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자의 원리들이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지만 그 원리들은 너무나도 평범하다. Duncan Whitmore은 이를 ① 불가능성, ② 인간본성, ③ 급진주의 대(對) 점진주의로 나누어 조명한다. 여기에서는 이 중 첫 번째 부분을 발췌하여 싣는다. 원문 전체의 한글 번역은 『미제스와이어(www.mises.kr)』에 실려 있다.]

자유주의는 -국가로부터의 보다 많은 자유를 내세우는 그 어떤 정치적 입장도 마찬가지로- 윤리적 및 경제적 다양한 이유들을 내세운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만약 국가가 없다면 우리는 불평등, 대중들의 궁핍, 과도한 탐욕 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자유주의는 바람직하지도 않으며/않거나 정당화될 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익히 들어 왔던 비판이다.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유주의 및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며, 자유주의자는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는 몽상가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유주의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와는 관계없이 자유주의는 불가능(impossibility), 불확실(improbability), 혹은 단순히 자유주의적 이상에 대한 거부감 등이 합쳐져서 전적으로 혹은 근본적으로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 주제에 주목할 것이다.

우선 먼저, 비폭력이라는 자유주의 윤리에 대해 살펴보자. 자유주의의 비폭력 윤리는 어느 누구도 당신의 동의 없이는 당신의 신체나 재산에 대해 물리적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부터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는, 광범위하게 말한다면, 폭력(violence)과 공격(aggression)이 최소화된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폭력과 공격이 최소화된 세상이라는 목표가 달성될 수 없는 비현실적인 목표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자.

불가능성(Impossibility)

우선 살펴볼 것은 자유주의 윤리를 달성하는 것이 물리적 또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인지 여부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한 문장(명제)이 윤리적 문장(명제)으로서 유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리적으로 이행 가능한 범주 안에 놓여 있어야 한다. 한 사람에게 동시에 두 곳의 장소에 나타나야 한다거나 3개의 사과에 1개를 추가해서 사과 5개를 만들라고 하는 것과 같은 요구를 하는 윤리라면 우스꽝스럽다. 이런 것들은 달성하기가 쉬운지 어려운지 하는 문제와는 관계없이 달성될 수 없는 목표들이다. 마찬가지로 엄격한 의미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윤리적 명제도 있다. 그 명제를 이행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거나 대부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그렇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중국으로 점프를 해보라는 윤리라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떤 한 사람이 영국의 땅을 박차고 올라서 공중을 날아 중국에 도달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수단이 아직 우리에게는 없으며, 따라서 현재 이것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침으로 삼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자유주의 윤리가 이러한 종류의 불가능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특정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는 요구인 자유주의 윤리는 모든 윤리들 중 ‘가장 지키기 쉬운 것’들 중 하나이다. 그저 간단히 타인의 신체나 재산에 대한 침해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바로 지금 당장 안락의자에 앉아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즉, 폭력과 공격 행동을 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는 일을 하지 않기만 하면 되므로, 이 윤리는 바로 지금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행할 수 있는 범주 내에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그 윤리를 위반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더 힘들다고 말할 수 있다. 폭력적인 행위를 하려면, 그냥 가만히 앉아있으면 될 일을 굳이 일어서서 상대를 찾고 그리고 그를 공격하거나 강도짓을 하는 행위를 벌려야하기 때문이다. 

