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만 바라보며 오늘도 ‘김정은 참수(斬首)’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이 땅의 우익 동지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

1895년 일본은 격랑에 휩싸였다. 청일전쟁의 각종 전투와 해전에서는 연전연승했으나 외교전에서 참패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으로부터 전리품으로 탈취한 랴오둥(遼東)반도를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에 의해 분루를 삼키며 반환했다.

목숨 걸고 전투를 벌여 전쟁에서 이겨놓았더니 외교 무능으로 전리품을 토해내자 청일전쟁에 참전했던 100여 명의 장교와 사병들이 자결로 항의했다. 언론의 빗발치는 비난, 대중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일본은 이때 큰 교훈을 얻었다. 국제사회에서는 오로지 힘, 즉 국력만이 정의로울 수 있으며, 국가 생존과 구원은 군사력을 통해서만 확보된다는 처절한 교훈 말이다.

이 무렵 일본을 휩쓸었던 유행가가 있었다.‘외교의 노래’라는 것인데, 그 가사 내용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서쪽에는 영국이 있고 북쪽에는 러시아가 있다네
동포여 조심하라! 겉으로 그들은 조약을 맺는다네
그러나 그들의 가슴 속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네
국제법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네
그러나 때가 오면 기억하라
강자가 약자를 먹어 치운다는 것을
항구적인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

미국이 ‘악의 축’ 국가의 괴수 김정은과 회담을 한단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 판 ‘벼랑 끝 전술’을 동원했다. 그는 대선 후보 시절 “주한미군 주둔 비용 100% 전액 한국 부담”, “한국의 핵 개발 용인” “김정은과 만나 대화” 등등의 발언을 한 바 있다.

그의 후보 시절 발언대로 김정은과 미북 대화가 성사되기 일보 직전이다. 기가 센 두 사람이 만나 무슨 대화가 진행될 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대한민국의 정체성 유지 및 생존에 그다지 도움이 되는 합의는 나오기 힘들 것이란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북을 향한 예방전쟁(preventative war)’, ‘미치광이 김정은 참수(斬首)’, ‘북한은 곧 처리될 것’ 등등 기회가 날 때마다 절제되지 않은 강경 발언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이 발언을 액면 그대로 믿은 순진한 이 땅의 우익 동지들 중 “미국이 북한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 “이왕 공격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북폭을 감행하라”면서 가슴 쓸어내린 분이 한두 분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애절하게 한미 동맹을 외치며 성조기를 흔들었던 기대와 열망은 어디로 가고, 한 차례 파기 소동까지 벌인 끝에 미북 회담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미북 회담이 진행되면 당장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는 정치인, 언론의 선동은 맞는 말인가? 당장 핵 공포가 사라지고, 북한이 뉴욕이나 상하이처럼 변할 것인가?

절제되지 않은 희망사항들이 마치 팩트(fact)인양 생산되고 있는데, 이러한 환상의 망언 대열에 미국이 앞장서고 있다. 대체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가?

국제관계란 늘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진리다. 영국의 외무장관·총리를 역임했던 파머스턴 경의 “우리에게는 항구적인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이익만이 항구적이고 영원하다. 그리고 이 이익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라는 경구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제정치의 살벌한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프러시아의 프리데릭 대제(Frederick the Great)는 “무기 없는 외교는 악기 없는 음악과 같다”고 말했다. 국익이 작동하는 현장에서 통용되는 정의와 진실은 평화․대화․상호존중 같은 추상적인 관념어와는 완연히 차원이 다르다. 그곳엔 오로지 무기․힘․국력 이런 것만 난무할 뿐이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을 동맹국으로 예우하여 비싼 대가를 치러가면서 지켜야 할 이유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한국이 자신들의‘국익’에 현저히 도움이 될 때에 한한다.

지금 이 땅은 백주에, 그것도 중인환시리에 “미국 놈들 몰아내자”“미제 타도”를 외치면서 세종대로의 주한미국대사관을 포위하고 협박 시위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미국이 뭐가 아쉬워 막대한 비용과 인력의 희생을 무릅써가면서 한국을 보호하고, 북한을 정밀 타격하겠다는 것인가.

이러한 국익 우선의 살벌한 국제정치 작동원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 땅의 우익 동지들은 순진하게도 미국만 바라보며 오늘도 ‘김정은 참수(斬首)’의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다. 미국은 자신들의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한국을 어떻게 취급했고, 그들은 어떻게 한국을 버리려 했는지 그 참혹했던 배신의 역사를 밝힌다.

