뇌물을 받고 물러났고, 평판이 좋지 않았던 페사로의 조반니 스포르차는 아무 보장도 없이 그냥 쫓겨났다. 피사는 자발적으로 체사레의 통치를 청했다. 

  다만 파엔차는 달랐다. 15세 소년인 아스토르 만프레디가 영주였는데 로마냐의 다른 소국들과는 달리 파엔차는 비교적 선정이 베풀어지고 있어 소년 영주는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아스토로는 가정적 불행으로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왕좌에 올랐으나 이 지역 유지들에 의해 키워지고 보살펴져서 사실상 지역유지들이 공동 통치하고 있었다. 4개월에 걸쳐서 체사레는 총공세를 펼쳤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파엔차 측도 보급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파엔차는 아스토르를 자유롭게 해달라는 조건을 내걸면서 항복을 요청했고, 체사레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파엔차 민중의 안전을 보장하고 소규모 군대만 주둔시키며 군대이외의 요직은 파엔차인의 손에 맡기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만프레디 형제는 자유가 부여되었는데도 스스로 체사레를 따라나섰다. 어린 눈에는 체사레가 위대해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두 형제는 2년후 체사레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파엔차를 완전히 자기나라로 만드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체사레는 그 다음 목표로 모범적인 교황국가인 우르비노를 공략했다. 예상을 벗어난 공격이었다. 카메리노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기습적으로 공략했는데(聲東擊西), 선정을 베풀고 있었고 연공금도 잘 내고 있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점만 빼고는 정복할 명분이 없었다. 파엔차와 우르비노의 정복은 체사레가 비난받을 소지가 많았다. 두 소국을 정복한 의도를 곰곰이 뜯어보면 그가 군주국을 바라고 있었다는 강한 인상을 받는다. 자기가 점령한 모든 지역의 주요 토목시설에 대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문을 구한 것도 국가 건설에 목표를 뒀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체사르는 1502년 8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모든 지역의 자유통행을 허가하고 공국내의 성채, 요새, 시설의 토목공사는 진행 중일지라도 다빈치와 협의하고 그의 지시를 따르도록 포고령을 발한 바 있다<시오노나나미, 나의친구 마키아벨리>. 

  쫓겨난 소군주들의 재기노력 

  한편 쫓겨난 소군주들이 재기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프랑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밀라노는 프랑스에 넘어갔고 나폴리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군사력에서는 약소국으로 전락해있었다. 루이 12세가 밀라노에 도착하자 로마냐의 쫓겨난 소 군주들이 몰려와서 값진 선물과 함께 영지를 돌려받기 위해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체사레가 나중에 도착한 후 왕과의 친밀성을 과시하자 그들의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 
  
  용병대장들의 반란

  곧이어 체사레가 고용한 용병대장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도 각자 조그만 영지를 갖고 있었다. 우르비노 공국 등 모범적인 교황령까지 공략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도시도 곧 체사레의 전리품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페루지아의 쟌파올로, 볼로냐의 벤티올리오, 오르시니 형제, 아레쪼를 포기하도록 강요받은 비텔리가 반란을 공모했다. 체사레는 로마냐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군대를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스페인출신 3인방(돈 미켈레토, 우고 몬카다, 레미로 데 롤카)에게 집결시켰다. 그러나 반란군에게 대패했다. 1만명이 넘는 반란군에 비해 열세인 체사레군은 자연히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체사레는 알렉산데르 6세라는 엄청난 빽이 있었다. 교황이 뒤에 버티고 있었기에 프랑스, 스페인, 베네치아가 체사레 문제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반란군의 약점이 드러났다. 여러 집단의 연합이었기에 의견통일이 어려웠고 의사결정이 지연되었다. 재빠른 공격을 원한 그룹도 있었지만, 일부는 협상을 원했다.   

  체사레는 이러한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해서 시간을 끌면서, 교황의 자금지원으로 6천명의 군대를 모집했다. 그 사이에 알렉산데르 교황이 반란자들과 개인적으로 협상을 진행하며, 반란자들이 만족할 약속들을 제시하여 상당수의 사람들이 도로 복종하게 만들었다. 1502년 10월 말에는 모두가 체사레와 화해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문명이야기 5-2>. 

