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가 해방될 때 식민모국의 공·사유재산까지 완전 몰수하는 조건으로 해방을 맞은 사례는 지구상에서 한국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국수주의 학자들은 언제까지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감추고 “일제시대에 한국인들은 애오라지 수탈만 당했다”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것인가?

#. 흥남질소비료공장을 아십니까?

자료 검색을 하다가 96년 전인 1927년 5월 2일이 ‘흥남질소비료’로 알려진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설립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회사는 일본의 기업가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가 설립한 일본질소비료가 자본금 1,000만 엔을 출자하여 함경남도 흥남에 설립한 회사다.

노구치는 일본제국이 배출한 신흥재벌 중의 하나로 ‘전기·화학공업의 아버지’, ‘조선의 사업왕’으로 불렸다. 일본의 구 재벌은 대부분 상업 자본으로 출발하여 금융업·상업·무역에서 탄탄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때문에 투자 규모가 방대하고 사업 리스크가 큰 중화학공업 분야 진출은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신흥재벌은 창업자 대부분이 고급 엔지니어였고, 구 재벌의 독점 영역을 피해야 했기에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중화학공업 분야로 진출한다. 게다가 제국 일본의 대륙침략, 식민지 경영이라는 특수상황과 맞물리면서 노구치 콘체른을 비롯하여 닛산 콘체른(아유카와 요시스케), 쇼와덴코(昭和電工) 콘체른(모리 노부테루), 닛소(日曹) 콘체른(나카노 토모노리) 등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노구치 시타가우는 도쿄제국대학 전기공학과 출신으로 1908년 일본 미나마타 지역에 석회질 비료를 생산하는 일본질소비료를 설립했다. 19세기 후반 화학비료가 등장하여 세계 농업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노구치는 1921년 공기 중의 질소와 수소를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합성하여 화학비료를 양산하는 루이기 카잘레의 공법을 도입하여 기업 성장의 전기를 맞게 된다(노구치 콘체른 관련 부분은 차승기,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 흥남』, 푸른역사, 2022, 23~49쪽 참조).

문제는 화학비료 생산을 위해서는 대량의 전기가 요구된다는 점이었다. 일본 내에서 전력 공급원 확보가 어려워 고민하던 차에 노구치는 대학 동창인 모리타 가즈오(森田一雄)와 후배인 구보타 유타카(久保田豊)를 통해 조선의 전원개발 전망이 대단히 밝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발전소 엔지니어링 전문가인 모리타와 구보타는 한반도 지형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개마고원에서 서해 쪽으로 흐르는 압록강 지류인 부전강·장진강에 댐을 쌓아 인공호수를 만들고, 터널을 뚫어 물길을 동해 쪽으로 돌려 유역변경식 발전소를 건설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대규모 전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눈이 번쩍 뜨인 노구치는 1926년 1월 자본금 2,000만 엔을 출자하여 조선수전을 설립하고, 다음해 5월 2일 조선질소를 설립한다. 노구치는 1926년부터 압록강 지류인 부전강에 인공댐 건설을 시작함으로써 한반도에서 근대적 발전소 건설의 효시가 되었다.

#. 상전벽해의 현장이 된 흥남

노구치가 비료공장 용지 물색 과정에서 함흥·정평·신흥·원산이 후보지로 떠올랐다. 1년여 입지조사 끝에 흥남이 최종 후보지로 선정되었다. 이유는 발전소에서 가깝고, 광대한 부지 확보가 가능하며, 손쉽게 부지 매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곳 지명은 함흥군 운전면 복흥리와 호남리였고, 200여 호가 농업과 어업을 겸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일본 신흥재벌인 노구치 콘체른을 창업하여 조선에 발전소와 중화학공업단지를 건설한 노구치 시타가우.
일본 신흥재벌인 노구치 콘체른을 창업하여 조선에 발전소와 중화학공업단지를 건설한 노구치 시타가우.

노구치는 이곳에 연간 40만 톤의 황산암모늄(ammonium sulfate, 유안) 비료를 생산하는 대규모 공장 건설에 나섰다. 이것은 일본 전체의 비료 수요(36만 톤)를 넘어서는 엄청난 양이었다(차승기, 앞의 책, 2022, 40~41쪽).

