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형 전 연합뉴스 편집국 부국장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는 기술적으로 군사 쿠데타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론 오천 년 한민족 역사의 흐름을 바꾼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을 능가하는 세계 역사상 드물게 성공한 혁명이다. 중국의 속국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한민족 역사의 바닥을 친 조선왕조에서 벗어나 일본의 식민통치를 거쳐 한민족이 배달국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는 수천 년 만에 맞는 국운 상승기의 시작이다.

3,700명에 불과한 박정희의 혁명군이 한강 다리를 넘어 청와대와 육군본부, 방송국 등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혁명을 선포하자 당시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장면 총리는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친 쿠데타 세력과 반 쿠데타 세력으로 양분된 군대의 통솔권을 가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진압군을 보내지 못하고 미국은 이틀 후 박정희의 쿠데타를 용인한다.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는 김종필의 인터뷰 내용과 같이 박정희의 5.16 혁명은 막강한 병력의 군대를 동원한 것이 아닌 초라한 규모의 병력이었지만 명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4.19로 하야한 이승만 이후 집권한 윤보선·장면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안정적인 국가의 통치와 경제 개발은커녕 해방 후의 좌우 대립으로 인한 극심한 혼란을 되풀이하고 끝없는 시위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며 북한의 재남침 위협이 점증하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혼란이면 국운이 위태롭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승민 『숨결이 혁명 될 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 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로 역사의 순간을 목도한 이상우 전 한림대 총장은 저서 『살며 지켜본 대한민국 70년사: 반산일기』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5월 16일 아침잠에서 깨어난 서울 시민들은 군사혁명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반응은 올 것이 왔다가 대부분이었다. 민주당 정부의 무능과 사회 혼란, 경제 파탄에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고 걱정하던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약 3,600명의 혁명군이 박정희 소장의 지휘 아래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하여 혁명을 새벽 몇 시간 내에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것은 역사상 보기 드문 무혈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왜 가능했을까? 군 장병도 그리고 대부분 국민도 묵시적으로 동의한 구국의 결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4.19 이후 1년간의 상황에 국민들의 불만이 높았다는 의미다.’”

모든 것을 네 탓, 세상 탓, 조상 탓으로 돌릴 때조차 긍정의 힘을 믿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만들어 간다. 지금의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치를 간교한 사술, 현란한 말장난이나 어설픈 논리가 아닌 몸으로 행동으로 보여준다.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현대자동차, 석유화학 단지, 과학입국의 토대를 위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대덕 연구단지를 만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계획에 사사건건 반대를 일삼던 사람들, 그런 패배주의에 젖은 분들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처절히 행동으로 옮긴 분들이 대한민국 성장의 원동력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서독의 한 탄광을 방문한다. 이역만리 땅속에서 탄가루를 마시며 석탄을 캐는 한국인 광부들, 그리고 시체를 씻어내는 한국의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들이 애국가를 부른다. 부르다 말고 전부 운다. 박 대통령, 육영수 여사도 같이 운다. 우리 생전엔 안 되더라도 후손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자고 한다. 광부들이 박 대통령 옆에 있는 독일 수상에게 큰절을 올리고 울며 대한민국을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6.25 전쟁 이후 전쟁의 잔해 속에서 빈털터리로 일어선 대한민국이 그렇게 얻은 차관으로 경제 개발을 시작한다.

한일 국교 정상화로 받은 배상금 조의 경제원조 자금과 독일로부터 받은 차관으로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등 경제 개발에 필수적인 인프라를 구축한다. 굴욕외교라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연일 가두시위를 펼친다. 고속도로는 필요 없고 포항제철은 불가능하다고 떠들던, 부정과 반대만 하던 그런 분들이 아직 살아 계신다면 오늘의 영광스러운 대한민국은 그분들에게 과분하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포철을 만들어 신일본제철을 능가하는 세계 제일의 제철소가 된다. 입으로만 떠드는 반일이 아닌 몸으로 보여주는 극일이다. 전쟁 배상금이나 경제 차관을 지원받은 나라 중에 성공적으로 경제 개발을 한 나라를 찾기 쉽지 않다. 대부분 지도자와 권력 주변 사람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M16 자동 소총을 만드는 미국 회사의 중역이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백만 달러짜리 수표를 내민다. 관례에 의한 리베이트다. 박 대통령이 수표를 되돌리며 그만큼 소총을 더 달라고 한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그리고 베트남 파병 장병들, 그들의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소중한 외화를 사사로이 쓸 수 없다. 미국인 중역이 떠나자 박정희는 집무실 책상으로 돌아가 한여름의 폭염에도 다시 에어컨을 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여행 중 one dollar, one dollar를 외치며 따라다니는 꼬마들을 보고 6.25 전쟁 중 미국 군인들 따라다니며 과자 부스러기 얻어먹던 기억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는 어느 나이 드신 분의 말씀이 기억난다. 우리나라에 와서 저임금에 3D 업종에 종사하는 동남아인들, 박정희 정권 당시에는 그들 나라가 우리보다 선진국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돔 건축이라는 장충체육관은 필리핀 사람들이 지었고 발전소 기술을 배우러 파키스탄에 우리 기술자들을 보내던 시절이다. 좌파는 대한민국의 해방 후 반세기의 역사가 기회주의의 득세, 정의가 패배한 부정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 기적의 역사, 긍정의 힘을 믿는 역사다.

