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본은 축제분위기였다. 나라 전체가 들떠 있었다. 근대화의 우등생인 일본은 서양이 수 백 년 걸린 개혁을 불과 십 수 년 만에 압축 달성했다. 그리고 300년만의 리턴 매치에서 숙적인 중국의 무릎을 꿇렸지만 그래봐야 결국 지역구였다. 그런 일본에 손을 내밀어 훌쩍 몇 체급을 끌어올려 준 나라가 영국이다. 1902년의 영일동맹으로 일본은 지역구에서 전구구로 올라섰다. 신의 선물과도 같았던 영일 동맹을 ‘메이지 다이쇼 견문사(明治大正見聞史’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영일동맹이 35년 무렵 체결되었다. 당시 이 소식에 기뻐하지 않는
정치는 싫은 사람과 밥 먹고 지지자들과 싸우는 일이라고 했다. 이 정권은 반대로 하고 있다. 싫은 사람에게 ‘콩밥’을 먹이고 지지자들에게는 발목을 잡혀 질질 끌려가는 중이다. 2016년 병신반정(丙申反正)의 주력부대인 민노총은 촛불의 기억을 강제하며 지지자이자 채권자로서 자신들의 지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아주 급해졌다. 자기들도 알고 있다. 이 정권이 얼마 안 가 힘이 빠질 것을 알고 있기에 더 늦기 전 ‘지분 초과 달성’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기관을 점거하고 국회와 검찰에까지 난입하여 생떼를 쓴다. 작년 1
지난 2년 동안 보수는 참 많이 배웠다. 법치가 아니라 정치 논리에 의해서 대통령이 쫓겨나고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목격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자신들이 만들어 온 나라가 한 순간에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집에서 분노만 하고 있을게 아니라 거리로 나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하루 종일 “석방하라” 외쳐봐야 목만 상한다는 사실을 배웠고 그 힘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해야 한다는 것까지 배웠으니 이제 기초 학습은 끝난 셈이다.최근 주목받고 있는 자유한국당 입당 운동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가치 실현을 위해
기원전 494년 로마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시민들이 총파업을 벌인 것이다. 로마는 외부의 침입이 없을 때는 대부분 내전 상태였다. 귀족과 평민이 항상 각을 세우고 대립했다. 그러나 이렇게 노골적인 총파업은 처음이었다. 당시 로마의 머리 위에는 상습적 위협인 에트루리라가 있었고 등 쪽에는 삼니움 그리고 주변 산지에는 아이퀴인들과 볼스키인들이 틈만 나면 로마를 집적거렸다.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던 로마의 병사들은 자기들의 개혁 조건을 원로원이 무시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가는 대신 아니오 강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몬스 사
몇 달이 지났는데도 이 사진만 보면 짜증이 난다. 지난 7월 인도 뉴델리에서 있었던 삼성전자 노이다 공장 준공식 사진이다. 사진 중앙은 존경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모디 총리다. 그렇다면 존경해 마지않는 문재인 대통령의 왼쪽은 누구일까.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옆은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그 다음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었고 이재용 부회장은 세 번째였다. 외교부는 영어 말고는 아는 게 없어 그렇다 치자. 대체 세계 최대 모바일 공장 신규라인을 갖추게 된다는 노이
경성이 뜨고 있다. 개화기 의상을 빌려 입은 남녀가 경성 과자점이라는 옥호의 가게에서 서양과자를 사 먹고 덕수궁 근정전을 산책한다. 서울이 아닌 경성, 일제 치하 식민지의 수도가 쇠잔과 영락(零落)의 이미지를 털고 향수의 대상으로 유행하는 것은 재미있다. 이런 현상을 만들어 낸 1등 공신은 당연히 영상 미디어다.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와 ‘미스터 선샤인’ 그리고 영화 ‘석조저택 살인사건’ 등은 오로지 암울하기만 했을 것이라는 통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격동기의 매력을 발굴한다. 근대의 재해석 수준을 넘어 아예 근대를 새로 만드는
90년대 말 홍대 앞 인디 뮤직 신이 태동할 무렵 이런 농담 같은 격언이 유행했었다. “밴드부터 만들어. 기타는 나중에 배우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하실지 모르겠다. 된다. 어렵지 않다. 소리를 내는 데만 일주일 이상 걸리는 클라리넷 같은 악기와 달리 기타는 쉬운 코드 두세 개를 외우는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드럼도 ‘쿵쿵 딱 쿵쿵 딱’ 기본 리듬을 두드리는데 역시 두 시간이면 넉넉하다(기타보다 더 쉽다). 베이스 기타도 마찬가지. 기타라는 이름 때문에 멜로디 파트로 오해하기 쉬운데 베이스 기타는 리듬 악기다. 드럼 박자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개화기 조선을 배경으로 러시아, 일본, 미국이 격돌하는 이야기다. 결말이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다. 드라마 대사에는 법칙이 있다. 대부분의 대사는 다음에 나올 이야기의 예고편이다. 가령, “나는 정말 도박이 싫어”라는 사람이 있으면 십중팔구 나중에 도박에 휘말리게 된다. ‘미스터 선샤인’에는 조선에 진주한 미군을 보며 등장인물들이 이런 대사를 한다. “일본 놈들보다 더한 놈들일지 몰라.” “어째 미군이 조선 땅에 있단 말인가.” 해서 좀 불안하다. 조선의 의기를 높이고 외세를 배척하며 ‘우리끼리
거실 한 구석 아이들이 먹다 밀어놓은 피자 박스가 보인다. 그런데 피자 브랜드가 ‘졸라 싼 피자’다. 아무리 대한민국 언어생활이 막장이라지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된다. 니들은 죽었다고 복창해라, 항의하려고 박스를 들어 전화번호를 찾는데 그제야 한쪽이 가려져 있던 피자의 ‘본명’이 보인다. 고르곤‘졸라 씬 피자’였다. 문제는 소생의 언어생활이었다. 평소 그런 말을 쓰니까 글자가 그렇게 보인 것이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대체로 목표 달성에 성공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들다보니 아닌 것까지 그걸로