1. 최초의 배신 : 태프트-가쓰라 조약(1905년 7월 29일)

1882년 한국(당시 조선)은 서양 열강 중에서도 미국과 최초로 수교조약을 체결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한미수교조약 체결을 위한 수교 협상은 조선 땅이 아니라 중국 톈진(天津)에서, 청나라의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이 대신해 주었으며, 수교조약문도 청나라 외교 관리들이 대신 써주었다. 조선은 그저 상국(上國)의 관리들이 만들어준 조문 중 몇 곳을 수정 가필한 후 미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 지도부는 ‘거중조정에 최선을 다한다’는 수호조약의 구절을 “미국이 제국주의 포식자들로부터 조선을 보호해 줄 새로운 ‘형님 나라’가 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조선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은 외교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우호적 중립’, 일반 용어로 바꾸면 ‘무관심’이었다. 미국은 조선에서 자신들이 반드시 쟁취해야 할 정도의 중대한 이권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대외 수출 총액은 9억 2,100만 달러였다. 이 가운데 조선에 대한 수출액은 0.013%인 11만 3,803달러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은 총생산량의 90%를 국내 수요에 충당하고, 나머지 10%를 해외에 수출하고 있었다. 그들의 총생산량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미국 경제에서 조선과의 교역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0.00013%, 무시할 수밖에 없는 미미한 양이었다.

1905년 7월 29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태프트 육군 장관을 일본에 보내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와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었다. 내용인즉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대가로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도록 묵인하는 것이었다.

조선을 일본에 넘겨버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아시아를 순방 중이던 자기 딸 앨리스 루스벨트를 조선에 보냈다. 1905년 9월 19일 앨리스 루스벨트가 조선에 도착하자 고종의 부인이었던 엄비(嚴妃)는 민간에서 3만 원의 거금을 빚으로 얻어 앨리스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는 등 국빈으로서 극진하게 예우접했다.

자신들의 나라를 일본에 넘겨버린 그 대통령의 딸을 위해 조선의 국가 지도부는 “황실을 방문한 어느 누구보다 극진한 대접”을 베푼 것이다.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넘겨버린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9월 5일)된 지 2주일 후에 서울에서 벌어졌던 실화다.

앨리스가 서울에서 조선과 미국의 우호를 위해 축배를 든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그 직후인 1905년 11월 28일 루스벨트는 서양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을 폐쇄했다. 미국인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우르르 도망치는 쥐들처럼” 서울에서 도망쳐 나갔다. 루스벨트가 체결한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한국을 일본의 강점 하에 놓이도록 만든 사형 선고문이었다.

2. 두 번째 배신 : 1950년 1월 애치슨 선언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3년여 군정을 실시했던 미군은 1949년 6월 말 군사고문단 200여 명을 남기고 전원 철수했다. 그들이 남한에서 철수한 결정적 이유는 한국이 자신들의 인력과 비용을 투입해가며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나라’, 즉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미 군부의 공동전략조사위원회는 1947년 4월 27일 미국 안보의 견지에서 세계 여러 나라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분석한 바 있다. 그 결과 한국은 16개 나라 및 지역 중에서 15등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 미국 정책의 시험대」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이날 애치슨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을 지나 오키나와와 대만을 거쳐 필리핀으로 그어진다”고 선언했다. 이어 애치슨은 “대만과 한국은 모두 미국의 방어권 밖에 있다. 다시 말해 미국 방위권 밖의 일에 대해서 미국은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애치슨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은 그 무렵 모스크바에서 추진 중인 중소(中蘇) 동맹조약을 흔들기 위해서였다.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이 70일 간에 걸친 밀고 당기기 협상을 벌이는 와중에 미국은 마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련보다는 미국과 손잡고 협력하는 것이 중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 애치슨 선언이다.