좌파는 박정희가 아니라 누가 해도 근대화는 했을 것이라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현대자동차, 조선소, 석유화학 단지 등 이것저것 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했을 거라고 한다. 생각은 부처도 되고 예수도 된다.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고 실천하고 현실로 만드는 것은 다르다. 박정희 이전의 한민족과 박정희 시대의 한민족은 같다. 지도자가 달랐을 뿐이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조그만 조직이라도 지도자에 따라 발휘하는 능력이 천양지차다. 똑같은 군사라도 이순신 장군이 맡으면 연전연승하고 원균이 지휘하면 연전연패한다. 2002년 월드컵 때의 히딩크 감독도 있다.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주의는 입으로 떠들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 그들이 이룬 경제 발전이 민주화의 초석이다. 경제 발전이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경제 발전 없는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으며 무리하게 추진하는 경우 모두 실패한다는 걸 역사는 보여준다. 순차적으로 하는 거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논리가 북한의 경제를 살리는 게 인권을 직접 거론하는 것보다 현실적이고 북한 인민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보살피는 거다. 그러나 그들은 이 논리를 박정희 정권에는 적용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인다.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 말씀이 2008년 말 경제 위기로 인한 미국의 실업자 양산, 그리고 사회 불안정이 테러리즘을 능가하는 미국이 직면한 최대의 위협이라고 한다. 그게 박정희 정권이 했던 거다.

부국강병이면 인권이 그만큼 향상된다. 못사는 나라에서, 굶어 죽는 나라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인권과 민주화를 논할 수 없다. 현재의 대세인 서구 민주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에 봉건적 유교 시대인 조선 시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박정희 정권이 있다. 조선왕조에서 일제 식민지를 거쳐 해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도 왕조시대의 유교적 권위주의와 일제 식민 통치의 잔재가 모든 사람의 몸에 배어있던 그리고 모든 사회제도에 뿌리내리고 있던 시절이다.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은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선생님 그림자도 안 밟던 시절, 집안에서 아버지 말씀 한마디면 모든 것이 결정되던 시절이다. 학부모가 학교 찾아가서 선생님 뺨을 때리고, 아버지는 집안에서 왕따가 되는 이 시대의 잣대로 과거를 평가해선 안 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18년 집권했으니 독재다. 8년을 하면 민주주의고 그 이상이면 독재다. 미국이 대통령 임기 8년만 하니 그 이상은 독재다. 하지만 터키의 국부로 추앙받는 케말 파샤도 15년 집권, 러시아 푸틴 대통령 4년 중임에 8년 임기를 끝내고 총리로 간다. 삼선 금지 헌법 규정 때문에 정치적 수제자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을 넘긴다. 그리고 다음 대통령선거에 출마를 선언한다. 러시아 의회에서 다음 대통령부터는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는 법을 통과시킨다. 베네수엘라에선 대통령 연임 제한 규정을 없앤 개헌안이 국민투표로 통과돼 독재 운운하며 반대하던 야당이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다. 미 국무성 대변인이 정례브리핑에서 베네수엘라 개헌안의 국민투표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원만하게 진행된 것을 축하한다. 이미 두 번째 임기를 끝낸 차베스 대통령이 2012년 다시 출마한다. 콜롬비아 의회도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 삼선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미국도 사선 대통령 루즈벨트가 있다. 사선 오선 그 이상도 필요하면 하는 것이다.

미국이 하지 않는 삼선개헌이니 독재라고 한다. 역사관, 철학이 없는 무능 무지한 대한민국 좌파 세력의 사대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삼선이든 사선이든 종신이든 헌법 개정 절차에 따라 국민이 선택하면 하는 거고, 부정 선거든, 관권선거든 그것대로 처리하면 된다. 삼선을 위한 개헌이니 독재다. 그게 무슨 말인가. 독재라 그런 게 아니라 나도 한번 대통령을 해야 하는데, 고도의 경제 성장으로 인기 있는 박정희가 다시 출마한다니 그게 못마땅하다. 

