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희 칼럼] 집대성돼야 할 개인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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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1.07.10 12:12:17
  • 최종수정 2021.07.1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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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신창이가 된 현대사의 진실을 찾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뜬금없는 얘기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이라도 그 시대를 살아온 어르신들의 보다 많은 개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국가 차원에서 집대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개인의 이야기로 파편처럼 흩어져버리게 만들어서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는 무척 시급하게 진행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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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1.

내 아버지는 은행원이었다. 부모님이 전라남도 목포에서 살던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아마 6‧25 때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은 서울과 전라남도였던 것 같다. 북한에서 내려온 인민군도 문제였지만 남한에 있던 공산주의자, 그들에게 포섭되어 완장 찬 현지인들이 더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자본주의의 첨병이라 여겨졌던 은행원 아버지는 악질 부르주아 반동분자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국군이나 경찰관처럼 숙청 대상으로 꼽혔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 당시만 해도 아녀자나 어린아이들은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어머니와 돌이 채 못된 오빠를 집에 두고 혼자 피란을 갔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 거리로 나가보면 길 양쪽에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고 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고 시체를 너무 많이 봐서인지 죽음에 대한 감각도 무뎌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다 어머니도 경찰서로 잡혀갔다. 경찰서 지하 유치장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이 갇혀 있었다. 대부분 여자와 그들의 아이들이었다. 국군이나 경찰, 혹은 어머니처럼 은행원 가족들이었다. 남편들은 몸을 피했고 처자들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누가 빼앗아갈까봐 한 몸처럼 가슴에 꼭 안고 불안을 견디고 있었다.

한밤중, 취조를 받기 위해 컴컴한 복도에 줄지어 서 있는데 누군가 어머니 곁을 스쳐가며 나지막히 한 마디 던졌다고 했다.

“아짐, 걱정하지 마쇼. 곧 나가게 해 줄 것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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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 이북 지역이었던 곳에는 많은 사연을 지녔을 법한 유적들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강원 철원에 있는 옛 조선로동당 당사.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친오빠는 없었지만 사촌, 육촌 오빠가 여럿 있었는데 대부분 일제 시대에 일본 유학한 인텔리들이었다. 그들의 일부는 좌익 요인으로, 일부는 우익 요인으로 활약한 통에 6‧25 때 서로 간에 제거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오빠 중 전쟁 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 아마도 그들 중 하나가 아직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때 어머니를 살렸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취조실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아버지가 어디로 도망갔느냐고 추궁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실제 아버지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행선지를 정하고 떠날 만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른다고 하면 그들은 기다란 몽둥이를 번쩍 들어 어머니를 때리려 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에 안긴 오빠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 덕분인지 어머니는 매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밤에 어머니는 풀려 나왔다. 어머니 말고 풀려나온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다음날 새벽,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지하 유치장에 사람들을 그대로 가둔 채로 불을 질렀다고 했다. 자칫 어머니도 그들처럼 철창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을 뻔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을 빼내준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 나중에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알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였을 그는 어쩌면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게 어머니 생각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로부터 들은 6‧25전쟁의 이야기이다. 수많은 경험담이 있었지만 내가 글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다. 나는 이 이야기의 진위를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선 어머니가 거짓으로 이야기를 꾸며낼 이유가 없고 몇 번을 들어도 어머니의 이야기에 일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좀더 본격적으로, 적극적으로 어머니의 전쟁 경험담을, 혹은 일제 시대를 살았던 경험담을 들어놓을 걸 하는 아쉬움도 가끔 있다.

2.