보수 회생을 이야기하면서 배리 골드워터 이름까지 나왔으면 갈 데까지 간 거다. 아시다시피 그는 미국 공화당 역사상 최악의 표차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인물이다. 선거에서는 졌지만 배리 골드워터는 정치에서는 승리했다. 1955년 창간된 ‘내셔널 리뷰’를 통해 보수 이론이 ‘정립’되고 1960년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이 결성되면서 이론이 ‘운동’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 운동이 배리 골드워터와 결합되면서 정치‘세력화’ 된다. 이른바 ‘배리 골드워터의 아이들’은 1980년 레이건 보수주의 혁명의 중심 세력이 된다. 그래서 정치에서
장담컨대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국제 정치 드라마는 아무리 뛰어난 할리우드 작가라 하더라도 절대 못 쓰는 시나리오다. 상상력이 따라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시나리오란 나름대로 개연성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지금 현실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는 그런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작가는 종이에 이야기를 옮기기 전에 피칭이란 걸 한다. 피칭이란 먼저 말로 주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인데 “이런 얘기 어때?” 하고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돌아올 소리는 뻔하다. “에이. 그게 말이 되냐.” 그렇다. 말이 안 된다. 난데없이
서양사를 읽다보면 포장 안 된 울퉁불퉁 지방도를 시속 100km로 달리는 것 같다. 제국이 쇠락하고(로마), 아버지 죽었다고 왕국이 갈라지고(동중서 프랑크), 황제와 교황이 싸우고(굴욕과 파문) 가문과 가문이 부딪히는 가운데(합스부르크와 발루아) 틈틈이 이민족이 쳐들어오고(이슬람과 몽골) 한동안 지중해를 무대로 아웅다웅 하더니만 불쑥 대서양으로 빠져 나가는 등 하여간 무지하게 호흡이 빠르고 역동적이다. 당연히 중심도 없고 분열이 일상이다. 발칸 반도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그리고 다시 유럽 중앙으로 코어(core)가 이동하며 유럽은 문
근래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보수가 바뀌어야 한다.”, “보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같은 얘기들이다. 나쁜 말도 틀린 말도 아니다. 듣기에도 그럴싸하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랍 속담에 이런 게 있다. “산이 움직였다면 믿으라. 그러나 사람이 바뀌었다면 믿지 말라.” 이것은 통찰인 동시에 인간 정신을 해부한 위대한 생물학적 성과다. 보수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보수다. 미국 보수주의의 중시조 격인 러셀 커크이 쓴 ‘보수의 정신’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러셀 커크는 보수는 인간과 사람을 바라보는 ‘태
시인 엘리엇은 몰라도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다 안다. 이 표현이 ‘황무지’라는 난해한 시의 한 구절이고 그 앞의 문장이 ‘겨울은 오히려 따듯했네.’라는 사실까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4월이 되면 누구 입을 통해서든 한 번은 듣고 넘어간다. 영문학과 졸업한 친구에게 4월이 왜 잔인한 달이냐고 물었다. 하시는 말씀이 4월에는 4ㆍ3이 있고 4ㆍ16이 있고 4ㆍ19가 있기 때문이란다. 과연 386세대의 저력이 느껴지는 답변이다. 4월은 정말 잔인한 달이 될 것 같다. 인류 역사상 이념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최악
방남(訪南)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김여정,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남조선 동무들이래, 앞에서는 살살 웃으며 뒤에서는 등에 칼을 꽂는 데 아주 기겁을 했네.”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말이다. 아시다시피 김여정은 평창이라는 스포츠 행사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김여정의 대한민국 방문은 철저히 외교의 한 방식으로 최소한 펜앤드마이크의 독자들이라면 이면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잘 못 인용되고 있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전쟁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치의 ‘연장’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전쟁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50%대로 떨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 거짓말과 임기응변으로 버티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아마 더 떨어질 것이다. 바닥은 멀지 않다. 정신을 차린 국민들은 촛불을 들었던 자신의 팔에 심하게 짜증을 낼 것이며 슬슬 정권 심판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게 될 것이다. 원래 처음이 어렵다. 두 번부터는 쉽다. 혹독했던 겨울의 기억은 사라지고 올해는 따뜻한 겨울을 맞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너무 유치하고 단세포적인 현실 인식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이런 글이 PenN(펜앤마이크)의 공식 칼럼이라는 사실이 어이
어느 민족이나 나라의 운명에 지리적인 요인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풍요로운 땅은 누구나 침을 흘린다. 해서 해당 지역 거주민들은 침략과 환란을 끼고 살아야 한다. 싸워서 만날 이기고 때마다 방어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땅을 차지하려는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전력戰力이 아니라 절박이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쳐들어오는 군대만 무서운 게 아니다. 더 끔찍한 건 노인, 여자, 아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유랑하는 난민들이다. 저 살던 고단한 땅을 떠나 그보다 나은 곳을 찾아다니는 이들은 잃을 게 없으므로 (어차피 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