미국은 애치슨 선언을 통해 마오쩌둥을 스탈린으로부터 떼어 놓으려 시도했다. 즉 마오쩌둥이 소련이 아니라 미국과 손잡을 경우, 한국과 대만 정도는 당신들에게 넘겨줄 용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마오는 미국이 내민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고 1950년 봄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새로운 중소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마오와의 회담에서 새로 출범한 공산중국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엿 먹일 수 있는 대모략을 구상하게 된다. 그 모략은 김일성의 남침전쟁 요구를 승인하는 것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과 중소 동맹조약을 체결한 지 3개월 후 김일성의 인민군이 남침전쟁을 시작했다. 1년 전 남한에서 철군했던 미국은 일주일 만에 전광석화처럼 참전을 결정했다. 한국이 공산화될 경우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 도미노 현상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대모략의 실체는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이용하여 미국과 중공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다음, 두 나라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인민군이 너무 빨리 남한을 해방시키면 안 되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이 참전할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교묘한 술수로 인해 단기간에 끝장날 수도 있었던 김일성의 남한 전 지역 석권은 계속 지연되었다. 인민군이 서울 점령 후 사흘 간 한강 도하가 지연된 사실, 방호산이 지휘하는 인민군 6사단이 미군이나 한국군이 전혀 없어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호남 지역을 우회하여 시간과 병력을 낭비한 사실, 전쟁 초기와 낙동강 전투 때 중공군이 개입하지 못하고 인천상륙 이후에나 출동한 사실 등은 한반도로 미군과 중공군을 끌어들여 미중의 발목을 동시에 잡기 위한 스탈린의 대모략이 연출한 드라마틱한 결과였다. 만약 중공군이 7월 초, 혹은 낙동강 전투 초기에 개입했다면 8월 15일 무렵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되었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전쟁이었던 6․25는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 이후 미국과 중공 간의 전쟁으로 변했다. 출범한 지 1년도 안 되어 모든 것이 부족했던 중공은 한반도에서 국력을 소진해가며 미국과 힘겹게 싸웠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일으킨 6·25 남침전쟁을 이용하여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공이 싸우도록 유도하여 중공의 성장을 방해 저지했다. 또 전후(戰後) 오랫동안 미·중이 적대관계가 되도록 하는 데도 성공했다.

한국전에 불법 개입한 중공은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체제에서 완전 고립되어 20여 년 이상을 ‘죽(竹)의 장막’ 속에서 자력갱생하느라 허덕여야 했다.

3. 세 번째 배신 : 이승만 제거 위한 에버레디 작전

6․25에 참전한 미국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전쟁 목표가 확연하게 달랐다. 이승만은 공산군의 남침 전쟁을 이용하여 미수복 지역을 수복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목표였고, 미국은 유엔군을 조직하여 치안유지적 활동, 즉 전쟁 이전 상태로 복원시키는 제한전(limited war)이 목표였다.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한반도에서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명분 있는 휴전, 그리고 일본을 재무장시켜 중공과 소련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틈만 나면 “북진통일”을 외치는 고집 센 노인 이승만이 문제였다.

미국은 195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이용하여 이승만을 실각시키고 미국의 말을 잘 듣는 인물을 대통령에 당선시켜 명분 있는 휴전을 하고 철수를 계획했다. 당시 한국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국회 내의 반(反)이승만 세력을 결집하면 이 계획은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이승만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52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내놓자, 반(反)이승만계 의원들은 5월 29일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를 전격 실시해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계획을 세웠다. 이 사실을 간파한 이승만은 5월 24일 공석 중인 국무총리에 장택상, 내무장관에 이범석을 임명하고 다음날 0시를 기해 ‘공산침투분자와 폭도 소탕’ 명목으로 부산을 비롯한 전남북, 경남의 23개 시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은 6월 2일 직선제 개헌안이 24시간 이내에 통과되지 않으면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최후 통첩하자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미국은 뜻을 접는다. 이승만과 미국 측은 발췌개헌안으로 타협했다. 이것이 부산 정치파동의 본질이다.

현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자 분단의 고착화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승만은 휴전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의 조건으로 미국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어느 나라와도 이런 조약을 체결한 전례가 없다”며 거절했다.

미국은 이승만이 휴전협정에 계속 반대하는 등 자신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경우 이승만을 체포하고 남한을 다시 미군정 하에 두기 위한 ‘에버레디 계획’을 가동했다. 이 위기의 순간에 이승만과 조지 워싱턴대학, 프린스턴대학 동문인 덜레스 국무장관은 “한국에서 미국이 싸우고 있는 명분에 대치되는 계획과 행동은 생각할 수 없다”면서 미8군이 작성한 에버레디 계획을 강력 반대했다.

이승만도 휴전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최선의 카드는 휴전의 판을 뒤흔들어 미국으로부터 한국이 원하는 선물 보따리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를 위해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충격을 받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대통령 특사로 한국에 급파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약속했다. 그 결과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4. 네 번째 배신 : 닉슨 독트린(1969년 7월 25일)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1969년 7월 25일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들은 자국 국방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이 월남을 비롯한 아시아 대륙에 더 이상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닉슨 독트린은 1950년의 애치슨 선언처럼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라는 큰 틀로 들여다봐야 진정한 의미 파악이 가능하다. 월남전의 수렁에서 헤매던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일으킨 쿠데타를 분석한 결과 중대한 시사점을 얻었다. 수하르토가 소련 편향의 수카르노 정권을 제거한 후 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의 길로 나가는 모습을 예의주시한 것이다.