공장이 건설되면서 이곳의 지명은 복흥리와 호남리에서 한 글자 씩 차용하여 흥남읍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읍장은 회사 대표인 노구치가 선임되었다. 이후 흥남은 일본 민간 자본과 국가가 연계되어 ‘노구치 왕국’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노구치 콘체른은 단순히 비료공장만 지은 것이 아니라 흥남을 중심으로 발전소·탄광·철도·항만, 그리고 도시 하나를 통째로 건설했다.

부전강 수계에서 1929년부터 발전을 개시한 조선수전은 1932년까지 4개의 발전소에서 총 출력 19만 9,000kW, 연간 발전량 12억kWh의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흥남질소비료는 부전강 발전소에서 공급받는 전력으로 1930년 1월 2일부터 조업을 개시하여 비료 생산에 돌입했다.

#. 전기혁명으로 시동 걸린 식민지 조선 공업화

때마침 육군대신을 역임하고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가 1931년 6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내지 일본과 조선-만주를 연결하는 경제블록 건설을 위한 조선 공업화 방침을 밝혔다. 농업이 주력산업이었던 조선에 중화학공업 공장을 유치하여 공업화를 함께 추진하는 농공병진(農工竝進)을 선언한 것이다. 

화학 산업은 업종의 특성상 연관 산업이 한 곳에 밀집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조선질소 흥남공장은 유안비료를 비롯하여 인산 비료, 석회 비료, 복합 비료 등 각종 비료 생산 설비를 확대했다. 그 결과 더 많은 전력 수요가 요구되자 노구치는 장진강 수계에 32만 kW 발전소 건설과 경성(서울)·평양으로의 송전망 건설계획을 총독부에 제출하여 허가를 받았다.

1933년 5월 노구치 콘체른은 장진강에 33만 2,000kw, 연간 발전량 24억kWh의 수력발전소 4기를 건설했다. 총독부는 장진강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절반은 평양의 도시 전력으로 공급을 원했다. 이를 위해 노구치는 조선송전회사를 설립했다. 부전강과 장진강 발전소로도 전력 수요가 부족하자 노구치는 허천강에도 수전을 건설한다.

노구치 콘체른이 압록강 지류인 부전강·장진강·허천강에 건설한 발전소는 인공호수를 만들고, 산맥에 터널을 뚫어 물길을 그 반대편인 동해 쪽으로 떨어뜨려 큰 낙차를 이용해 전력을 얻는 유역변경 방식이었다(손정목, 「일제하 화학공업도시 흥남에 관한 연구(上 )」, 『한국학보』 16권 2호, 일지사, 1990, 204~206쪽).

노구치 콘체른이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 등 압록강 지류에 건설한 발전소는 댐을 쌓아 인공호수를 건설하고, 터널을 뚫어 물길을 동해 쪽으로 돌려 발전하는 유역변경 방식이었다. 사진은 장진강 발전소의 모습.
노구치 콘체른이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 등 압록강 지류에 건설한 발전소는 댐을 쌓아 인공호수를 건설하고, 터널을 뚫어 물길을 동해 쪽으로 돌려 발전하는 유역변경 방식이었다. 사진은 장진강 발전소의 모습.

압록강 3개 지류 발전소의 연간 발전량 합계는 60억kWh. 이것이 식민지 조선에 전기혁명을 일으켜 조선 공업화를 추진하는 결정적 원동력이었다. 에너지 문제가 해결되면서 노구치 콘체른은 흥남 일대에 화약, 인공석유, 마그네슘, 알루미늄 공장을 건설했다. 또, 동해에서 무진장으로 잡히는 정어리를 원료로 한 유지(油脂)공업 분야에도 진출했다. 노구치 콘체른은 흥남을 비롯하여 영안, 아오지 등 함경도 일대에 추가로 공장을 지어 동양 최대 규모의 전기화학 콤비나트를 구축했다. 압록강 지류에서 생산되는 전기가 식민지 조선의 중화학공업화 혁명을 불러온 것이다.

이로써 일본 본토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동양 최대 규모, 기술면에서 최첨단을 자랑하는 중화학공업 설비가 북선(北鮮, 한반도 북쪽 지방이란 뜻) 지역에 포진하게 되었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와중에 일본에서 출장 오는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노구치는 서울에 반도호텔을 지어 호텔업에 진출했다. 이것이 롯데호텔의 원형이다.