다소 진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윤리와 다른 윤리들, 예를 들어 빈곤의 극복, 민주주의의 확산, 평등의 촉진, 혹은 행복이나 성취감의 추구처럼 훨씬 더 미묘한 목표 같은 다른 윤리들의 물리적 달성 가능성을 비교해보자. 이 모든 윤리들은 주류(mainstream)측에서 볼 때는 완벽히 타당하며 고상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유주의 윤리에 비해 달성하기는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이 윤리들은 일종의 적극적인 행동(positive action)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빈곤의 극복은 더 많은 노동, 더 높은 생산성, 그리고 보다 많은 부의 창출을 요구한다. 민주주의의 확산은 무장 투쟁, 적극적인 평화유지, 그리고 선거를 관리하는 제도의 설립과 국민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투표장으로 향할 의지가 요구될 것이다(물론 이러한 이상이 순수하고, 단순히 권력을 잡거나 자원에 대한 통제를 하기 위한 하나의 요식행위가 아니라는 전제조건 하에서 그렇다). 평등은 생산적인 노력을 통해 우선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부를 적극적으로 재분배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조롱거리로 전락해 있는 자유주의가 칭찬 일색인 다른 것들에 비해 훨씬 더 현실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유주의 윤리는 공허하고 실질이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들과 국가는 주류가 인정하고 있는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매일 같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판단하자면, 이 목표들은 전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제를 시행하면서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을 시장가치보다 낮게 책정되도록 만들면서 수요가 폭증하여 공급부족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지 않는다면 비정상이다(의료보험, 꽉 막힌 도로 등을 생각해보라). 돈을 찍어 내서 부를 창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는 이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끝없이 쌓여가는 (정부)부채와 엄청나게 늘어나는 (정부)지출이라고 하는 현재의 상황이 (지속)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가 탄생할 당시에 서구 국가들에게는 지난 수 세대에 걸쳐 축적한 자본이 있었고, 이 축적된 자본이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여 놓았었다. 이것이 정치인들에게는 절대 고갈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금고(Fund)가 되어버렸고, 그들은 이 돈을 퇴직 수당, 복지 수당, 산업의 국유화, 공공 소유 사회간접자본 등등의 형태로 유권자들의 표를 사기 위한 뇌물로 활용했다. 정치인들은 증세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지출하려고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출의 대부분은 차입금으로 충당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축적된 자본이 이 정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세수가 확보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정부 부채와 인플레이션은 사회의 양 극단, 즉 가장 약한 계층과 가장 강한 계층 -복지 혜택의 대부분을 받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인플레이션의 위협을 자산의 명목가치 상승으로 극복한 가장 부유한 사람들-, 그리고 정부 부채 상환 시기가 도래하기 전에 은퇴하게 되어 단물만 빼먹게 되는 베이비붐 세대에게 혜택을 주었다. 이 사치스러운 낭비성 소비가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자본소비를 은폐해 왔지만, 이제까지의 무자비한 자본소비로 인해 이제는 자본의 생산성이 증가하는 지출 수준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까지 되어버렸다. 오늘날 정부는 세입만으로는 부채에 대한 이자를 상환하기에도 급급하며, 상환 기간이 도래한 부채를 갚기 위해 또 다시 더 많은 차입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있다. 특히 현재 앞서 언급된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를 하고 있으며, 이는 이제까지 은퇴자들을 지탱해 왔던 엄청난 규모의 노동력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앞으로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성이 충분하지 않다면, 세 가지의 선택 대안만이 남게 된다. 각종 복지 혜택의 폐지, 혹은 채무 불이행 선언, 혹은 지폐를 마구 찍어서 모든 지불을 다 하는 것이 그것이다. 첫 번째 대안은 엄청난 사회적 불만을 야기할 것이고, 두 번째 대안은 금융시장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대안은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을 유발할 것이다. 매우 불편한 일이지만, 곧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다른 것도 아닌 정통적인 통화론(monetary orthodoxy)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금으로의 복귀나 가상화폐(암호화폐, Crypto currency)처럼 비국가적으로 추진되는 해결책들이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의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에 의해 통제된 화폐와 금융이 붕괴 직전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가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온건한 국가주의자들이 볼 때조차 우습게 보인다.

 

저자) Duncan Whitmore
역자) 권혁철 (자유기업원 부원장)


▶원문) https://mises.org/wire/libertarianism-utopian

▶자유와 시장경제에 관한 더 많은 글을 「미제스와이어」(www.mises.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