수하르토의 사례를 보면서 미국은 월남전을 원점에서 재검토했다. 미국의 월남전 참전은 주변국가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과, 중공의 남진을 막기 위한 예방전이었다. 미국은 1950년 한반도에서 38선을 넘었다가 중공의 불법 개입을 불러온 점을 뼈아픈 교훈으로 삼았다.

그 결과 해공군기가 북위 17도선을 넘어 북폭을 감행한 사례는 많았으나, 미 지상군은 단 한 명도 북위 17도선을 넘지 않았다. 북위 17도선 아래에서 침투한 월맹군과 베트공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을 뿐이다.

이 와중에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하면 베트남은 공산화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인도네시아 사례를 분석한 결과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 통일이 되어도 통일베트남은 중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중국과 맞서 싸우는 민족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무렵 냉전이 격화되면서 공산 진영은 중국과 소련이 내분을 일으키고 있었다. 미국은 1950년 초 애치슨 선언을 통해 중국과 손잡고 소련을 고립시키려 했던 그 전략을 다시 꺼내 들었다. 키신저를 앞세워 중국을 소련으로부터 분리시킨 다음 미·중이 손잡고 소련을 왕따 시키는 글로벌 대전략 프로그램을 가동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중국이 미군과 대항하는 데 따르는 안보 불안을 해소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당시 중국은 주한미군과 베트남의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남동해안에 55개 사단을 배치하고 있었다. 닉슨 행정부는 중국의 군사력을 소련과의 싸움에 집중토록 하기 위해 월남전 종식, 대만해협을 경비하던 미 해군의 태평양 한복판으로의 재배치, 그리고 주한미군의 감축에 돌입했다.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미국은 월남에서 싸우다 말고 파리에서 엉터리 휴전회담을 체결하고 재빨리 철수했다. 1970년 7월 5일, 닉슨 행정부는 한국과 사전 협의 없이 6만 2,000명의 주한미군 중 2만 명의 철수를 발표했다. 미국은 한국에 알리지도 않고 이미 지난 6개월 동안 계속해서 주한미군을 빼내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에 2개 전투사단을 비롯한 5만 여 병력을 파병하여 미군을 돕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한국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을 빼내가면서 “이제부터 너희 나라는 너희들 힘으로 지켜라”라고 나온 것이다.

미국의 ‘닉슨 독트린’이라는 도전에 대한 박정희의 응전은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10월유신, 중화학공업으로 국산 무기 제조,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이었다. 10월 유신을 정권야욕에 눈이 먼 독재자의 발악이니 ‘민주주의의 장례식’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치인이나 언론인, 국내 학자들의 우물 안 개구리 시각이다.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들이 담당해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의 외교적 수사를 한 꺼풀 벗겨내면 그 본뜻은 “마오쩌둥이여, 중국 주변의 미군을 다 빼내 줄 터이니, 그리고 유엔에서 대만을 쫓아내고 그대의 나라를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인정할 테니 소련과의 대결에 집중하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중국은 베트남과 한국의 미군 압력에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55개 사단을 북만주로 이동하여 소련과의 대치를 강화했다. 중국이 만주에 대병력을 집결하자 충격을 받은 소련도 유럽에 배치했던 44개 사단을 시베리아 지역으로 돌려 중국에 맞섰다.

박정희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1년 3월 27일 주한미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미 7사단 병력 2만 명이 철수했다. 비무장지대의 서부 해안 전선 27㎞의 방어를 담당했던 미 7사단이 철수하면서 한국군이 비무장지대 전체를 방어하게 됐다. 1971년 2월 닉슨 대통령은 중국과의 수교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대만이 유엔에서 축출되고 중공이 유엔 의석과 안보리 상임위원회 자리를 차지했다.

5. 다섯 번째 배신 : 박정희 핵무기 개발 저지 공작

박정희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 구상을 하게 된 시기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1969년 7월이다. 닉슨 독트린에 의해 1970년 ‘주한미군 감축 계획’과 ‘5년 후 주한미군 완전 철수’라는 미국의 입장이 통보되자 어느 날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원자폭탄을 연구해 보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하여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놔야 하지 않겠느냐.”(김종필 지음·중앙일보 김종필증언록 팀 엮음, 『김종필증언록(1)』, 426쪽)

