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희 칼럼]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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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2.02.03 09:46:37
  • 최종수정 2022.02.0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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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승만은 친일파도 친미주의자도 전쟁에 미친 사람도 아니다. 다만 나는 대한민국에 미친 사람이다. 나는 대한민국파, 대한민국주의자일 뿐이다. 내 일생은 그렇게 대한민국을 위해 바쳐졌을 뿐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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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까지 한 달을 남겨두고 있다. 언제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대선 결과에는 정말 이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는 듯하다. 힘겹게 선진국 문턱에 닿은 이 나라를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그 과정에서 이권을 차지하려는 사람이 이 땅에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 나라를 망가뜨리는 데 조금의 거리낌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빨리 그런 자들의 손에서 나라를 구하지 않으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나라가 질곡에 빠질 수 있다. 그러기에 이번 대선에서의 승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새삼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제껏 여러 가지 이유로 무시되고 외면당했지만 그의 애국심과 헌신, 그의 천재성과 혜안, 그리고 보통의 말이나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대한민국을 위한 업적은 언제라도, 새삼스럽더라도 자주 부각되고 강조되어야 할 일이다.

이 글은,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에서 그의 삶과 업적을 재구성한 글이다. 물론 사실에 바탕을 둔 내용이다. 나는, 대선 후보와 그 보좌진들이 헌신과 희생과 더 넓은 안목으로 이 나라, 대한민국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탰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마치 이승만 대통령이 했듯이 말이다.

1.

나(이승만)는 살아 있는 동안 큰 전쟁을 여러 차례 겪었다.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이는 우리 세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견뎌야 했던 슬픈 운명이었다. 우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지켜봐야 했다. 세계대전이 멀리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고 해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우리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치른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스무 살 되던 해에는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땅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도 무서운 일이었지만 그 전쟁이 우리나라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싸운 것이었기에 더욱 두려웠다. 그뿐이 아니다. 1904년에는 일본과 러시아가 우리나라를 놓고 마지막 한판을 벌였다. 그때 우리나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내기에 걸린 물건처럼 이리저리 내던져지고 있었다.

1
이승만 대통령 어록비(천안 독립기념관).

내 평생 전쟁 아닌 전쟁도 수없이 겪었다. 청일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 일본 깡패들이 우리의 국모를 살해했다. 시퍼런 칼을 든 일본 깡패들이 우리의 수도 한복판을 휩쓴 것만도 참을 수 없이 두려운 일인데 국모를 죽이기까지 하다니. 이는 조선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해야 할 만큼 위중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조선 왕조는 어떻게 했는가? 그 깡패들의 처벌도 제대로 요구하지 못하고 왕은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때 이미 조선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 이승만이 고종 황제가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그의 이런 태도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라를 빼앗긴 일도 겪었다. 내 눈앞에서 내 나라의 망국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또 망해버린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런 일들을 겪었기에 나는 이를 악물고 우리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 싸운 것이다.

2.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국가라는 소중하고도 거대한 조직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나를 비판하고 내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나는 끝없이 설득해야 했다. 나는 정부를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부터 국회의원들과 갈등하기 시작했다. 나는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대통령 직선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 국민의 수준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는 것은 무리입니다. 국회의원들이 대통령도 뽑고 국회의원 중심으로 정치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국권을 찾기 위해 40년 동안이나 싸워온 것은 국민에게 권리를 주자는 것이었지 정당에 주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당에 권리를 주면 정당끼리 싸우느라 나라를 이끌어 가기 어렵게 됩니다. 만일 내각 책임제로 헌법이 만들어진다면 나는 그런 헌법 아래서는 어떤 지위도 맡지 않고 민간에 남아 국민 운동이나 하겠습니다.”

“그럼 대통령 중심제로 하되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합시다.”

건국 초기에는 국회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고 국무총리를 승인할 권리까지 가졌다. 그러다보니 대통령인 나와 생각이 다른 부통령, 생각이 다른 국무총리가 뽑히게 되었다. 나라를 새로 세워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였는데 배가 바다나 강이 아닌 산으로 올라갈 형편이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4년이 흘렀다. 1952년에는 대통령을 다시 뽑는 선거가 있었다. 그 사이에 6‧25전쟁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고,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때였다. 전쟁 중에도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우리 국민의 열망은 식지 않았다. 국민 대다수는 자신들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기 원했다. 그래서 나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로 법을 바꾸고자 했다. 그해 여러 가지 힘든 과정을 거쳐 드디어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고쳤다. 덕분에 나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에 당선되는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3.

