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6일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 간호법 제정안은 의료계를 양분하는 ‘갈등 법안’이다. 사회적 통합을 추구하는 대통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 대통령이 이날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통해 "이번 간호법안은 유관 직역 간의 과도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면서 "또 간호 업무의 탈 의료기관화는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한 간호법, 45만명이 찬성하고 400만명은 반대

실제로 간호법에 대해 간호사들만 찬성하고 나머지 의료계 종사자들은 모두 반대하는 양상을 보였다. 대한의사협회, 대한간호조무사협회, 응급구조사협회 등 13개 단체로 이뤄진 보건복지의료연대(이하 의료연대)는 17일 총파업을 예고하면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압박할 정도로 강경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추가협상을 하자는 국민의힘 반대를 무릅쓰고 힘으로 밀어붙였다. 지난달 야권 단독으로 간호법 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것이다.

더욱이 양대 진영의 수적 규모를 따져보면 민주당의 선택을 얼핏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민주당의 원군이 된 간호사들은 면허 기준으로 45만 7000여명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의료연대에 참여한 13개 직역 종사자들의 숫자는 400만명에 달한다는 게 의료연대측 주장이다. 의료연대는 16일 서울 용산구 의협 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에 400만 회원은 환영의 뜻을 밝힌다"강조했다. 의료연대를 주도하고 있는 의사는 13만 2013명에 불과하지만 간호조무사는 72만 5356명에 달한다. 치과의사 3만 3031명, 임상병리사 6만 5795명, 방사선사 5만432명, 응급구조사 5256명 등이다.

다수를 ‘적’으로 돌린 민주당 속셈은?...총선 겨냥한 ‘우군 확보 전략’

이처럼 간호사를 제외한 나머지 의료계 종사자들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간호법 제정안을 강행처리한 더불어민주당의 속셈은 무엇일까.

의료연대 관계자 등은 내년 총선을 앞둔 ‘우군 확보 전략’, 민주노총의 세력확대 전략 등이 간호법 제정안 강행의 배경으로 깔려있다고 분석한다.

우선 민주당이 45만명에 불과한 간호사들의 편을 들게 된 것은 간호협회의 조직력을 감안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한간호협회 등 간호사 단체는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를 중심으로 지역별 조직화 수준이 높다. 이에 비해 의사나 간호조무사 등은 조직력이 약하다. 내년 총선을 겨냥한 표계산을 할 때 강력한 조직력을 가진 이익단체를 우군으로 만드는 게 유리한 전략이라는 민주당의 판단이라는 해석이다.

대한간호협회 김영경 회장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열린 간호법 공포 촉구 기자회견에서 입장문을 낭독하고 있다.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사진=연합뉴스]
대한간호협회 김영경 회장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열린 간호법 공포 촉구 기자회견에서 입장문을 낭독하고 있다.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사진=연합뉴스]

지역사회의 돌봄센터, 민노총과 간호협회 간의 이익공동체 형성시켜?

민주노총과 간호협회 간의 ‘이익공동체’가 간호법 제정안의 최대 동력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간호법 제 1조는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게 문제조항이다. 간호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의료기관’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라고 명시한 것이다. 현행 의료법상 의료행위는 의료기관에서만 가능하지만 간호법 1조에 따르면 병원이 부족한 지역사회에 돌봄센터 등을 만들어 간호사가 간호행위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는 게 의료연대측 설명이다. 그럴 경우 지역사회에서 의사없이 간호사가 단독으로 돌봄센터를 개설함으로써 간호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역사회에 간호사가 중심이 된 돌봄센터가 들어설 경우 민주노총은 또 다른 세력확장의 기회를 맞게 된다. 전국적으로 개설된 돌봄센터 종사자들이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에 가입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과거 무상급식이 전면 시행되면서 급식노조의 35만명 조합원을 새롭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돌봄센터도 비슷한 조직확대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다.

문재인 케어 설계자인 김용익 ‘돌봄과 미래’ 이사장이 돌봄센터 산파역할 할 듯

문재인 정권의 대표적 포퓰리즘인 ‘문재인 케어’의 설계자인 김용익 전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그 배후에 있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김용익 전 이사장은 지난 2022년 9월 ‘돌봄과 미래’라는 단체를 창립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간호법 제정안이 시행되면 김용익 돌봄과 미래 이사장의 지역사회의 돌봄센터 설립과 운영 그리고 민주노총과의 관계 설정 및 민주당에 대한 정치적 지원 등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간호법 제정안이 간호조무사 학력제한 조항을 포함시킨 것도 시대착오적인 내용으로 꼽힌다. 대학이나 전문대학을 나오면 간호조무사가 되기 더 어렵도록 만들었다. 특성화고에서 간호조무 관련 학과를 나오면 간호조무사 자격시험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에서 간호조무 관련 학과를 졸업하면 일정 기간 학원에 다녀야 시험 응시 자격이 부여된다. 이러한 입법 예는 다른 직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간호협회는 동일한 내용이 의료법에도 있다고 강변하지만, 간호조무사를 차별하는 학력제한 조항을 굳이 간호법 제정안에 포함시킨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간호법이 간호사를 상단에 위치시키는 신분제도를 도입하고 있다는 게 간호조무사들의 비판이다.

민주당과 정의당, 의사없는 돌봄센터 설립 가능성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

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권은 이 같은 정치적 논점을 배제하면서 간호법이 간호사 처우개선을 위한 법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정의당은 16일 윤석열 대통령의 간호법 제정안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에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정의당 배진교 원내대표가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의당은 16일 윤석열 대통령의 간호법 제정안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에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정의당 배진교 원내대표가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16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마치 간호사들이 의사들의 어떤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진료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며 “간호법은 간호사들의 인력 양성, 처우 개선 그리고 지금 고령화 시대의 지역사회에서 돌봄 서비스를 확대해 나가기 위한 방안들이 담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의사들이 얘기하고 있는 것은 이 간호법 제정을 반대하기 위한 상당한 ‘거짓 선전’”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처럼 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권은 돌봄 서비스 확대 과정에서 간호사들이 의사없는 상태에서 사실상 간호서비스 내지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회피하는 모습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의 전형적인 논점 흐리기 전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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