개인이 겪은 일에 대한 기록은 실록 등 정사로 적힌 역사 기록 못지 않게 중요하다. 역사의 커다란 줄거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작은 부분까지를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물론 저자를 알 수 없는 《계축일기》나 《인현왕후전》까지도 조선의 소중한 역사 자료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들 기록물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 담겨 있을 수도 있고 자신의 입장에서 편파적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료’일 뿐이지 그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당시의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된 《난중일기》나 《한중록》의 많은 내용이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16세기 말에 일어난 임진왜란이나 18세기에 일어난 임오화변 등에 대한 그 이상의 상세한 기록을 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중록》은 모두 네 번에 걸쳐 쓰였는데 두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친정 집안을 변호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혜경궁 홍씨가 쓴 사도세자의 행적에 대해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첫 번째 편에 실린, 세자빈으로서 가례를 치르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그 시대의 궁중 예법을 추측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최근 6‧25전쟁 참전국에 대해 취재하면서 역사 보존에서의 개인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전쟁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물론 개인들이 겪은 전쟁 이야기도 많다. 6‧25전쟁 통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역사학자 김성칠 교수의, 전쟁 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역사 교과서에 실린 내용 이상으로 실감과 신뢰를 한꺼번에 안겨준다. 그럼에도 개인들이 겪은 이런 이야기들은 그저 ‘개인의 인생사’로 조용히 소멸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안타깝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역사적 진실 여부를 가리는 데는 개인의 경험과 그 기록이 중요한 몫을 담당하게 된다. 개인의 기록은 사사로운 감정의 개입으로 진위를 의심받지만 국가나 정부 주도의 기록도 왜곡의 의심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우리 편’에 유리한 이야기만 써놓았을 것이라는 의심이다. 그래서 정권의 지향하는 바가 달라지면 역사 또한 그 내용이 바뀌어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반영된 개인의 기록이 잘 정리되어 있으면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3.

경기도의 최북단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가면 유엔군(軍) 화장장이라는 시설이 있다. 그 부근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고지전에서 유엔군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자 이들을 위해 화장장 시설을 만들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 화장장 시설로는 국내에서 유일하기 때문에 6·25전쟁 상황에 대한 실증적 자료로서 그 보존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한다.

유구만 남아 있는 경기도 연천군에 자리한 유엔군 화장장 시설
유구만 남아 있는 경기도 연천군에 자리한 유엔군 화장장 시설.

이 시설은 지금 무너진 벽들과 굴뚝 등 당시 건물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구(遺構)만 남아 있다. 이 유구를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301㎥의 작지 않은 건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이곳이 아무리 깊은 산 속이었다 하지만 이만한 건물을 돌로 쌓아 짓는 것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건물을 누가 지었고 어떤 연유로 다 무너졌는지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영국군이 짓고 그들이 철수할 때 부수고 갔다는 설이 있지만 영국군에 확인한 결과 화장장을 지은 일이 없다는 회신이 왔다고 한다. 100년도 안 된 6‧25전쟁 때 일어난 일도 어느덧 많은 부분 미스터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7월27일은 한반도 거의 전체를 초토화한 그 엄청난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68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데 벌써 그 크나큰 사건이 잊히고 있고 많은 부분 진실이 왜곡되고 있다. 실제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데도 이런 상황인데 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놓고 어찌나 논쟁이 많은지 이제는 전체 역사가 믿을 만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가장 가까운 시대이며 지금 우리 국민 중 많은 사람이 실제 겪었던 시대의 역사인 현대사의 난맥상은 더욱 심하다. 현대사에 대한 논란을 접하면 역사 기록이라는 것에 대한 회의까지 가지게 된다. 그렇다고 역사의 진실성 추구를 포기할 수도 없다.

지금 만신창이가 된 현대사의 진실을 찾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뜬금없는 얘기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이라도 그 시대를 살아온 어르신들의 보다 많은 개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국가 차원에서 집대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개인의 이야기로 파편처럼 흩어져버리게 만들어서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는 무척 시급하게 진행해야 하는 일이다. 6‧25전쟁뿐만 아니라 일제 시대 민간인의 삶, 4‧19, 5‧16 등 굵직한 사건을 그 시대에 살던 개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들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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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4‧19민주묘지. 6‧25전쟁뿐만 아니라 4‧19, 5‧16 등 굵직한 사건을 그 시대에 살던 개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들어봐야 한다.

이 칼럼을 읽은 후 각자의 부모, 조부모, 형제 자매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묻고, 여력이 되는 분들에게는 그들이 직접 쓰게 하고, 혹은 그들에게 들어서 기록으로 남기는 노력을 우선 기울여보자. 이 노력이 캠페인처럼 번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 기록들이 한 데 모이고 정리되어 역사의 진실을 찾는 데 뒷받침 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현대사 왜곡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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