닉슨 행정부는 한국에서 미 7사단을 철수시킨 후 그에 대한 보완을 위해 한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미 의회와 협의 과정에서 마찰이 일어나 지지부진했다. 박 대통령은 국군 현대화 계획과는 별도로 ‘국군 전력증강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이 계획의 이름을 ‘율곡사업’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극비리에 오원철(경제2수석비서관), 유재흥(국방부장관), 이낙선(상공부장관), 최형섭(과학기술처장관), 신응균(국방과학연구소장)으로 무기개발 5인위원회를 구성했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계획은 이 ‘율곡사업’에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4년 10월 19일 프랑스와 원자력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프랑스와의 협력 하에 한국 연구진은 1970년대 중반에 ‘20킬로톤(kt) 이상 급, 중량 1톤 미만’의 원자폭탄 설계를 마쳤다. 이어서 프랑스로부터 핵연료 제조장비 및 기술, 핵 재처리시설, 벨기에로부터 중수(重水) 처리기술을 제공받기로 했다. 이를 눈채 챈 미국은 박정희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해 프랑스의 팔을 비틀어 한국과의 계약을 파기시켰다.

박정희를 또 다시 ‘핵개발’로 내몬 것은 지미 카터다. 친북 성향의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주한미군과 남한에서 미국 핵무기 철수를 발표하자 박정희는 “미군은 갈 테면 가라”면서 핵폭탄 개발을 재개했다. 1978년 9월 26일에는 핵무기 운반수단인 국산 미사일 ‘백곰’ 공개 발사에 성공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궁정동 만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미국이 10·26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을 홍보하는 데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에서는 대사관 직원들이 주요 신문사를 순방하면서 미 CIA 개입설을 적극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개발을 강행하다가 당했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퍼져나갔다.

카터가 재선에 실패하고 이어 등장한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장군의 집권을 승인하면서 대덕연구단지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핵개발에 종사하고 있던 모든 연구팀의 해체를 요구했다. 1980년 8월 전두환과 그 측근들은 이 요구를 수용하여 ‘백곰’ 개발의 사령탑이었던 심문택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을 비롯하여 책임자였던 이경서·강인구 박사 등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30여 명의 간부를 해임했다.

1982년 12월 김성진 신임 ADD 소장은 취임 즉시 총 인원 2,400여 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800명을 쫓아내 ADD의 기능을 완전 마비시켰다. 이어 1981년 1월 핵연료개발공단을 원자력연구소와 통합하고 명칭을 에너지연구소로 변경했고, 핵연료 개발 연구를 금지시켰다.

ADD를 초토화한 지 10년이 지난 1991년 11월 8일, 이번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나서서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발표했다. “대한민국은 핵연료 재처리시설 및 핵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로부터 15년 후인 2006년 12월, 북한은 핵실험에 성공하여 핵보유 국가를 선언했다. 이제는 수소폭탄 보유까지 의심되는 단계에 들어섬으로써 대한민국은 김정은의 핵 인질이 되고 말았다.

5. 남북 평화협정, 그 말로는?

최근 일고 있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문제는 월남을 패망으로 이끈 파리 평화협정의 사례를 보면 그 불길한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남북문제를 두고 국론분열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우익 동지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길한 미북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김정은은 여러 가지 카드를 동시에 쥐고 있다. 핵 폐기 쇼를 통해 얻을 것은 다 얻고 시간을 때운 다음 또 다시 핵실험을 하면 그만이다. 1994년 미북의 제네바 핵 협상을 상기하시기 바란다. 그보다 더 화끈한 카드도 있다.

지금까지 북한 핵․미사일의 타격 목표는 미 본토, 하와이․괌 군사기지, 일본의 군사기지, 남한의 각종 시설물이었다. 이것을 베이징, 선양(瀋陽), 뤼순(旅順)의 중국 해군기지로 방향만 틀면 하루아침에 김정은은 미국의 국익에 적나라하게 부합되는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 중국 포위전략을 구사하는 신냉전 시대에 김정은은 미중 사이에서 끝발 높은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셈이다.

미국은 합리적 이성에 의해 작동하는 자국 국익 우선의 나라일 뿐, 결코 한국의 안위를 위해 헌신하는, 달라는 대로 다 주는 마음씨 상냥한 천사(天使)는 아니다. 한국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 한국이 망하건 말건 미국은 관심 없다.

이번 싱가포르 미북 회담에서 김정은이 미국과 맞장 뜨기 위해 개발한 핵․미사일을 “중국 견제용으로 사용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하는 순간, 한반도의 주도권과 관리권이 북한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것이 ‘국익’에 의해 작동하는 국제정치학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참고로, 앞서 소개한 일본의 ‘외교의 노래’가 유행하던 무렵, 조선에서는 ‘새야새야 파랑새야’란 노래가 유행했다. 그 가사 내용과 일본을 뜨겁게 달구었던 ‘외교의 노래’에 감긴 의미와 수준을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아랫녘 새는 아래로 가고 윗녘 새는 위로 가고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손톱 발톱 다 닳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전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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