#. 이번에는 압록강 본류에 동양 최대의 발전소 건설

조선질소비료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자 다른 일본 기업들도 원산·성진·청진·나진·웅기 등 흥남 주변지역에 기계·비철금속·석유 등 중화학공장을 경쟁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들 공장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원 해결을 위해 이번에는 압록강 본류를 이용한 발전 가능성이 타진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와 만주국의 국경을 흐르는 압록강 본류 수계를 이용하여 시설용량 10만 kW 발전기 7기를 건설, 총 70만 kW 규모의 동양 최대의 수력발전소 계획을 수립했다. 수풍댐은 워낙 규모가 거대하여 조선-민주 공동개발 프로젝트로 추진되었다. 개발비와 소요자재, 개발 후 전력을 양측이 50%씩 분배하는 방식이었다.

총독부는 압록강개발위원회라는 특별기구를 설치하고 노구치 시타가우를 대표로 선정했다(수풍댐 관련 부분은 이대근, 『귀속재산연구』, 이숲, 2015, 252~259쪽 참조). 노구치는 일본 전국에서 전기·토목 계통의 최고 기술진을 총동원하여 초유의 국책사업에 도전했다. 일본 정부는 수풍발전소를 거국적 프로젝트로 인식하고 이 사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압록강 수전(水電)의 노래(歌)’를 만들어 보급했다.

1937년 10월, 제1단계인 수풍지역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에는 하루에 최대 1만 명씩 연인원 2,000만 명의 노무인력이 동원되었고, 총 공사비로 무려 2억 3,700만 엔이 투입되었다. 중일전쟁·태평양전쟁 여파로 인력, 원자재 조달의 어려움, 겨울철 강추위, 여름철 홍수로 악전고투끝에 1941년 8월 첫 발전을 개시했다. 이어 1944년 2월까지 총 60만 kW의 최신식 발전소가 완공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압록강 본류를 막아 건설한 수풍댐. 댐 높이가 106.4m에 달하는 동양 최대 규모의 대역사였다.
조선총독부가 압록강 본류를 막아 건설한 수풍댐. 댐 높이가 106.4m에 달하는 동양 최대 규모의 대역사였다.

수풍댐 높이는 106.4m로 동양 최대 규모였고, 적용기술도 세계 최첨단 수준으로, 20세기 전반의 세기적 초대형 토목·건설공사로 손꼽혔다. 수풍댐은 대규모 발전이 가능하여 kW 당 저렴한 발전단가가 특징이었다. 수풍발전소 건설로 값싼 양질의 전기가 풍부하게 공급되면서 평안도 진남포와 평양, 순천, 신의주 지역에 중화학공업 공장이 속속 들어섰다. 또 황해도 해주와 강원도 삼척에 시멘트, 카바이트 공장이 건설되면서 식민지 조선 공업화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1942년, 제2단계 사업으로 수풍댐보다 상류에 운봉발전소(50만kW), 하류에 의주발전소(20만kW) 건설에 착수했다. 운봉 지역은 수로의 길이, 낙차 크기 등 조건이 대단히 양호하여 수풍발전소에 버금가는 50만 kW 프로젝트로 구상되었다. 의주 발전소도 굴착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전황 악화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해방을 맞게 된다.

#. 압록강 수계 발전소와 후버 댐과의 비교

전문가들은 일제 시대 건설된 압록강 발전소는 미국의 뉴딜 정책으로 탄생한 세계 최대의 후버 댐, 그랜드 콜리 댐과 맞먹을 정도의 세계적 위상을 가지는 것으로 평가한다.

미국이 자랑하는 후버 댐은 수력 122억 kWh, 화력 43억 kWh 등 합계 165억 kWh 규모였다. 압록강 수계의 수풍·부전강·장진강·허천강 발전소는 150억 kWh로 후버 댐과 대등한 수준이었다. 만약 제2차 사업으로 추진된 운봉·의주 발전소가 완공됐다면 세계 최대의 수전 메카로 등극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봉·의주 수전이 건설되는 와중에 일본이 패망했다.

조선총독부는 북선 지역에만 발전소를 건설하고 공업화를 추진한 것은 아니다. 1930년대 경인지역에도 속속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면서 이에 대한 전력 수요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우선 1930년 서울 근교의 당인리에 석탄화력 발전소 1호기를 건설했고, 1937년에는 영월화력발전소(10만 7,000kW)가 완공되었다. 