  체사레는 화해의 표시로 프랑스 군대를 철수시키고 반란자들이 문제 삼던 측근을 처형했다. 제갈공명이 기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 책임을 물어 측근인 마속을 처형(泣斬馬謖)했듯이, 체사레는 로마냐의 관리 책임자인 레미로 데 롤카를 참수했다. 1502년 12월 26일 그의 시체가 체세나 시의 광장에 두동강이 난 채로 전시되었고, 마키아벨리는 이 잔인한 조치를 시민들의 마음을 얻는 행위라고 극찬했다. 레미로는 로마냐 지방을 점령한 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우리나라 5공화국 초기의 삼청교육대 같은 무리한 방법을 많이 동원했을 것이다. 당연히 지역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을 것이다. 반란군들은 불만을 터뜨리는 주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책임자 처벌을 거사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체사레의 최측근을 제거하는 이점도 있었다. 체사레는 반란군의 주장을 들어주는 식으로 자기의 최측근을 효수했다. 로마냐 사람들에게는 그동안의 잘못은 체사레가 아니고 레미노의 책임이라는 메시지를 주면서…. 그 뒤 반란자들이 체사레의 진정성을 믿고 협상테이블에 나오자, 안심하는 그들을 급습하여 처형했다. “과거에 다른 사람들에게 덫을 놓았던 악당들에게 그렇게 덫을 놓는 것은 적합한 일이라”고 체사레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고<문명이야기5-2>, 반란자들을 제거한 체사레의 권모술수를 마키아벨리는 높이 평가했다. 
 
  체사레의 몰락과 죽음

  그러나 체사레의 전성기는 짧았다. 1503년 8월 교황과 체사레는 동시에 말라리아에 걸려 의식을 잃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체사레는 회복했으나 깨어나 보니 세상이 변해 있었다. 새 교황을 선출해야 했는데, 결정적인 패착은 알렉산데르 6세의 평생 숙적이었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로 추기경을 다음 교황으로 지지한 것이다. 교황군 총사령관직과 로마냐 공국을 인정받는 조건이었다. 체사레는 정치에서 배신이 밥 먹듯이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알았고 자신도 마키아벨리가 탄복할 정도로 배신을 잘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로 인해 지난 11년간 고배를 마셔온 로베로 추기경이 자신 편이 될 것이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새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가 로마냐 지역을 공격해오자 먼저 체사레에게 방어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그가 임지로 떠나려고 하는 순간에 마음을 바꾸어 체사레를 체포해서 감금시켰다. 대신 교황군 사령관직과 로마냐의 방어는 율리오 2세의 조카이자 우르비노 공국의 주인인 귀도발도 델라 로메로에게 맡겼다. 체사레는 로마냐를 지키고 있는 부하들을 항복시킨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친구인 곤짤로 코르도바가 책임자로 있는 나폴리로 도망갔으나 다시 한 번 배반을 맛보게 된다. 율리오 2세 교황의 강요를 받은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왕의 지시로 스페인으로 이송되어 감금되었다. 2년 만에 스페인 감옥에서 극적인 탈출을 한 후 자신의 처가인 나바라왕국으로 가서 그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다시 일어설 발판을 마련했으나 재기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했든지, 전투중 적진에 깊숙이 진격하다가 포위되어 죽임을 당했다. 31살의 나이에 아내와 어린 딸을 재회하지 못한 채 맞이한 비참한 죽음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체사레 평가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저지르는 기만, 잔인함, 범죄 등은 ‘명예로운 기만’이라며 체사레의 잔인함과 권모술수를 높이 평가했다<문명이야기 5-2>. 체사레는 당시 2년만에 12명의 군주를 몰아내고 로마냐의 도시들을 호령하며 수백 년 만에 가장 공정한 통치를 제공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장들을 함정에 빠뜨려 기민하고 단호하게 제거했다. 체사레는 승승장구했고 이탈리아의 통일을 거의 이룰 뻔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데르 6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체사레가 프랑스나 스페인에 맞설 수 있는 이탈리아 통일국가를 건설했을 것으로 기대했다.<나무위키>. 마키아벨리의 평가는 이러한 희망이 반영된 결과라 봐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자기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주군을 찾아서 체사레를 찾아왔고 거의 1년간 그를 위해 일했다. 로마냐 공국이 오래 유지되었다면 소국가로 쪼개져 있었던 도로, 수로 등 인프라를 통합해서 이탈리아 전체로 확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체사레의 몰락을 아는 후대인들은 그의 평가가 주관적이고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을 잘 안다. 마키아벨리 자신도 젊은 시절이라 세상을 단순하게 봤을 수도 있고 욱일승천하는 그의 기세에 도취되었을 것이다. 체사레는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궁극적으로 그 힘은 아버지인 교황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돈을 지원했고 친프랑스 정책 등 외교의 후원자였다. 교황을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도 부여받았다. 상대방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체사레에 대한 나쁜 평판

  체사레에 대한 평판은 대단히 나빴는데 잔인한 것이 첫째 원인이었다. 카메리노의 성주인 줄리오 바라노 뿐만아니라 두 아들까지 죽였고, 체사레 자신을 숭배하며 따라 나섰던 파엔차의 만프레디 형제를 살해한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여동생 루크레치아의 남편인 비셀리아 공작도 자기 앞길에 방해 된다는 이유로 살해했다. 또 너무나 많은 거짓말과 배신을 했다. 율리오 2세는 체사레를 속인데 대해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기만을 정당방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동시대 사람들도 체사레를 동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상황이 바뀌자 모두가 적으로 돌아선 느낌이다. 비밀주의, 배신, 예측할 수 없는 기습, 잔인함으로 승리하다보니 이탈리아의 해방자라기 보다 두려운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인과응보를 느끼게 한다.