주한미군 철수, 미군의 베트남 철군과 가속화되는 베트남의 공산화 그리고 닉슨의 중공 방문에 이은 미국과 중공의 화해 분위기 조성으로 인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급변으로 박정희는 1972년 전국적으로 선거로 뽑힌 선거인단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연임 제한 없는 임기 6년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 간접선거제를 골자로 하는 유신헌법의 채택을 위한 개헌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유신헌법은 투표율 91.9%, 찬성 91.5%로 통과된다. 야당과 대학생들의 지속적인 유신헌법 철폐시위로 사회 불안이 야기되자 박정희는 1975년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부결되는 경우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즉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다. 투표 결과 79.8%의 투표율을 보였으며 서울과 부산의 58%와 62%라는 낮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73.1%의 득표율로 박정희와 유신헌법은 재신임을 받는다.

박정희는 유신헌법 선포식에서 “우리는 자유민주 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이 민주 체제처럼 취약한 체제도 또한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번 비상조치의 불가피성을 다시금 강조하면서 오늘의 성급한 시비나 비방보다는 오히려 민족의 유구한 장래를 염두에 두고 내일의 냉엄한 비판을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얘기한다.

1970년대의 안보 위기와 경제 위기 속에서 근시안적이며 포퓰리즘적인 야당의 대중 경제론을 극복하고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제품 위주의 수출 한계를 벗어나고 재래식 무기는 물론 미사일과 핵무기까지 자체 무기 생산을 통한 자주국방과 중화학제품의 수출을 통한 중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한 중화학공업이라는 새로운 국가적 과제를 내세워 유신의 역할을 설명한다. 외자 도입과 재벌 중심의 수출 경제 대신 농업과 수입대체를 위한 중소기업 중심의 자급자족형 내수 공업을 주장하고 고속도로든 제철소든 조선소든 뭐든 다 필요 없고 가능하지도 않으며 수출주도형 개방경제는 결국 국제경쟁에서 패배하고 선진국에 종속된다는 남미형 종속이론에 따르는 수구적이며 패배주의적인 야당 정치인과 학자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다.

조우석 외 『숨결이 혁명 될 때』에 나오는 오원철 전 경제수석비서관의 증언이다.

“경제 발전을 뒷받침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변질되거나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다면(유신 선포가 없었다면) 1970년대의 한국은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요사이 많은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박 대통령 아래에서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학공업과 유신 개혁을 별개인 것처럼 얘기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곧 중화학공업화다. 그게 진실이다. 하나 없이는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 중화학공업이 성공한 것은 박 대통령이 그게 굴러가도록 국가를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유신이 없었다면 국가 훈련은 없었다. 이걸 무시하는 건 비양심적이다.”

박정희가 몇 년을 더 집권했으면 자주국방을 위한 핵무기, 장거리 미사일까지 개발을 끝냈을 터이다. 지금 골치 아픈 북한 핵도 신경 쓸 필요 없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이니 때마다 한미동맹, 미국의 핵우산 재확인해야 하는 그런 번거로움도 없다. 말이 재확인이지 구걸이나 다름없다. 베트남전 종전을 공약으로 당선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 국가의 안보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1969년 발표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시작하자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을 시작하나 미국의 방해로 1976년 핵무기 개발을 공식적으로 포기한다. 그 후 비밀리에 지속되던 핵무기 프로그램은 박정희 사망 후 전두환 정권이 미국의 요청으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한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미국이 파리를 위해 뉴욕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논리로 핵무기 개발을 강행한다.

소련과 중국이 서로 수정주의자, 교조주의자로 비난하며 관계가 악화하면서 소련이 중국에 지원을 끊고 무기와 공업시설에서 철수하자 안보에 위협을 느낀 중국의 임표 국방부장은 핵무장 없이는 적의 핵무기 앞에 굴복하거나 핵 대국의 보호라는 자비심에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10.26이 없이 박정희의 비밀 핵무장 계획이 성공했으면 현재 북한 요인으로 한국 기업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없으며 안보 걱정 없이 군사 대국, 경제 대국으로 나아가는 중국처럼 경제에만 전념하면 된다.

4선 국회의원 출신 하순봉은 회고록에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공 방문과 주한미군 철군 그리고 미군의 베트남 철군 결정으로 급변하는 동북아 안보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박정희는 1972년 초 비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지시했으며 1970년대 말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쓴다.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1979년 1월 1일 청와대 공보비서관 출신 선우연 의원을 불러 1981년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핵무기를 공개한 뒤 바로 하야 성명을 내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나 혼자 결정한 비밀사항인데, 2년 뒤 81년 10월에 그만둘 생각이야.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핵무기를 내외에 공개한 뒤 그 자리에서 하야 성명을 낼 거야. 그러면 김일성도 남침을 못 할 거야.”