내가 6‧25전쟁 때 한미동맹을 요구한 이유는, 미군이 떠난 후 우리나라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군사적으로 그리 중요한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다시 공산주의자들이 침략하면 한국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미국은 우리와의 동맹을 원하지 않았다. 한미동맹이 몇몇 관리의 결정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미국 국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1953년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한국의 반공 투쟁이 미국의 독립 투쟁과 같은 것이라 호소하는 방송도 했다. 여러 차례의 호소문과 영어 방송을 들은 미국 국민은 한미동맹에 대해 지지하기 시작했다.

부산 임시 수도에서의 이승만 대통령(모형).

그때 나에게, 우리나라에 물러날 곳은 없었다. 단지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하는 방향으로의 전진이 있을 뿐이었다.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 엄청난 결단과 나의 끈질긴 투쟁으로 미국은 한국의 가치를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미국은 강력한 지원을 하여 한국을 다시 일으키고 이를 자유 진영의 성공 사례로 삼기로 했다. 나도 한 걸음 양보했다. 휴전을 받아들인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10월 1일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미국 워싱턴에서 맺어졌다. 이로써 우리는 공산군의 침략에 속절없이 당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통일은 못 했지만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우리의 후손들은 여러 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또 이 조약 덕분에 앞으로 우리나라는 미국이라는 강력한 울타리 안에서 활기찬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다.

4.

1950년대 후반부터 비료, 유리, 시멘트, 철강, 제지, 전자 기계 등 생산재 산업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는 스스로 경제를 세우기 위한 기간산업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원조를 해주는 미국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미국은 우리 경제의 자립보다 경제 안정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의 비위를 맞추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 덕분에 1958년 이후에는 수출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경제가 성장했다.

나는 그때 경제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니었다. 굶지 않는다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국민은 자녀들 공부를 시키고 싶어도 먹고 사는 데 바빠서 학교에도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우리 정부는 건국 헌법에 실린 내용을 기초로 1949년 교육법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모든 국민은 자녀가 만 6세가 되면 학교에 보내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런데 국민은 교육의 의무를 의무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로 생각하였다. 우리 국민은 놀라운 교육열을 보여주었다. 교육만이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우리 국민과 정부의 교육열은 전쟁 중에도 식지 않았다. 교육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었는데도 수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길거리에 의자를 놓거나 혹은 천막 교실을 만들어 수업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수많은 국민이 교육 혜택을 받게 만든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덕분에 사회 여러 분야에서 인재가 쏟아져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인재들은 앞으로도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발돋움시키는 소중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5.

어떤 사람들은 나보고 친일파라고 한다. 해방 직후 친일파를 모두 잡아 감옥에 보내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일제 시대에 나랏일하던 그들을 다 감옥에 보내면 새로 세운 나라의 일은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 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고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해야 세상이 질서 있게 돌아갈 수 있는데 말이다.

더구나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외국으로 떠돌아다니며 우리나라의 해방을 위해 목숨 걸었던 내가 어떻게 친일파가 될 수 있겠는가. 나 이승만은 끝까지 일본에 머리 숙이지 않았다. 일본이 우리 땅은 물론 바다에까지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하게 경계선도 만들었다. 미국이 화해하라고 강력하게 압력을 넣었음에도 나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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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동상(서울 남산 자유센터)

어떤 사람들은 나보고 친미주의자라고 한다. 해방 전부터 미국과의 외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미국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도 나는 절대로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가지지 못한 나라의 지도자 중 나처럼 미국 대통령과 정면으로 맞선 사람은 흔치 않다. 내가 정말 친미주의자라면 미국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미국 앞에서도 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지켜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보고 전쟁에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6‧25전쟁 때 휴전을 반대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때 정말 한국군만으로 전쟁이 가능했겠는가? 그때 우리에게는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기름이 3일치밖에 없었다. 하지만 휴전을 안 하겠다는 내 말이 공산주의자들에게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또 휴전을 반대함으로써 우리를 끝까지 돕겠다는 약속을 미국에게 얻어내기도 했다.

나 이승만은 친일파도 친미주의자도 전쟁에 미친 사람도 아니다. 다만 나는 대한민국에 미친 사람이다. 나는 대한민국파, 대한민국주의자일 뿐이다. 내 일생은 그렇게 대한민국을 위해 바쳐졌을 뿐이다.

*

2022년 3월9일, 부디 대한민국의 국운이 되살아나 정직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가 사사로운 이익이 아닌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국정을 슬기롭게 이끌어가길 간절히 기원한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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