  과시욕도 없지 않았다. 투우경기에 직접 나서 황소를 죽이고 로마식의 거창한 개선식을 통해 시민들의 환심을 사고 자신을 부각시키려 했는지 모르지만 외부의 방문객들에게는 로마의 타락상으로 비쳤을 것이다<시오노나나미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조조가 찬탈하게 된 것은 문무를 겸비한 조비, 탁월한 무장인 조창, 시인 조식 등 뛰어난 아들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쩌면 뛰어난 무장이자 똑똑한 아들 체사레가 알렉산데르 교황의 명성에 흠을 더한 것 같다. 

  체사레와 가짜뉴스

  체사레에 대해서는 비밀주의 성향 때문인지 가짜뉴스가 많아서, 실제보다 훨씬 나쁘게 묘사된 것 같다. 추기경들을 독살해서 재산을 뺏고, 성직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벌금을 내면 풀어주었으며, 유대인들도 번번히 구속해서 돈을 내면 정교신앙을 입증해 주었다고 한다. 교황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발가벗은 창녀들이 바닥에 뿌려둔 밤을 줍게 했다는 소문도 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독살설을 거부하고 있으며, 알렉산데르 교황시절 추기경들의 사망률이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비해 높지 않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돈을 내면 감옥에서 풀려나는 제도는 요즘에는 벌금형 또는 보석 등으로 제도화되었으며, 유대인에 대해서는 로마만큼 공정한 곳도 없었다. 창녀이야기는 일고의 가치도 없어 보인다. 체사레의 평판이 나빠진 것은 후임교황 율리오 2세가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의 숙적이었다는 것도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체사레가 돈을 얻기 위해 미키엘 추기경을 독살했다는 소문도 율리오 2세 치하에서 콜로레도란 사제를 고문해서 얻어낸 자백에서 나왔다고 한다<문명이야기 5-2>.   
  
  신의 경고

  그럼에도 신은 교황에게 경고를 준 것 같다. 1500년 6월 29일 교황은 벼락을 맞아 머리에 두 군데 상처를 입었다<시오노나나미, 체사레 보르자>. 신은 체사레의 로마냐 공국, 즉 전쟁과 무력을 통한 지상의 교회왕국건설에 반대한 것 같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옳은 길을 가기위해 총칼을 들기보다 겸허하게 십자가의 고난을 권하는 종교다.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신의 가르침을 따르면 하늘나라에 도달한다는 것이다(百尺竿頭 進一步). 교황과 체사레는 이 경고를 무시했다. 그 결과 신은 권력의 절정에 있는 두 사람을 말라리아를 통해 함께 무너뜨렸다. 권력을 다시 회복할 수 없게끔…. 

  한일정상회담과 가짜뉴스

  민주당이 NHK의 왜곡 기사에만 의존해 기시다 총리의 독도 발언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번 한일 정상회담을 '굴욕외교' '망국적 야합'이라 비판했다. 독도 문제는 기하라 세이지 관방부 장관의 개인 의견을 기시다 총리의 발언으로 왜곡 보도한 NHK 기사로 인해 불거졌다. 대통령실이 '독도 관련 얘기는 전혀 없었다'고 분명하게 밝혔지만 민주당은 그 말을 믿지 않고 "한국과 일본 한쪽은 분명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산케이신문이 “정상회담에서 독도는 따로 언급되지 않았다”고 보도하면서 헤프닝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첨예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될 뻔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 이후 독도·한일 위안부합의·후쿠시마 오염수 문제 등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있다. "오염수 방류나 수산물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정부가 객관적 과학적 분석이 수반된다면, 그런 환경 조성 노력을 하고 싶다“는 말이 후쿠시마 수산물의 수입을 허용하는 것처럼 가짜뉴스가 만들어졌다. 야당은 이러한 가짜뉴스에 편승해서 한일 정상회담을 비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체사레의 사례를 보듯이 진실은 밝혀지기 때문이다. 외교 문제를 국내 정쟁에 활용하는 것만큼 국익을 해치는 일은 없다. 

글=김상규 전 조달청장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