1981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취임 직후 워싱턴에서 이루어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두환은 박정희의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를 통보하고 레이건은 전임 카터 행정부의 주한 미군 철수 계획을 백지화한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해도 그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한 사람의 독재자가 생각이 다른 나머지 사람 전체의 침묵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는 자유 신봉론자인 존 스튜어트 밀 얘기다. “미개인들을 개명시킬 목적에서 그 목적을 실제 달성하는 데 적합한 수단을 쓴다면 이런 사회에서는 독재가 정당한 통치기술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검토하고 있는 자유의 원리는 인류가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을 통해 진보를 이룩할 수 있는 시대에나 성립이 되지 그런 때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때가 되기까지는 아크바르(Akbar)나 샤를마뉴(Charlemagne)같은 지도자에게–운이 좋아서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한다면–암묵적으로 복종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개인의 독립성과 사회의 통제 사이에서 적절한 접점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아주 명백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이 문제의 정답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시대에 따라서 답이 항상 다르다. 서로 다른 두 사회가 같은 답을 낸 적이 거의 없다. 한 시대나 사회가 내린 결정이 때로 다른 시대나 다른 사회의 사람에게는 놀라워 보이기도 한다.” (서병훈 역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자유론 On Liberty』

법치와 통제는 사라지고 자유와 방종, 탐욕만 남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몰락을 경험한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주장한다. “그를 더욱 실망시킨 것은 얼마 후 곧 회복된 민주정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바로 이 민주정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웠고 결국 그를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직간접적인 정치적 경험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장차 철인 왕이 출현하지 않는 한 정치적 타락을 막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때부터 플라톤은 아카데미를 세워(기원전 387) 철학자 양성에 힘을 기울인다.” (전경옥 외 『서양 고대 중세 정치사상사』) 김영평 외 『민주주의는 만능인가?』에 나오는 포퓰리즘에 대한 경고다.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라면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해’라는 말을 자꾸 들먹이는 위정자의 말에 속지 않아야 한다. 그 말을 내세우는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해 봐야 한다. 말로는 ‘국민을 위해’라고 하지만 그것이 결국 특정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도모해 주는 국가권력의 행사를 가리는 베일이나 연막이었던 사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소크라테스가 타협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독배를 받아들인 이유는 포퓰리즘과 다수 민중의 탐욕으로 인한 잦은 법체계의 변동으로 법치의 근간이 무너지고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진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이며 아테네의 멸망에 대한 예고다. 아테나 여신과 디오니소스 숭배를 거부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명은 구실이다. 정적 제거의 도구로 전락한 도편 추방 제도, 능력을 무시하고 평민들이 유리한 추첨으로 관리를 선출하는 제도와 아테네 민주주의 포퓰리즘의 절정기로 불리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도입된 배심원과 의회에 대한 수당 지급과 아테네 지배 체제를 찬양하는 선전 선동을 위한 극장 연극 무료 관람 등 무한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원인이다. 타락한 아테네 민주주의와 스승 소크라테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경험한 플라톤은 무지한 대중을 향한 선전 선동과 무한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자유와 법치 그리고 통제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한다. 박정희 정권은 플라톤 철인정치의 구현이다.

일생의 대부분을 노동이 아닌 지인의 도움으로 호의호식한 프롤레타리아와는 무관한 삶을 산 위선적인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글이다. “현 사회에서 최하위 계층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공식적인 사회를 이루는 계층의 전체 상부 구조를 폭파시키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도 없고 똑바로 설 수도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지배 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전율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이진우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이는 곧 프랑스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단두대 공포정치를 실시한 로베스피에르의 자유를 위해 폭력이 필요하다는 논리와 연결되며 레닌, 마오쩌뚱, 김일성이 수립한 공산 정권에서 현재까지 충실히 집행된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념은 그가 혁명에 대한 견해를 단계적으로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최종적으로 그의 사상체계 전반에 통합되었다.” (최갑수 역 알베르 소불 『프랑스 혁명사』) 박정희의 5.16 혁명이 프랑스혁명과 비교되는 이유다.

박정희는 일개 여단 병력에도 못 미치는 3,700명의 군대로 인명 피해 하나 없는 쿠데타로 무혈 혁명을 완수했으며 혼란스러운 사회와 도탄에 빠진 민생과 경제를 구하고 사리사욕 없이 대한민국 오천 년 역사에 드문 한민족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다.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프랑스 대혁명, 마르크스, 레닌 그리고 마오쩌뚱과 김일성의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세뇌된 종북좌파 세력과 그들의 선전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박정희의 5.16은 프랑스혁명과 레닌의 러시아혁명을 능가하는 진정한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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