1930년대 후반에 일본고주파중공업이 인천에 대규모 공장 건설계획을 발표하자 총독부는 남선 지역에도 수전을 건설하여 전력 수요를 충당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1939년 조선식산은행 주도하에 한강수력전원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북한강 수계를 활용하여 1944년 화천 발전소(81,000kW)와 청평(39,600kW) 발전소를 완공하여 발전을 시작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력 생산 시설과 발전량은 북선 지역이 전체의 83.2%, 남쪽은 16.8%에 불과했다. 이것이 해방 후 남한의 경제건설 과정에서 결정적인 핸디캡으로 작용하게 된다.

#. 전기혁명이 불러온 식민지 근대화

1930년 부전강 제1발전소 가동부터 1944년 수풍발전소 완공까지 15년은 한반도에서 경이로운 전원개발 붐이 일어난 전기 혁명기, 산업혁명기였다. 값싸고 풍부한 양질의 전기를 바탕으로 일본 자본이 조선에 진출하여 크고 작은 공장을 건설하면서 의미심장한 근대화가 추진된 것이다.

국내의 국수주의 학자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말만 나오면 알레르기 증세를 보인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시절 압록강 수계의 전원개발과 그로 인한 공업화 실상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방법이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그런 공장들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해 건설한 것일 뿐, 조선에는 어떤 혜택도 주지 못했다”, “공장부지 확보 과정에서 폭압과 물리력을 동원해 강제로 빼앗거나 헐값에 탈취했고, 광범위한 노동력 수탈이 이루어진 만악의 근원”이라고 슬쩍 입장을 바꾸었다.

흥남에서 대량의 화학비료가 생산되어 방방곡곡에 값싸게 공급되면서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인류의 식량 문제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화학비료다. 한반도에서 화학비료 생산이 없었다면 식민지 조선의 식생활이나 경제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총독부의 식량증산 정책 덕분에 조선에서 생산된 곡물이 제값 받고 일본에 이출되어 한국인들이 밥술이나 뜨게 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1905년부터 1945까지 일본 자금이 조선에 유입된 총액은 128억 엔이었다. 이중 17.9%(22억 9,100만 엔)는 행정비나 군사비 등 소모성 자금이었고, 3.3%(4억 2,240만 엔)는 일본인의 생계형 자금(가옥·대지·점포 구입 등)이었으며, 경제적 투자자금은 78.8%(100억 864만 엔)였다. 바로 이 돈이 현해탄을 건너와 조선에 투자됨으로써 한반도에서 격렬한 식민지 근대화가 추진됐다.

#. 일본이 건설한 모든 공장과 발전소, 한국인 소유가 되다

흥미로운 점은 100억 엔이 넘는 일본의 경제적 투자자금이 건설해 놓은 각종 공장들이 해방 후 귀속재산으로 이 땅에 고스란히 남았다는 사실이다. 해방 후 미군정은 군정법령 제33호로 일본 정부 소유뿐만 아니라 일본 민간인의 사유 재산 및 민간기업의 시설·기계 등을 모두 압수하여 1948년 9월 한국 정부에 이관했다(귀속재산의 한국 이관 관련부분은 이대근, 앞의 책, 제5장 ‘귀속재산의 관리(1): 미군정 시대, 349~463쪽 참조).

일본이 남기고 간 수많은 중화학공업 공장들이 귀속재산으로 한국에 남은 과정을 추적한 이대근 교수의 명저 "귀속재산연구".
일본이 남기고 간 수많은 중화학공업 공장들이 귀속재산으로 한국에 남은 과정을 추적한 이대근 교수의 명저 "귀속재산연구".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 일본은 미군정의 일본 민간인 재산 압류는 “어떠한 경우에도 점령군은 적지의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절대 손댈 수 없다”라고 규정한 1907년 헤이그 육전조규 제46조 위반이라고 미국에 강력 항의했다. 이것은 국제법 위반이므로 일본인 사유재산은 돌려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써 미군정이 압류하여 한국 정부에 인계한 일본 민간인 사유재산의 향방이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심각한 쟁점으로 부상했다.

한일 회담에 나선 이승만 정부는 1949년 대일 피해배상 요구 방침을 철회하고 일본이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조선에서 가져간 고서적·미술품·골동품, 기타 국보·지도원판, 지금(地金)과 지은(地銀) 등의 반환을 요구했다. 이에 대항하여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근거로 미군정이 재조선 일본 민간인 사유재산을 불법적으로 몰수하여 한국 정부에 인계했으니, 그것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역청구권 제기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대일 청구권은 재한 일본인의 재산 취득으로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면서 “어느 정도 충족된 것인지는 한일 양측이 논의해서 결정하라”고 양국 입장을 중재했다. 미국 정부는 미국이 일본에 전쟁배상금을 요구하지 않았으니 일본 민간인 사유재산 압류 및 한국 정부에 인계한 것은 미국에 치러야 할 전쟁배상금으로 간주하라고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

미국이 중재 의견(사실은 압력)을 내자 일본은 역청구권을 철회하고 한국이 요구한 재산 반환 문제의 타당성 검토에 나섰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이 가져간 한국 재산은 지금(249톤)과 지은(67톤) 등 7억 달러 정도이니 이 금액을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지금·지은은 적법하게 대가를 지불하고 매입한 것이므로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결국 일본이 한국 정부에 지급할 금액 중 미지급금은 징용 노동자의 미수금 7,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한국 정부는 무려 13년을 끈 청구권 문제를 7,000만 달러라는 헐값에 타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어 한일 회담이 파경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일본 정부에 한국의 독립 축하금 명목(한국 측은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해석)의 지원금을 제공하라고 압박했다. 김종필-오히라 회담에서 결정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알파”는 미국 측이 일본의 외환보유고를 감안하여 정해준 액수를 한일 양국 정부가 수용한 것이다.

김종필-오히라 회담에서 결정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알파"는 미국 측이 정해준 액수를 한일 양국이 수용한 결과였다.
김종필-오히라 회담에서 결정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알파"는 미국 측이 정해준 액수를 한일 양국이 수용한 결과였다.

한일 회담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한국인 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인류 역사상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을 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거부했다. 이로써 한일 양국 정부는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알파”로 일체의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었다고 조약을 체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법원은 2012년 5월 양국의 한일조약을 뒤엎고 한국인 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해 일본 측이 피해보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 나라 법원이 자기 나라 정부가 체결한 국제조약을 뒤집어엎는 판결을 내려 국제 관계에 평지풍파를 일으켰으니, 지구상 어떤 나라가 한국과 조약을 체결하겠다고 나서겠는가.

#. 언제까지 일제 수탈론만 반복할 것인가?

1946년 미일 합동조사단의 조사에 의하면 해방 후 일본 민간인이 한국에 두고 간 사유재산의 총 가치는 750~800억 엔(약 52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일본이 한반도에 남기고 간 귀속재산이 한국 총 국부의 80~85%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이대근, 앞의 책, 4647쪽). 그 중 22억 달러 정도가 38선 이남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만주 주둔 관동군의 보급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일본은 만주와 가까운 북선 지역에 전원을 개발하고, 여기서 생산된 전력으로 대규모 중화학공업단지를 건설했다. 그 결과 조선의 공업화 수준, 그리고 철도·도로·항만을 비롯하여 전기·가스·전신·전화 등 사회간접자본 개발 수준은 일본에 이어 아시아 2위에 올라 있었다.

노구치 콘체른이 흥남 일대에 건설한 조선질소비료공장을 비롯한 전기 화학콤비나트. 이 엄청난 설비가 귀속재산으로 우리 손에 넘어왔다. 이처럼 귀속재산으로 한국에 남겨진 일본 민간 재산은 총 52억 달러에 달한다. 국수주의 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은폐한 채 "일제시대에 한국인은 수탈만 당했다"라고 거짓말을 반복하고 있다.
노구치 콘체른이 흥남 일대에 건설한 조선질소비료공장을 비롯한 전기 화학콤비나트. 귀속재산으로 한국에 남겨진 일본 민간 재산은 총 52억 달러에 달한다. 

조선총독부 시절 일본 기업들이 건설한 흥남질소비료공장을 비롯하여 각종 발전소 등 수많은 산업시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귀속재산이 되어 이 땅에 남았다. 해방 과정에서 일본 민간인과 기업의 재산까지 100% 몰수하여 한국(+북한)이 차지한 재산권 문제는 세계사적으로도 지극히 예외 중의 예외에 속하는 특수 사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식민지 상태였던 나라가 해방될 때 식민모국의 공·사유재산까지 완전 몰수하는 조건으로 해방을 맞은 사례는 지구상에서 한국과 북한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덕분에 한국과 북한은 신생국 중 어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급 인프라를 갖춘 상황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한국의 국수주의 학자들은 언제까지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은폐한 채 “일제시대에 한국인들은 애오라지 수탈만 당했다”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것인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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